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2015년 1월 ‘책과함께’ 추천글
한병철, 『시간의 향기』(문학과 지성사)
-2015년 1월 31일 오후1시 제6별관
-진행: 지강유철 선임연구원


1.
오래 전 찰스 험멜이 쓴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한마디로 '급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우선 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고,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다면 그 다음으로,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다면 나중에 하라는 얘깁니다. 찰스 험멜도 시간이란 어떤 사람이 늘리거나 줄일 수도, 쌓아 두거나 잃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에 관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 속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스스로를 관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 관리를 부정하지만 험멜도 결국 시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험멜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제 행동의 중요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천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게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2.
90년대 후반부터 ‘느림의 철학’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경쟁과 스피드에 미친 시대와 맞설 대안으로 제시된 느림의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수많은 책이 번역 또는 저술되었습니다. 양화진 문화원에서도 2012년 4월의 추천도서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선정한 일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쌍소는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면 언젠가 여유와 풍요가 찾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을 경계"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정성을 다하는 것, 즉 모든 삶의 순간들이 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성공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내용이었지요. 

느림의 철학은 1999년에 한 도시 전체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그해 10월 이탈리아에서는 파올로 사투르니니를 비롯한 여러 명의 전, 현직 시장들이 모여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켰습니다. 슬로푸드와 느리게 살기로 대표되는 이 운동은 보다 편리하기 위한 속도의 추구가 값비싼 느림의 즐거움과 행복을 희생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슬로시티 운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슬로시티 운동이 모든 스피드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 로컬과 글로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조화로운 삶의 리듬을 찾자는 것입니다. 슬로 시티 프로젝트는 현재 27개국 174개 도시가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전주시 한옥 마을, 신안군 증산, 완도군 청도, 하동군 악양 등 11개의 마을이 슬로시티 운동에 가입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3.
한병철이 쓴 『시간의 향기』는 노동과 소비를 제외한, 의미를 잃어버린 모든 시간이 오늘의 사회에, “시간 자체가 소비와 노동의 대상”된 오늘의 사회에 돌직구를 날립니다. ‘슬로푸드’와 느리게 걷기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겁니다. 본질적으로 ‘슬로푸드’는‘패스트푸드’와 다르지 않습니다. “속도를 줄이는 것 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탈바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병철은 시간을 잘 관리하는 가운데 일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느냐, 또는 일의 속도를 늦춰 자기 속도를 찾아 행복을 추구하는 정도로는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의 혁명이란 시간의 향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머무름의 기술을 익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현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니체, 하이데거, 프루스트 등의 근현대 작가들과의 대결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모르는 현대적 삶에 대한 진단과 근본적 비판을 시도"합니다. 

한병철은 현대의 가장 심각한 시간의 위기가 근대적 세계관의 대두, 즉 "인간이 세계를 인간의 작위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의 죽음으로 자유를 획득하게 되자 인간은 행위를 통해 세계를 바꾸어갈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세상을 도구화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절대화로 귀결되었지요. 근대적 인간들이 세계를 조작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순간, 중심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무리하게 시간 단축을 시도하게 되자 시간의 값은 한없이 싸고 가벼워졌다는 것입니다. 한병철은 이때로부터 시간의 보복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렇게 된 위기의 근원으로 반시간성을 지목합니다. 오늘의 시간이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되면서 자연적 순환의 리듬이나 구원, 그리고 종말 등의 서사적 긴장감도 함께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주범으로 한병철은 활동적 삶의 절대화를 주장한 헤겔-마르크스 사상과 칼뱅주의 등을 지목합니다. 이들로 인해 활동적 삶이 절대화되면서 여가 시간도 일을 준비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향기 없는 시간’으로 규정합니다. 때문에 한병철은 이제는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니체와 프루스트와 하이데거의 시간 철학과 대결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써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늘 시간에 쫓기는 삶’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면 다른 시간을 창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활동적 삶 중심의 가치관을 사색적 삶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a'은 느리게 살기가 아닙니다. 그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열매를 성급하게 얻으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열매가 익어가는 아름다운 시간을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길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다림에 대한 감각이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가로움’,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등 이야말로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맞설 수 있는 존재 양식이라는 것이지요. 새해를 시작하면서 한해의 계획을 멋지게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2프로' 부족합니다. 시간 그 자체를 성찰하면서 우리 시대의 본질적 문제인 시간 그 자체와 대결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시간이란 녀석의 정체 파악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하긴, 시간의 정체를 그렇게 쉽게 파악했다면 우리가 늘 시간에 쫓기거나 시간의 노예로 살았겠습니까. 시간이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되지 않을까요. 

                                                                                                                글_지강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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