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성서주석과 해석의 문제. 메모.
ㅡ. 성서주석과 해석의 문제. 메모.
"음악적인 영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리를 듣고 그것을 청충에게 전달할 수 있다"
성서의 역사비평은 근본적으로 교회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설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정통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말씀'과 '텍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청중'과 '콘텍스트'에 무게를 두고 설교할 것이다. 어느쪽이 옳고, 더 중요한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문제는 우리의 인식론적 편의를 위해서 구분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태이다. 텍스트는 늘 콘텍스트를 담고 있으며, 콘텍스트는 늘 텍스트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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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의 설교가 정작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근본을 붙들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의 원자료인 성서를 주석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게 자신이 선택한 본문을 충분히 읽고, 주석집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 말씀을 들어야 할 청충들의 형편을 고려하여 설교를 작성한다. 흡사 수능시험을 앞에 둔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어가듯이 성서를 공부한다. 머리가 좋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듯이 설교 능력이 뛰어나거나 노력을 많이 기울인 설교자는 그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을 열거하면서 나름의 수사학을 이용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설교는 늘 거기서 거기다. 본문이 바뀌더라도 똑같은 설교만 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하는 것보다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원래 해석학이라는 원어가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신의 뜻은 숨겨져 있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점에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는 사건을 선취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점에서 설교는 예언이며, 그것이 곧 진리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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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야 하는가? 우선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문자로 된 성서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를들어, 우리는 베르디,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 할 수 없다. 그들이 보표에 그린 악보만 접할 뿐이다. 그런데 악보가 음악 자체는 아니다. 악보는 작곡가의 음악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기호에 불과하다. 음악의 실체는 소리이다. 소리를 기호에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그러니 기호와 실체를, 즉 악보와 소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은 그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가 경험한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음악적인 영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리를 듣고 그것을 청충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서를 텍스트를 '통해서' 원래의 구원 사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그 '원초적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악보가 기호이듯이 성서 텍스트는 기호이고, 소리가 실체이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실체(realiy)이다. 악보라는 기호가 소리라는 실체를 담고 있듯이 성서라는 기호가 계시라는 실체를 담고 있다. 모차르트 연주자들이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의 소리를 찾아내야 하듯이 오늘의 설교자들은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성서텍스트와 계시가 구분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각적 차원에서의 악보에 청각적 차원에서의 소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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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교회의 설교는 아예 주석도 없이 자기의 종교경험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정보차원의 성서주석에 치우쳐 있다. 전자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사이비성이 강하고, 후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진부하다. 설교의 지평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착근되어야 한다. 신학적 통찰이 필요하다.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간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기만 해도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자들도 성서의 텍스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악보에 은폐된 소리가 노출되듯이 성서에 은폐된 하나님의 말씀이 노출될 것이다.
- 정용섭. 신학공부. 성서에 관하여 p.66-73 부분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