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비나스의 타자철학과 선교하는 신학
#. 레비나스의 타자철학과 선교하는 신학
타자란 무엇인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는 “네 이웃이 누구이냐”라는 질문으로 율법교사 안에 숨겨져 있던 사고방식을 꾸짖으신다. 이웃사랑은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그러한 신념과 기준에서 전적으로 어긋나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의 문제의식을 주목하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존재론에 기반한 전체성을 비판하며 타자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제시한 학자이다. 그는 서양철학의 역사가 자주 ‘존재론’에 치우쳐 ‘존재’이해라는 중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통해 타자를 동일자로서 환원시키는 역사였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정신(geist)’이나 하이데거의 ‘존재(sein)' 개념은 그 형태가 다르더라도 타자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중립적이고, 비인격적으로 포괄하여 통합하고자하는 시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보기에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타자는 통제되지 않는 것, 즉, 주체에 의한 초월의식에 의해 결코 포획되지 않는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레비나스의 문제의식을 보다 간명하게 살펴보기 위해 레비나스의 ’초월‘에 주목하고자한다. 그는 진정한 초월은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로 인해서 발생된다는 주장을 통해 서양철학이 ‘존재론적 초월’이 아니라 ‘윤리학적 초월’로 전향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윤리학적 초월의 계기로서 ‘주체성의 폭력’를, 초월의 자리로서 ‘타자의 얼굴’을, 초월의 적용으로서 ‘현대의 선교담론’을 차례로 살펴보며, 그의 문제의식을 쫒아가고자 한다.
1) 초월의 계기 : 전체성의 사유방식
레비나스의 윤리학적 초월의 계기는 ‘주체성의 폭력’에 있었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 존재론의 역사는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타자를 동일자로 포획하는 사유방식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의 타자철학과 사유방식의 관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사용하며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해석학적 성찰로서 존재사유는 단순히 주객구도의 ‘존재자적 대상’이 아니라 현존과 세계이해라는 ‘실존론적 가능성’임을 가르쳐 주며 새로운 존재이해의 장을 열어주었다. 즉 하이데거는 인식론적 초월이 아니라 실존론적 초월을 말하며 ‘존재자’와 구별된 ‘존재’ 이해가 서양철학의 ‘존재론’을 구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방식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논지에는 강력한 익명성, 즉 반-휴머니즘적 성격을 지닌 존재론이 배태하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인간이 죽음을 겪을 수 없지만 죽음을 떠올림으로써 앞당겨 경험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개개인의 실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타자의 영역이다.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의 영역은 ‘불가능한 가능성’ 아니라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로인해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초월로서 깔끔하게 처리된 숨은 ‘전체성’을 향한 욕망을 발견한다. 1, 2차 세계대전과 수없이 반복된 피난민의 경험은 이러한 숨은 욕망을 반복해서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우리 시대는 죽음 앞에 어찌할 수 없음을, 우리의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기준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현실에 놓여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초월은 동일자가 말하는 ‘현존재의 초월’에 머물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화두는 그렇게 존재의 빛으로 인해 열어 밝혀지는 ‘가능성의 존재’가 아니라 전혀 낯선 미지의 공포로 다가오는 타자가 지닌 ‘불가능성의 감수성’을 향한다. 그리고 존재사유에 갇혀 잃어버린 존재자를 찾고자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즉, 존재자의 인격성의 회복의 자리를 문제 삼는 것이다.
2) 초월의 자리 : 타자의 얼굴
그러므로 레비나스에게 초월의 자리는 ‘주체성의 지배’가 아닌 ‘타자의 얼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타자’는 익명적 있음이 아니다. ‘타자’는 동일자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구체적인 무한자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사유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개별자의 구체적 존재함이 지닌 미지의 낯섬과 불편함을 선사한다. 우리는 자아와 타자가 대화하는 얼굴의 대면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도식이 아닌 의미부여 이전의 어떤 차원을 경험한다. 그것은 개념화 이전의 직접성으로서 ‘벌거벗은 얼굴의 호소’이다. 레비나스는 이 벌거벗음을 설명하기 위해 ‘말해진 것’과 ‘말함’이라는 구별을 통해 이를 주제화 하는데, 이는 앞선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사유를 연장하며 ‘존재와 다른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해진 것’이 기존 존재론의 지배사유로서 타자성이 주체의 인식범주 안에 환원되어 대상화 된 것이라면, ‘말함’은 타자의 얼굴에서 나타난 호소처럼 타자성에 주체가 노출되는 사건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타인의 말 건네옴은 단순히 대화 차원에서 말 건네옴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처럼, 타자의 말 건네옴은 타자의 얼굴의 현현과 함께 다가온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타자의 명령처럼 다가온다. 즉, 타자와 마주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얼굴은 그 명령에 응답하라고 우리를 몰아세운다. 레비나스는 바로 이지점에서 ‘윤리학적 초월’이 자리 잡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타자의 얼굴은 나의 모든 사유방식의 틀을 넘어서 있고, 나의 자율성의 범주를 문제삼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자유보다 중요한 것이 ‘책임의 의무’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철학의 목표는 ‘말해진 것’을 통해 ‘존재’를 규정하려는 기존 서양철학의 존재론적 언어 바깥에서 ‘말함’을 통해 ‘존재와 다른 것’을 표현하려는 열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미전달의 도구로 전락한 타자담론이 아니라 언어의 형성 이전에 발생하는 언어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타자의 얼굴은 결코 ‘존재언어’가 아닌 ‘계시언어’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타자의 부름 앞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는 주체의 무력함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레비나스라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앎의 욕망을 포기하고, 타자의 타자성에 자기를 내어주는 ‘윤리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한 레비나스의 대답에 우리의 신학은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상황을 주제화하고, 새로운 성찰로 나아가기 위해 그 대표적인 예로, 신학의 최전선에서 타자와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3) 초월의 적용 : 얼굴을 마주하는 선교
계몽주의 이래 선교는 타자의 얼굴에 마주하기보다 그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몽시키는데 급급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의 선교의 결과들은 대부분 서구 식민주의 맥락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하는데 왕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선교사들의 선교도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정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선교사들은 이상적인 협력자였으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구제국주의 확장의 개척자들이었다. 또한 계몽주의의 진보의 철학은 철학적 낙관주의를 조장함으로서 기독교의 선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세상을 개혁하고 빈곤을 몰아내며, 모든 사람을 위해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선교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필요한 것을 쥐어주는 선교를 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선교의 패러다임은 탈-식민지적 패러다임을 요청받고 있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 오늘날 선교는 ‘말해진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함’에 동참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를 방연상 교수는 『타자와 책임』에서 다음과 같이 정돈하였다. 첫째로, 레비나스의 사유는 무한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타자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레비나스의 타자의 책임으로서 대속은 타자를 나보다 높은 위치에 두는 비대칭적 접근을 요구한다. 이러한 접근은 내가 타자를 바라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선의를 베풀거나, 선택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을 넘어 ‘타자 덕분에’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셋째로,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은 포스트모던이라는 탈식민지 시대에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다. 우리는 더 이상 서양기독교의 우월성과 인식론적 순진함으로 종교와 문화의 다양함을 마주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남반구 비서구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현상들에게 대해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요청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선교’는 ‘주체적 사유’에서 ‘탈주체적 사유’, 즉 존재론적 모험을 강행하는 경계넘기를 요구한다. 즉,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중심을 포기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타자와의 계속적 관계 형성과 대화를 통해서 의미를 찾고, 확장시킴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방식에 있어 레비나스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타자가 없는 시대에 타자와 함께, 타자와 더불어 하는 선교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일 것이다.
ㅡ 대학원 종합고사를 준비하며 요약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