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부시대 (약 100-451)

 

 
제 1장. 교부시대 (약 100-451)

1.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형성.

1세기 전 로마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또 다른 분파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유대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교회를 유대교의 분파로 생각했기 때문에 AD 50년을 전후한 초기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을 용이하게 전파할수 있었다. 그런데 1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완전히 역적되었다. AD 100년 즈음, 교회는 30년에 걸친 협박과 노골적인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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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64. 불타는 로마.
이 화재로 모마시의 70%가 파괴되었고, 네로 황제는 크리스천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워 모질게 박해했다.

AD 70.  예루살렘 성전 파괴.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예루살렘 탈환을 명령,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성전을 무너뜨림

AD 155. 폴리캅의 순교.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이 로마 황제에게 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채로 불태워져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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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교회의 신앙변증 (90-250)

2세기 어간 중요한 현안은 비판자와 이단자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방어해야 했던 변증론이었다. 대표적 예는 서방에서는 이레내우스(130-200),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185-254)를 들수 있다.

이 당시 교회 외적인 핍박 뿐만 아니라 교회 내적인 싸움에서도 교회를 보호해야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영지주의의 위협이었다.

영지주의는 물질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무엇이든 다 사악하며 오직 영적인 것만이 순수하고, 영적인 지식만이 인간을 해방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1세기 후반에 발생한 화산폭발(79)과 제국전체의 만연한 전염병(80)으로 목숨을 잃게 되면서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온통 거부하는 영지주의에 더욱 마음을 빼앗겼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분파는 말시온 주의였다. 그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과 사랑이 충만한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욕망과 욕구를 부정하고, 구약의 하나님을 부정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교회 내에 경전에 대한 해석문제와 권위의 문제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내에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응하여 기독교인들은 1) 어떤 저작(책)에 순종해야 하는가? 2)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3)누가 이 가르침을 지킬것인가의 중요한 문제에 대답을 해야 했다.

1) 신약정경의 범위. (어떤 저작에 순종해야 하는가?)
정경이란 용어는 "규준","고정된 참고점"을 뜻하는 헬라어 카논에서 유래했다. 정경적이란 용어는 정경 안에 속할 것으로 수용된 경전문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정경구성은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정경구성에 사용된 기준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기본적인 대답으로는 '권위의 부여'의 원칙이 아니라 '권위의 인정'이라는 원칙이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정경성은 작품 자체의 내적 권위에 의거해야 하지 그 작품위의 자의적으로 부여된 외적 권위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정경을 창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 경전 내에 내재한 권위에 근거한 정경을 승인, 수용, 보존하는 작업이었다.

2) 범교회적 신경의 확립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신경(creed)이라는 말은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되는데 신경이란 용어는 특수한 교파나 관련된 신앙적 진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참고로 고백이라는 용어를 쓴다,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신경은 전체 기독교회에 속하면서 기독교도라면 누구나 수용하고, 복속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골자를 명료하게, 보편타당하게 공인된 형태로 진술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신경이 탄생하게 된 이유는 영지주의등의 도전에 맞서 보편타당한 선언이 필요했고, 공적 행사에 적합한 기독교 신앙 요약문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한 예로 세례받기를 원하는 개종자들은 이단자에 맞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신경을 통해 선포함으로서 초대교회 안에 일치된 교리를 보호하려 하였다.
- 신경 안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 교회와 심판, 부활에 관하여 명시되어 우리 입으로 지금도 고백되고 있다.


3) 전통의 역할(누가 가르침을 지킬 것인가?)
영지주의 저술가들의 당혹케 하는 경전해석에 맞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경전의 올바른 해석방식에 관해 정립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초대교회의 연속성과 사도들의 시대에 가르침을 충실하게 선포할수 있는가? 였다.
이레내우스는 교회와 그 사역자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직능의 연속성을 전통이란 이름으로 강조하였다. 전통(건네받은것, 전달하는 행위)은 "경전의 전통적 해석",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 진술"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통이라는 것이 경전을 자기식으로 해석된다는 권위이 아니라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보호수단의 측면으로 간주되었다.
이로써 감독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소유한 공식적인 수탁자가 되었고, 이것은 곧 소수의 감독들이 사도에 버금가는 독보적 권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3.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247-420)


AD 247년 로마는 건국 1000년을 맞이했다. 이 당시 로마에는 역병이 로마 전역을 휩쓸었는데. 데키우스 황제는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신들을 진노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데키우스 황제는 250년 '데리우스 칙령'을 선언하였다. 이 칙령은 지방총독과 행정장관들에게 로마 신들과 호아제를 위한 희생제의 집행을 요구하고 실행한 사람에 게그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한 것이었다.


-토나투스 주의 : 박해시절 신앙의 배교자들을 박해후 교회로 다시 받아줄수 없다고 주장. 그들은 신앙의 변절자라고 수용하지 않았다.

마지막 박해는 AD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였다. 그는 광활한 제국이 자신의 권력이 미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제국을 둘로 분할했다. 그는 제국을 동과 서로 분할한 뒤, 서방제국은 ===과 부황제 --- 맡기고, 동방제국은 자신과 부황제 갈레리우스가 맡아 통치하였다. 동방제국은 크리스천들이 상관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더 충성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교회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디오클레티아 누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공동황제가 다스리는 서방 로마까지 권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이에 서방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이 맞서기도 하였다.
갈레리우스는 그이 말년에 치명적인 병으로 죽기에 이르르자 기독교 박해때문에 병에 걸렸음을 후회하고 "누구든지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한" 종교집회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AD. 321년 세방제국은 그 통치권을 두고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가 싸우게 되었는데, 콘스탄티은 막센티우스와 일전을 벌이기 전날 기도를 하다가 하늘에 십자가 보이면서 승리할 것이라는 글자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징하는 XP 모양을 새기고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로인해 콘스탄틴 황제는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면서 기독교를 합법화시켰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이제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321년 황제는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했고, 기독교 상징이 로마주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이제 단지 합법적인 것을 넘어서 제국의 종교로 치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 참조 : 이듬해 콘스탄틴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그는 비잔티움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새로지었는데, 수도가 옮겨진 후 제국으 힘은 서방제국에서 동방제국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로마의 교회가 점차 강력해지자 서방제국의 로마와 동방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지도자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훗날 각각의 세력 중심지에서 유래한 서방, 동방교회의 분열을 야기하게 되었다.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제 신학은 교회모임이라는 은밀한 세계에서 나와 전 로마제국에 걸쳐 공적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점차 교리논쟁이 정치적, 신학적으로 중요안건이 되자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제국 안에 하나님의 교리회가 존재하길 바랬고 교리적 차이가 우선적으로 논의, 정립되기를 고대하며 공의회 제도를 만들었다.

1) 니케아 공의회 (AD. 325)
알렉산드리아 장로인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 하나님의 첫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 내에 모든 교회의 감독들을 초청하여 아리우스파의 이단 교설을  밝혔고,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AD. 381)
교회의 두번째 공의회.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가 인간의 육체를 지녔지만 인간의 정신은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를 탄핵하고 니케아 신조를 당시 강조, 승인했다.

3) 에베소 공의회 (AD. 431)
교회의 세번째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주의(예수가 두개의 분리된 인격, 즉 인간의 인격과 하나님의 신격을 가졌다는 사상)를 탄핵하고 비난했다.

4) 칼케돈 공의회 (AD. 451)
교회의 네번째 공의회. 단성론(그리스도가 한 가지 본성만을 가졌다고 주장. 예수의 신성이 인성을 완전히 흡수했다고 주장.)을 탄핵하고 정죄함. 칼케돈 공의회에 참석한 감독들은 그리스도께서 두개의 본성 (하나는 신의 본성,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소유한 하나의 인격이라고 고백함

 


4. 초기 교회의 분열과 로마의 몰락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사상은 제국을 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제후들은 저마다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일삼는 폭군되기도 하였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이를 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암흑(인간의 도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왕국(하나님의 도성)은 보존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자들에게 신앙공동체에 은둔하라는 소명을 주셨을지도 모른다.
- 참조 : 스콜라스티카(수녀원) , 베네딕트(수도원)


로마제국의 북쪽전선은 "야만인들"의 공격에 직면하자 AD. 404년 무너지고 말았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지역은 이제 프랑크족, 고트족, 반달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 자체는 두번의 침공을 받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AD.410년 고트 왕에 의한 것이고, 결정적이엇던것은 AD. 476년 오도아ㅔ르라는 또 다른 야만인이 서방제국 마지막 로마황제자리마저 찬탈했다. 이로써 서방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동방제국만 남게 되었다.



* 은총의 교리. ( 펠라기우스 vs 아우구스티누스 )
은총의 교리는 헬라어권 동방교회에서 중요한 성경적 논쟁이었다. (AD. 420) 로마에 체류한 브리타니아의 수도승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로마 교회의 도덕적 해이에 경악한 그는 지속적인 자기향상, 즉 구약율법과 그리스도의 모범 아래 자기향상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주의에 격렬히 반대했고 인간은 구원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필요한 자유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은총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인간외부의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주장했고, 펠라기우스는 구원의 근원은 인간내부의 개별인간의 자기향상이라고 주장했다. 정리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으로 인한 구원" , 펠라기우스는 "공로로 인한 구원" 을 주장했다.

가르타고 공의회 (AD. 418) 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과 죄에 관한 견해를 지지했으며 펠라기우스주의는 정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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