#. 행위와 존재, 발제후기
1. 본회퍼 저작과 첫 만남은 <행위와 존재>였다. 보통 <나를 따르라>나 <윤리학>으로 입문을 한다고 하는데, 발제로 인해 <행위와 존재>를 반타의적으로 읽게된 셈이다. 책의 부제가 '조직신학내에 초월철학과 존재론'이었는데, 철학적 배경이 부족한 나에겐 읽는데 여간 곤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번 하이데거의 <근거의 본질에 대하여>때에도 그렇지만, 일단 본문만 반복해서 읽다가 '아 읽는것만이 능사는 아니구나' 하곤 조용히 책을 내려놓기도 했다. ;;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행위와 존재>는 본회퍼 저작 중 난해하고 난삽한 서술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2. 하지만 발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 더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교회와 만나는 지점을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칼 바르트가 신학적 개념들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본회퍼는 보편적인 철학적 사유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학을 당대에 논증된 철학으로부터 해방시키려했다. 한마디로 철학적 사유방식을 십분활용하며 신학적 사유를 펼치려했다. “철학적 터전에서 그리스도교적·신학적‘계시’에 상응하는‘사유양식’은 무엇이며,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본회퍼 그가<행위와 존재>를 통해 해명하려 했던 문제의식이었다.
2. 그래서일까.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곁다리로 하는 이야기지만, 석사 1학기 대학원 수업 대부분을 철학과목들에 우겨쌈을 당하면서 알게모르게 적응을 못하고 있었던게 사실이다. 특별히 이번 학기 수강한 과목들은 각각 크게 세명의 인물과 저작을 다루었는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그리고 불트만을 경유한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에서 '칸트'와 '하이데거'를 만나니 뭔가 선행학습한 보람이 생기면서도, 정말 눈물나게 반가웠던것 같다. 내겐 본회퍼로 이번학기 모든 주제가 귀결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이 역시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근대의 칸트, 현대의 하이데거를 논하지 않고 근대와 현대의 정신사를 이해하려는 이는 거의 없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되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
3. 책의 논지는 간단히 말해, 칸트의 초월철학에 영향을 받은 칼바르트의 '행위'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의 '존재' 논의를 둘다 비판하며, 하나님의 계시 이해는 "행위와 존재"의 두 대립적 입장을 너머 그리스도론, 교회 개념에 이르서야 비로서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나의 경우 1장, 철학적 배경을 맡았기 때문에 본회퍼가 '행위'를 중심으로 칸트와 피히테를, '존재'를 중심으로한 후설, 셸러, 하이데거를 어떻게 비판하고, 두 시도다 한계가 있다고 논증하는지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했다.
4. 발제준비는 1주일정도 했고, 발제분량은 5장으로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막히는 부분은 도움을 받아야 했다. 모르는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도움을 받기보다는 먼저 <행위와 존재>와 관련한 자료들을 검색해 보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검색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행위와 존재>와 관련해서 쓴 2차자료나 논문은 희박하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거의 불모지에 가까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행위와 존재> 책 번역 자체가 2010년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 주제로 논문을 쓴 자료는 국내에 계명대하교 신영호 석사논문이 유일했다. 본회퍼의 계시이해. 계명대학교 대학원. 1998)
그래서 방향을 돌려, 대학원 선배 중 본회퍼를 전공하신 분이나, 대학원 본회퍼 세미나에서 <행위와 존재>와 관련해 강좌가 열린 것이 있는지 수소문을 해보기도 했다. (그래야 했던 이유는 한 3번쯤 읽어도 감이 안잡혀서 점점 초조해진 마음 때문이기도했다.) 수소문 끝에 케리그마연구원에서 작년 말에 <행위와 존재> 세미나를 12주 과정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문의드렸고, 본회퍼 전공과 관련해서는 종교철학 선배님 김영수 형님과 감신대학원 김광현 형님의 도움이 받았다. 사실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시다며, 바쁜 와중에도 적극적으로 장문의 답장을 반복해서 주셨다. (이쯔음 되니 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바의 큰 골자는 얼추 잡히는 듯 하였다.)
토론주제를 잡을 때는 "본회퍼의 문제의식에 맹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문제의식의 타당성을 내 입장에서 검토해봐요.", "있음-앎-삶의 구도로 상황을 정리하는 건 다소 후차적인 작업이어야 좋다고 봐요.", "먼저 본회퍼의 상황 속에서 철학적 두 입장이 신학적으로 수용될 수없었던 각각의 이유, 그러한 결론으로부터 파생되는 신학적 문제를 잘 이야기 하는것이 수업을 듣는 입장에서 더 유익할 것이라고 봐요" 등등의 조언을 얻기도 했다.
5. 우여곡절 끝에 발제준비를 마치고, 수업시간에 발제를 무사히 마쳤다. 사실 원우들과 얼마나 소통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 또한 겨우 이해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읽으신 행위와 존재 해석을 토론 이전에 먼저 듣게 되었는데, 거의 흐름과 논지가 맞아 떨어져서 너무 감사했다. (내가 헛수고한 것이 아니란 걸 새삼 느꼈던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교수님의 탁월한 해석과 더불어 <행위와 존재> 번역의 문제(초월은 형이상학의 범주로, 선험은 인식론의 범주로 설정되어야 하는데 있음과 앎의 범주가 모두 초월로 통일되어 막 뒤섞여있으니 곤욕이다), 종교적인간의 자기성찰(계시이해 이전에 거쳐가야할 자기도취와 우상성을 지닌 자화상), 오늘날 조국교회의 현실등에 대해 나누는 것으로 발제 및 수업이 마무리 되었다.
ㅡ그밖의 이야기. 이후, 광현이형과 저녁을 먹다가, "본회퍼의 논점에 나타나는 구심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가 교회론를 사회적범주로 돌리려한 것으로 볼 때, 구심점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는 부분에 삶과 학문이 맞닿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더불어 그가 영향을 받은 키에르케고어 역시 덴마크 교회 타락의 현실에 빗대어 저항과 고독의 신학을 전개한것으로 볼때도 비슷한 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광현형은 본회퍼, 키에르케고어 둘다 루터교에 영향을 받은것으로 볼때 '구부러진 마음', '타락한 양심'이라는 근본뿌리를 주제로 위 이야기를 엮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조언도 해주셨다. 집에 돌아와서 루터교의 근본뿌리를 볼때 "아우구스티누스(동서방로마교회)ㅡ루터(가톨릭제도교회)ㅡ키에르케고어(덴마크교회)ㅡ본회퍼(고백교회)"로 이어지는 대조로 "현실"을, 즉 하나님의 세계의 도래를 엮어봐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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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1장을 철학적 시도들을 바탕으로, 2장과 3장에서 계시이해에 대한 본격적 본의가 시작된다. 신앙과 공동체와 사이의 변증법이라 일컫어 지는 이후의 논의는 사실 철학적 사유 속으로 도피해 버린 것만 같은 나의 실존에서 부끄럽지만, 붙잡아야할 주제이기도 했다. 사역자로 살지 않으면서, 어쩌면 교회에 온전히 헌신하지 않은채로, 신학을 논하는 것에 대해 때때로 지탄을 받곤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회퍼의 문제의식은 신자와 비신자를 넘나드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 즉 종교적 인간의 입장에서 계시이해를 정직하게 분석해 보고, 한 인간으로서 질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인식한다고 말할 수있는가? 그것이 보편적으로 그렇다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개인의 투사와 나르시즘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이에게 전달될 수 있는 사유방식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던진 뒤 그는 곧바로 교회로, 하나님에게로 비약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적 인간이해를 깊이 숙고하고, 그 한계를 논하면서,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와 교회공동체의 존립이 희망이 되야하는 이유를 열어밝힌다.
바로 이지점에서 나의 도피가 합리화될 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신학의 위기'는 오히려 지금/여기의 인간적 사유성찰을 간과하고, 너무 급하게 저기/저너머 논의로 도피한 것이 더 큰 위기를 낳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며 얻는 면죄부는 사실 만들어진 신, 아니 만들고 싶은 신이다. (그리고, 드리워진 한계의 어두운 그림자 만큼이나 빛의 도래가 간절해 지는건 두말하면 잔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