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부시대 (약 100-451)
제 1장. 교부시대 (약 10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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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재로 모마시의 70%가 파괴되었고, 네로 황제는 크리스천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워 모질게 박해했다.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예루살렘 탈환을 명령,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성전을 무너뜨림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이 로마 황제에게 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채로 불태워져 순교했다.
정경이란 용어는 "규준","고정된 참고점"을 뜻하는 헬라어 카논에서 유래했다. 정경적이란 용어는 정경 안에 속할 것으로 수용된 경전문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정경구성은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정경구성에 사용된 기준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기본적인 대답으로는 '권위의 부여'의 원칙이 아니라 '권위의 인정'이라는 원칙이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정경성은 작품 자체의 내적 권위에 의거해야 하지 그 작품위의 자의적으로 부여된 외적 권위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정경을 창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 경전 내에 내재한 권위에 근거한 정경을 승인, 수용, 보존하는 작업이었다.
신경(creed)이라는 말은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되는데 신경이란 용어는 특수한 교파나 관련된 신앙적 진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참고로 고백이라는 용어를 쓴다,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신경은 전체 기독교회에 속하면서 기독교도라면 누구나 수용하고, 복속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골자를 명료하게, 보편타당하게 공인된 형태로 진술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신경이 탄생하게 된 이유는 영지주의등의 도전에 맞서 보편타당한 선언이 필요했고, 공적 행사에 적합한 기독교 신앙 요약문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한 예로 세례받기를 원하는 개종자들은 이단자에 맞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신경을 통해 선포함으로서 초대교회 안에 일치된 교리를 보호하려 하였다.
- 신경 안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 교회와 심판, 부활에 관하여 명시되어 우리 입으로 지금도 고백되고 있다.
영지주의 저술가들의 당혹케 하는 경전해석에 맞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경전의 올바른 해석방식에 관해 정립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초대교회의 연속성과 사도들의 시대에 가르침을 충실하게 선포할수 있는가? 였다.
이레내우스는 교회와 그 사역자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직능의 연속성을 전통이란 이름으로 강조하였다. 전통(건네받은것, 전달하는 행위)은 "경전의 전통적 해석",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 진술"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통이라는 것이 경전을 자기식으로 해석된다는 권위이 아니라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보호수단의 측면으로 간주되었다.
이로써 감독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소유한 공식적인 수탁자가 되었고, 이것은 곧 소수의 감독들이 사도에 버금가는 독보적 권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3.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247-420)
AD 247년 로마는 건국 1000년을 맞이했다. 이 당시 로마에는 역병이 로마 전역을 휩쓸었는데. 데키우스 황제는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신들을 진노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데키우스 황제는 250년 '데리우스 칙령'을 선언하였다. 이 칙령은 지방총독과 행정장관들에게 로마 신들과 호아제를 위한 희생제의 집행을 요구하고 실행한 사람에 게그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 누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공동황제가 다스리는 서방 로마까지 권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이에 서방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이 맞서기도 하였다.
갈레리우스는 그이 말년에 치명적인 병으로 죽기에 이르르자 기독교 박해때문에 병에 걸렸음을 후회하고 "누구든지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한" 종교집회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장로인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 하나님의 첫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 내에 모든 교회의 감독들을 초청하여 아리우스파의 이단 교설을 밝혔고,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교회의 두번째 공의회.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가 인간의 육체를 지녔지만 인간의 정신은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를 탄핵하고 니케아 신조를 당시 강조, 승인했다.
교회의 세번째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주의(예수가 두개의 분리된 인격, 즉 인간의 인격과 하나님의 신격을 가졌다는 사상)를 탄핵하고 비난했다.
4) 칼케돈 공의회 (AD. 451)
교회의 네번째 공의회. 단성론(그리스도가 한 가지 본성만을 가졌다고 주장. 예수의 신성이 인성을 완전히 흡수했다고 주장.)을 탄핵하고 정죄함. 칼케돈 공의회에 참석한 감독들은 그리스도께서 두개의 본성 (하나는 신의 본성,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소유한 하나의 인격이라고 고백함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사상은 제국을 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제후들은 저마다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일삼는 폭군되기도 하였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이를 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암흑(인간의 도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왕국(하나님의 도성)은 보존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자들에게 신앙공동체에 은둔하라는 소명을 주셨을지도 모른다.
- 참조 : 스콜라스티카(수녀원) , 베네딕트(수도원)
은총의 교리는 헬라어권 동방교회에서 중요한 성경적 논쟁이었다. (AD. 420) 로마에 체류한 브리타니아의 수도승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로마 교회의 도덕적 해이에 경악한 그는 지속적인 자기향상, 즉 구약율법과 그리스도의 모범 아래 자기향상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주의에 격렬히 반대했고 인간은 구원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필요한 자유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은총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인간외부의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주장했고, 펠라기우스는 구원의 근원은 인간내부의 개별인간의 자기향상이라고 주장했다. 정리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으로 인한 구원" , 펠라기우스는 "공로로 인한 구원" 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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