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1500-1750)

 기독교역사. 종교개혁과 그 이후(1500-1750)

서구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새 시대가 16세기여 열렸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개혁, 즉 서구 교회를 신앙체계, 도덕성 및 구조에 있어서 더 성경적 토대로 돌리려는 운동이 핵심이었다. 그 개혁으로 처음 유럽에서 한 무리의 개신교회가 형성되었다.

1. 종교개혁


종교개혁이란 용어는 마르틴 루터, 홀드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 같은 인문들을 중심으로 서구 지역에서 일어난 도덕적, 신학적 및 제도적 개혁에 관심을 두는 서구의 운동을 지칭하고자 역사가와 신학자가 사용하는 용어이다. 종교개혁의 운동은 교회교리의 개혁을 뛰어넘었고, 복잡하고 각양각생이였으며, 그 개혁의 명제가 나라마다 달라서 국가와 사회적 정황에 따라 강조점을 잡고 살펴봐야 한다.


*참고 종교개혁은 : 일반적으로 루터교, 개혁교, 재침례교, 카톨릭 종교개혁 4가지로 나뉘고, 통상적으로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주류를 이루는 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1) 루터교 개혁. 마르틴 루터
루터의 개혁은 처음에는 뷔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육을 개혁하는데 주로 관심을 둔 학구적 토론운동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그의 유명한 95개조의 반박문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항거하는 행동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회의에서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 로마서 강해, 칭의의 교리. 만인제사장설. 

2) 칼뱅주의 개혁, 츠빙글리 - 칼빈
루터교 개혁이 학구적 상황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비해, 개혁교회는 더 성경적 틀에 따라 교회의 도덕과 예배를 개혁하려는 일련의 시도에 그 기원을 둔다.
그 기원은 스위스의 주요도시 취리히에 기반을 둔 츠빙글리에서 시작되었다. 츠빙글리는 칭의교리같은  교리적 측면보다, 제도적-사회적-윤리적 인문주의 운동에서 나온 개혁과 여러모로 비슷하였다.
칼빈은 파리대학을 떠나 스위스로 도피하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였다. 도피길에 오리던 길에 들린 제네바에서 파렐이란 설교자에 의해 붙잡힌
이후 제네바의 개혁운동을 위해 힘쓰게 되었다.

* 17세 영국과 그 이후에 뉴잉글랜드의 종교적 정치적 견해- 근본적으로 중요한 청교도주의 - 는 개혁교회의 구체적 형태에 배경이 있다.

3) 급진적 개혁, 재세례파
재침례주의는 1520년대 츠빙글리의 개혁이 있었던 취리히 금방에서 시작외었다. 그것은 츠빙글리가 성경만으로 라는 원칙에 충실한다고는 하나 성경이 허용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여러 관행을(유아세례, 교회와 행정관청의 밀접한 관계, 기독교인의 전투참가)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
1524년 펠릭스와 스위스 형제들은 성경에 입각되지 않는 유아세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믿는자의 세례'를 다시 베풀면서 재세례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참고로 펠릭스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에 의해 순교를 당한 최초의 비카톨릭 신자였다.

4) 카톨릭의 종교개혁, 트렌트 공의회
1540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를 승인하였다. 예수회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가장 강력한 선교세력이 되었다. 예수회 성직자들이 보여준 개혁의 정신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전체가 갱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1538년 교황 바오르 3세가 프로테스탄트들의 개혁운동에 대응,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의 트렌트에 대표들이 모였고, 트렌트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로마 가톨릭을 변화시켰다. 면죄부와 성직 매매는 중단되었고, 교회의 전통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행위의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고 간주하였다. 또한 미사는 반드시 라틴어로 집전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각 나라의 토착어로 미사를 드리는 것을 허락한 것은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였다.) 이 트렌트 공의회는 향후 400년동안 로마 가톨릭을 의미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영국의 성공회.


헨리 8세는 스페인의 공주였던 캐서린을 왕후로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헨리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지 못했고, 헨리는 이미 궁녀 출신의 25세 매력적인 처녀 앤 볼린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레위기 20장 21절에 근거, 하나님께서 캐서린에게 아들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녀와의 결혼이 무효로 해달라고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의 조카가 캐서린이었기 때문에 클레멘트 7세는 무효요청을 철회시켰다. 이로 인헤 헨리와 크롬웰은 대신회의를 주도하여 영국교회가 로마 카톨릭으로 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신의 대리자로서 국왕의 통치하에 있는 독립적인 교회가 되었다고 선포했다. 이는 영국 국교회의 탄생을 낳았다.


1553년 헨리의 아들이 12살의 나이로 죽자, 헨리가 캐서린에게 낳은 딸 메리 튜더가 왕좌에 올랐다. 그녀는 영국을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함으로 프로테스탄스 신자를 처형함으로서 '피의 메리' 라는 별명을 얻을정도였다.
피의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의 두번째 부인 앤볼린의 딸이었다. 영국교회의 혼란에 대해 고심했던 그녀는 영국 교회를 카톨릭의 의례를 따르고, 개신교의 신학을 따르는 중간지점을 택하고, 영국의 국왕들이 받던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중도노선을 밟은 오늘의 성공회를 낳았다. 

1604년 성경에 없는 모든 관행을 교회에서 없애고 정화하길 원하는 사람. 청교도라 불리우는 이들이 영국의 왕 제임스 1세를 만났다. (1611년 킹 제임스 번전 성경의 탄생) 그러나 영국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새로운 성경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몇몇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로 부터 분리되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서쪽 신대륙(메사추세츠)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그들이 오늘날 미국인들이 필그림 파더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침례교도 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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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여파로 사회는 로마 교황 아래 하나로 결집된 기독교 사회가 더이상 아니었다. 16세기 말 유럽은 칼빈파, 루터파, 영국성공회, 가톨릭, 재세례파 등등 조각조간 분열된 세상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그들이 원했던 것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자신들의 양심을 따르는 신앙을 촉발시켰다.

* 미국의 대각성 운동(1738-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 유럽의 부흥운동 - 경건주의 (1722-
   (웨슬리. 조지 휘필드. 감리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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