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사 첫학기, 기말 후기.

1. 소논문, 당혹스러운 과제.

첫 수업때, 교수님께서는 중간고사는 없고, 기말고사는 '소논문'으로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왜 중간고사를 안치루지?' 라고 생각했다. 출석이 20%이고, 기말이 80% 라는 점이 꽤 부담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종강 날, 교수님의 말씀을 곱씹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종강 날입니다. 이제 배운 것 '중에서'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6월 27일까지 소 논문으로 작성하여 제출하세요"

배운 것들 '중'에서..? 하고싶은 주제를 '선택'하여..?. 처음에는 몰랐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말은 내게 매우 낯선 요청이였다. 그래서 '중에서', '선택하여' 라는 말을 소화하는데 한참이나 걸렸어야 했다. 무슨말이냐 하면, 그것은 고등학교, 대학교 때 공부했던 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수업을 성실히 따라가고, 배운 것을 충실히 적어내는 것이 중요했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했었다. 그러나 석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석사 '소논문' 기말에 요구하는 것은 수업내용뿐 아니라 '나의 시선'을 요구했다. 다시말해, 지금껏 수업에 임하면서 '자네는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시선을 어떻게 소논문으로 풀어갈테인가?'를 묻고 있었다.

교수님이 가르친 내용이 아니라 내가 바라본 시선... 이라니. 그러한 물음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주요한 내용을 '모두' 담아서 '펼쳐내려' 했던 내게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종교철학을 입문하는 내게 <하이데거와 기독교>, <철학적 해석학과 인간의 종교성> 수업 등은 담아 내는 것 자체가 주요한 과제였지 관심분야는 거의 뒷전이었다. 실제로 난 수업 내내 하이데거가 당췌 누군지 몰라 해멨었고, 철학용어에도 익숙하지 않았으며, 그와 연관된 수많은 논쟁은 내겐 꽤나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관심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엮어내라니, 그것은 결코 내게 자.유.롭.게 선택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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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제의식, 그리고 불편한 시선.

그래도 과제는 해내야할 터, 일단 수업시간에 필기한 내용을 죄다 뽑았다. 보통 한 수업당 30장 어간 정도의 필기가 적혀있었다. 일단 다 뽑아놓고, 읽어보았다. 별 쓸데없데도 없는 잡담부터 시작해서, 꼭 필요한데 완성되지 못한 채 넘어가버린 금언에 이르기까지 온갖 내용들이 뒤죽박죽 널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맥락없이 뜬금없이 쓰여진 필기도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딴짓하며 끄적여 놓은 낙서들이었다. 나중에 질문하려고 끄적여 놓은 메모, '과연 그러한가?' 하곤 적어놓은 반감섞인 의문들이 꽤나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함께 끄적여 있었던 것이다. '만약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나의 끄적거림이 문제의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어리숙하게나마 나의 시선이라 볼 수 있을까?' 그리곤 순간 머뭇 거렸다. 그 이유는 사실 그것은 거창한 시선이라기보다 그 이전에 나의 세계관에서 발견된 일종의 '불편함'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텍스트에 대한 접근방식이었다. 이게 부끄러운 이야기인지,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신-없이 신을 사유하는 방식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무슨말이냐 하면, 수업 시간 내내 "신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에 대한 물음과 같다."라고 말한 불트만의 실존, "있는 것들의 최고의 존재자인 '신'을 택하느니 차라리 '존재'에 대해 논하는 것이 신에 더 가깝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듯한 하이데거의 문제의식, 그리고 심지어 "초월적 시도와 존재론적 시도에는 계시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고 말하는 본회퍼의 변증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인 '신'에 대한 언급 없이 수많은 논의들을 풀어가야 했던 한 학기였다.

무언가 사유는 탁월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그리고 건조한 무엇이 꽤나 나를 머리 아프게 했다. '우상숭배'와 '자기도취'라는 주제가 관통되는 해석학의 과정에서 나의 불편함은 때론 성찰해야할 대상이 되기도 했고, 변증해야할 과정이 되기도 했으며, 때론 인정해야할 순간이 와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리고 끝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영역도 있었다.하지만 도무지 왜 그러한지 변증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것을 변증하지 못하는 순간 내가 말하는 '신'이라는 것은 사실 '우상'이며, '투사'며, '무의식의 발현'이고, '구조적 폭력'으로 일축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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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방법, 선배님 도와주세요.

무작정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지는 '불편함도 시선이 될 수 있나요?' 였는데, 한마디로 '물론이지' 라는 말이었고, 그밖에 수많은 조언들도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몇가지 나열하자면, L 형님은 "교수님께 배운 내용을 정리하기 바쁜가? 아니면 학문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행하는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고, M 형님은 반대로 "실험적인 글쓰기 이전에 교수님께 배운 내용을 어떤 시선을 가지고 전반적으로 엮어낼지를 훈련하는 접근방식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말해주셨다. 그제서야 두분의 조언에 기대어 잽싸게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적어 나갔다. 나름대로 목차를 짜서 만든 후 같이 수업을 들었던 K 형님을 찾아가 목차를 보여드리며 "형, 목차보고 어떠한 이야기라도 해주세요" 라고 물었다. 가장 먼저 돌아온 답은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 하지 않아도 되요."였다.

하지만, 그 후 K 형께서 내게 온갖 질문들을 했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며, "자신의 문제의식에 빗대어 볼때, 하이데거의 말에 동의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봐요. 동의하지 않다면 구체적으로 무엇때문에 동의하지 않는지 적어보고요" 라는 구체화랄지, "본회퍼는 하이데거를 디스했는데, 하이데거도 그 디스에 동의했을지 상상해보세요. 만약 하이데거라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라는 자신이 반대하는 학자입장에 서서 대변하는 방식이랄지, "불트만, 본회퍼, 하이데거등 자신의 접근방식이 시중에 사람들이 이미 평가를 내린 것으로 인해 혹여나 문제가 되지 않을까 주눅들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이런저런 평가들에도 오해와 확언들이 일어나고 있는바, 내가 원문을 읽어보니 '너희들이 오해한 것 같다. 본래 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것 이었고, 이런 의의가 여전히 있지 않는가'라는 평가를 재평가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해요"라는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여러조언들에 힘입어, 고심 끝에 소논문 중 하나(A)는 하나의 시선으로 전반적인 내용을 엮는 것으로, 다른 하나(B)는 내가 좋아하는 본회퍼를 하이데거의 눈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사실상 A와 B 소논문 구별없이 연구했다. 왜냐하면 A 수업에는 불트만과 본회퍼를 다루었고, B 수업에는 하이데거를 다루었는데, 하이데거의 눈으로 불트만과 본회퍼를 보려하다보니 구별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A 논문의 제목은 "참-신앙을 향한 불트만과 본회퍼의 계시이해 : 하이데거 철학의 수용방식의 차이를 중심으로" 으로, B 논문의 제목은 "하이데거 "초월" 개념에 나타난 신학적 의의 : 자아의 폐쇄성에 대한 해명을 중심으로" 라고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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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성과정, 글쓰기와 사유습관의 중요성.

먼저, A 논문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이 불트만에겐 긍정적으로, 본회퍼에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바, 그것이 계시이해에 있어 어떻게 차이를 달리하며 수용되었는지를 비교-분석하는 것이었다. 불트만의 계시이해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계시의 사건에 의해 실존론적 해후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제시하지만, 본회퍼에게 있어 그의 철학은 계시의 사건이 들어올 공간이 없는 ‘폐쇄적 실존의 존재상태’을 설명하기 위한 방식으로 부정적으로 제시된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더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본회퍼의 비종교화에 이르는 과정까지 이어보고 싶었다.

다음으로, B 논문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하이데거의 눈으로 본회퍼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자아에 사로잡힌 체계’로서 계시에 어떠한 자리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본회퍼의 자기중심성 비판에 의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이를 넘어서는 면이 또한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러한 오해가 하이데거 철학의 ‘존재론적 차이’를 통해 나타난 현존재의 초월 개념을 오해함에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한 후, 하이데거 철학에 나타난 초월의 본 의미와 신학적 오해를 해명함으로서, 하이데거 철학에 나타난 초월개념이 신학적으로도 다양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음을 밝혀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작성하는 과정에 느낀 것은 첫째로, 부족한 필력에 대한 절절한 좌절이었다. 담아내야 할 개념은 큰데, 그것을 소화하지도 못한채 나열했으니, 글이 자꾸 추상적으로 흘러갔다. 이러다가는 다른사람도 무슨 말하는지를, 적는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사태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또한 써내려 가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수사적 습관도 알 수 있었는데, 딱히 고칠 방도를 찾길 못했다. 예를 들자면, 기본 문단 구성은 1) 해석의 결과 및 주제문장, 2) 1에 대한 이유와 근거, 3) 필요시 직접인용 순이었다.. 그런데 이에 따라 적다보니 글이 한결같이 "그러므로/따라서~이다.(1), 왜냐하면~때문이다(2), 실제로 00는 ~라 말했다(3)" 라는 식으로 반복되었다. 그나마 변화를 위해 했던 노력인 '이와 같이', '다시말해', '즉' 등이 있었는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글이 딱딱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어 답답했다. (자체 평가하건데, 문장구성이 기계적인 글일지언정 감흥이 느껴지는 글은 아니었다.)

두번째로 느낀것은 필력을 메꾸기 위해 보았던 2차 자료들에 대한 욕심이었다. 글이 안쓰이다보니관련된 질좋은 논문들과 참고자료들에 자꾸 눈이 갔다.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설득력과 논리적 구조로 술술 풀려 있으니 애꿎은 필력을 탓하면서도 포스트잇으로 마구 표시를 해두었다. 문제는 이것저것 참고문헌에 표시만 해두었지, 정확히 어떤 것을 선별하여 직접인용 할지 해메게 된다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색상구별이 오히려 도움되기는 커녕 혼선을 가져오기도 했다. 결국 작성하는 과정 중에 운좋게 생각나면 인용하는 식이 되어버리곤 했다.

세번째로 느낀 것으로 오히려 1차자료만 충실히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역설이었다. 무슨말이냐 하면, 2차자료의 바다에서 설명을 듣느라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사라지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2차자료도 설득과 논리를 갖추다 보니, 그 논의에 충실히 따라가느라, 수업을 들으며 또 원문을 읽으며 느꼈던 감흥이 초점을 잃은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오히려 차분히 원문 하나만 쭈욱 쭈욱 읽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원문에 멈춰서서 잠시 생각해 보고, 질문해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2차자료는 오히려 논리정연하여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수많은 참고문헌들은 정말 참고해야할 사항이지 메인으로 등극해서는 안된다는 뻐저린 교훈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작성과정에서 느낀 것은 글쓰기와 사유습관의 중요성이었다. 연구의 방향과 문제의 시선을 포착하더라도,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은 평소에 사유했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싸움이었다. 그러한 싸움에 2차 자료나 참고자료는 순간적으로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부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논문의 퀄리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도 덤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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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출 직전에도 보이는 구멍들.

결과적으로 논문은 마감 하루 전에 마쳤다. 부족한 실력을 탓하고, 무분별한 자료속에 헤매느라(어쩌면 교훈들을 얻고, 성찰하느라) 정작 작성해야할 소 논문을 끝까지 밀어부치는데 힘이 딸렸다. 머리 속에서는 기-승-전-결이 그려지는데 막상 타이핑을 치려니깐 한 두줄 써내려가는 것도 힘들었으니, 정말 곤욕이었다. 마치 무용수가 동작을 이렇게, 저렇게 취하면 된다고 알고 있으나, 막상 무대에서 표현하려니 따라주지 않는 몸을 원망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쨋든 마감의 힘은 마법처럼 있는 생각, 없는 생각을 끌어모아 주었다. 목차대로 어떻게든 글이 정돈된게 신기할 정도였다. 뭐, 부족하더라도 인정하는 것도 실력이랬다. 소논문은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무리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작성된 최종결과물을 프린팅 한 뒤, 천천히 퇴고하며 살펴보았다. 먼저 A 논문은 작성하는데 9일이 걸렸고, 총 18장에, 각주는 54개가 달렸다. 한편, A 논문을 쓰고 기력이 딸려 B 논문은 작성하는데 3일이 걸렸고, 13장에 각주 25개가 나왔다. (B논문은 내가 썼던 발제자료를 활용했으므로 상대적으로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각주에서 느껴지듯, 부족한 필력은 모두 각주로 매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스스로 자책했지만, 각주가 직접인용이 아니라 나름의 언어로 정돈하는 훈련이었다면, 좋은 훈련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편, 다시 읽어보니 어색한 문장이 꽤 많았다. 오타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왜냐하면- 것이다- 즉 이런식의 반복구조가 겹치거나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몇가지 레토릭을 바꿔보기도 했다. (아무도 내가 이런걸 신경쓴걸 모를테지만, 소심하게나마 "~것이다" ->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는 식에 변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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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논문을 마치며.

이렇게 긴 후기를 남기는 이유는 사실 기억하기 위해서다. 별거 아닌 것에도 참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남기는 일종의 일기일 수도 있겠다. 작성하는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리얼하게 무언가를 느꼈는데, 적어놓지 않고 방학이 되자 금새 다 내던지기 바쁜 것이 영 마음에 퀑귀고, 걸렸던 것 같다. 이 글도 떠올리는대로 정돈하며 적어나갔지만, 뭔가 그때의 그 느낌이 좀처럼 표현되지 않는듯 하다. 그때 나는 리얼하게 벅찼고, 리얼하게 답답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몇가지 스스로에게 좋은 교훈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몇가지를 손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시선이다. 이제 수업에 임할 때, 사색을 많이할 작정이다. 나의 문제의식을 쪽글로 과감히 표현해봐야겠다. 맞는 말인가? 라고 쫒아가는 것도 좋지만, 문제의식은 있을 때 냅다 저지르며 써 내려가봐야 한다. 어차피 쪽글이지 않은가. 둘째로, 발제이다. 기말기간에는 여러가지 수업들이 한꺼번에 평가되느라 한가지 소논문에만 집중할 시간이 없다. 나 역시 이번에 발표했던 발제물을 활용하여 없는 시간을 매꿨었다. 그렇다면, 이왕 발제자료를 활용할바, 애초에 학기 처음부터 수업 계획표를 보고 관심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발표하는 적극성을 띄어야 겠다. 셋째로, 정직한 자기인정이다. 자신의 깜냥을 정직하게 알아야 한다. 모든지 처음 공부하면, 부딪칠 문제들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급하고 성급하게 대처하느라,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 양질의 글을 쓰려는 노력을 나이스한 시도이지만, 부족한 실력을 탓하고 묵상?!하느라 막상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누수되는 에너지가 꽤 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논문의 주제는 소화할 수 있는 역량 만큼 범주를 한정하는 것, 잘 이해되지 않으면 논문 작성을 잠시 덮어주고 원문을 쭈욱 읽어보는 것 등 처음 쓰는 논문에서 얻는 교훈은 다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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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가 없는 방학이다. 소논문을 인터넷에 제출하고 기숙사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서 생각해봤다. '과제가 이끌어가는 인생인가?' 짧지만 짧고, 길지만 긴 한 학기를 마치며 학기중에 했던 많은 일들을 돌아보았다. 월요일에는 교양조교로 인해 송도를, 수요일-금요일에는 수요-금요 예배를 위해 교회를, 토요일-일요일에는 청년부 전체리더로 인해 회의 참석과 모임인도를, 그리고 가끔 일주일에 한두번 간헐적으로 청년심방을 했었다. 남는 시간은 화요일, 목요일 이었는데 수업이 그날이었기 때문에, 오후 내내 수업을 듣고 그 날 저녁에 공부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때론 이러한 일련의 한주간의 일정이 의무로 느껴질때도 있었다. 시작은 그렇지 않았으나 어느새 변해버린 영역들을 보살피긴 쉽지 않았다.

어쨋든, 지금은 과제가 없는 방학이란 낯선 시간 앞에 서있다. 방학에 일련의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스터디, 담당사역), 삶을 맞이하는 좋은 자세도 배워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예로, 뛰고 있는 심장을 만나긴 쉽지 않다. 크게 심호흡을 2-3번 내쉴때에 비로소 공기가 나를 감싸고 있음을, 심장이 꽤 빠른 속도로 뛰고 있음을 느낀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마땅히 마음을 쏟을 만한 곳에 쏟고 있는가'라는 거창한 슬로건은 과제가 나를 잠식해 갈 때 실제적인 경종의 역할을 했었다. 내가 삶을 살기 이전에, 삶이 나를 살게 만드는 힘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소논문이란 매개로 깨달은 것은 그 과정 이면에는 삶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미숙함이 어려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특별히 다가오는 방학이다. 방학, 표면적으로는 과제가 없으나, 그 이면에는 과제가 있는 이 여름을 잘 살펴 맞이해봐야 겠다. -

 

ㅡ. 기숙사를 떠나 고향 전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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