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 첫 발제 후기.

1. 석사 1학기, 종교철학 대학원에 들어서서 하는 첫 발제였다. 하이데거와 기독교라는 수업에서 내가 담당하게 된 주제는 그의 전기 논문,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였다. 하이데거를 공부하기 전까지만 해도 "있다!있는 것!" 또는 "없다! 없는 것!" 에 대한 생각을 해본적은 없었다. 사실 할 필요도 없었다.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생각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이데거 수업을 통해 생전 접해보지 못한 없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숨겨지는 있음(무)의 세계에 대해서 논의되니 신기하면서도, 꽤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런데 발제의 내용은 "있는 것은 도대체 왜 있고, 차라리 없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이해하면서도, 이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그 실존(현존재)의 근거까지 물어세우니 머리가 지끈지끈 거렸다. 

2. 발제준비는 3주가 걸렸다. 그렇게 길게 잡았던 이유는 처음 주제 논문을 읽었을 때, 반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읽는 것도 중요했지만, 논문자체가 난해하고, 이미 전제되어 있는 철학적 배경이 너무 많아서 읽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라이프니츠의 충족근거율, 칸트의 초월적논리학의 이해 등은 특별한 설명없이 비판하는 바램에 기본적인 이해는 다른 2차자료들을 참고해야만 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는 하이데거 전기논문 중 가장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 정보는 3번 읽어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위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ㅠ)

그런데 결정적으로 시간이 오래걸리게 된 이유는 앞뒤 맥락에서 내 발제가 어디에 위치지워 졌는지를 가늠하는데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앞의 논문(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와 내 뒤의 논문(진리의 본질에 관하여)는 나의 발제논문(근거의 본질에 관하여)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였는데, 그렇게 배치된데에는 교수님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발제 외에 앞 뒤의 내용들을 다 읽고 난 뒤에 다시 내 발제를 보려다 2주라는 시간을 날렸다. (동시에 그 논문들에 대한 해설들을 보느라 시간을 꽤 쓴 셈이다.)

3. 발제분량은 10장이 나왔다. 처음의 의도는 7장이었지만, 내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전제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살을 붙이고(각주설명), 정직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과감하게 제거하기도 했다. 대신 큰 틀에서 하이데거가 분석하는 툴이 '존재론적 차이' 같아서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체내용을 비교-대조하는 방식으로 와꾸를 맞추려고 신경을 썼다. (다시말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이 난해한 글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발제를 쓰면서 느낀 개인적 소감은 크게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소화한 이해에 대한 자기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반복되는 조사, 연결사 사용이었다. 그래도 구지 변명을 해보자면 존재, 무, 초월, 세계, 자유, 공속 등 커다란 단어들이 난무하는바, 느낌적인 느낌으로 아는 영역을 얼추 추려서 이해한 바를 과감하게 이렇게 이해했다! 라고 써내려가기가 겁나서 난해한 원문 그대로 싣었다는 점이고, '왜냐하면',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말해', '즉', '것이다' 등 반복해서 설명하는 방식외에 다른 재간이 없어서(그나마 한 재간이 '다음과 같다.' '살펴보자면' 정도이다) 분량을 조정하며 정확히 전달하는데만 신경을 썼다. 

4. 결론적으로 발제는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쉽게 마쳤다. 왜냐하면, 우여곡절의 사연에 의해 참석자들이 내가 맡은 발제논문을 거의 아무도 읽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제를 시작하며 이 난해한 글을 읽어오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10장이나 발제한다는 것이 더 난해한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설명을 더 잘했어야 했지만, 내가 사실 더욱 원했던 것은 토론을 통해서 얻게 되는 서로의 공동의 텍스트 이해였는데, 결론적으로 발제 이후 텍스트에 관해 특별한 피드백을 받지는 못했다. (나의 대학원 첫 피드백은 모선배님의 '현철아 너 50분동안 발제했다'였다.)

그것이 그리 아쉬웠을까. 지나고 나서 다시금 생각하니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 보다 구체적으로는 원했던 것은 "피드백을 통한 성장" 이였던 것 같다. 피드백을 통해 "이런 부분은 좋았고, 이런 부분은 놓쳤고, 다음에 할 때는 이렇게 해봐라"라는 식의 구체적인 피드백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잘했는지, 또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 더 살펴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 답답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제를 준비하면서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발제를 통해 최대한 소화해보려는 책임의식은 알게모르게 수업시간의 스쳐지나가는 키워드 속에서 '어? 이거 지난번에 내가 공부했던 건데', '아 그 얘기가 이 얘기였어' 식으로 의외의 장소에서 소화되는 듯 했다. 그리고 몇몇 선배님이 이야기 해준 바, 피드백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맡은 본문을 씹어 먹고, 자기 언어로 자기화 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시간 자체가 중요하니 그것에 빗대어 잘했는지도 생각해 보라는 점이 와닿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와닿은 것은 내 성품이었다. 모 선배님은 '잘하고 있으니, 너무 자학하지 말고', '천천히 가도 되니, 너무 조급해 하진 말고' 라는 말씀을 종종하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느낀 건 사실 '공부를 그리 오래할 것 같진 않아서' 내지는 '시간을 쓸수 있을때 더 잘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나중에 더 근본적으로 알게된 사실은, 그 어떤 내가 알수 없는 초조함은 불안과 자기방어, 전략적 도피와 꽤 연관이 깊다는 걸 알았다. (이건 나와 주님만이 아는 영역임을 확인시켜 주셨다..ㅠ)

6. 오늘은 좀 쉴까 한다. 요령없이 나무를 보느라 숲은 보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새 생각이 많아서 더 그렇다. 가정과 교회에도 꽤 많은 일들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일련의 공부가 정말 희미하게 나마 삶의 영역들에 묵상과 실천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우연찮게도 2주 뒤, 석사 마지막 발제가 있는데 내가 맡은 주제는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 초월적시도와 존재론적 시도>인데, 그 존재의 논의가 '행위'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천착할 수 있을지 기대하며 준비해야 할듯 싶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말 삶이다. 플랫한 삶을 입체적인 삶으로 전복될 수 있는 기적은 어디로부터, 또 어떤 태도로부터 오는 걸까. 신학에 깃대어 철학을, 철학을 깃대어 신학을 하는 나의 질문은 여전히 이 어간을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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