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

#. 장치- 두 발신자와 응답주체

  창조는 충만한 존재가 사랑을 위해 자신을 쪼갬으로 일어났다. 하나님으로 꽉 차 있는 영원, 즉 ‘Todo’가 자신을 나눔으로써 무無, 즉 ‘나다nada’가 생겨났다. 하나님은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온 무를 붙잡고 새 창조를 위해 인내로 운행하셨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의 우주적 차원의 ‘나다’가 창세기 3장의 실존적 차원의 ‘나다’로 분리되어 가면서 발신과 응답주체가 달라져 가기 시작했다.
  창세기 1장의 발신과 응답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으나, 2장에서의 인간은 주체가 되려는 가능성을 지님으로 발신에 혼돈이 오기 시작했고, 3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주체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사단이라는 두 발신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타락한 세상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로 인한 인간의 타락이 곧 창조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타락이전에 이미 창조의 자유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선택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분리된 카오스는 이로인해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피조계의 자유를 계속 하나님의 자유와 연결하려는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유와 분리되어서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떨어져 나가려는 가능성이다.

  하나님은 경계를 사이에 둠으로써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연합하도록 자유의 속성을 허락했지만,사단은 이 경계의 선악과를 결핍을 조장하는 혼란의 카오스라고 부추기며, 욕망의 주체로 자유를 마음껏 사용하라고 속삭인다. 바로 여기에 사단의 전략이 있다. 끊임없이 발신의 근원지에 대해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경계의 원리가 무한한 사랑과 잠재성의 공간을 만들었듯,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선택하는 ‘자유의 속성’을 배우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자유의 지향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두 발신자 중 어디에 응답하느냐에 따라 온전한 코스모스의 상태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주체’가 될지, 결핍의 동기를 자극하며 욕망으로 귀속되는 ‘자기중심적 주체’ 될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선택하면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고, 사단이 부추기는 것을 선택하면 영원한 죽음과 연결된다. 로마서에서는 이를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으로 설명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은 하나님 형상의 다스림으로 영원으로부터 오는 일치가 일어나게 하지만, 죄와 사망의 법은 정과 욕을 재료삼아 끝없는 확장과 지배, 그리고 이탈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타락이 아니라 자유의 가능성 앞에 서 있는걸지도 모른다.

- 구조로 성서읽기, 장치 부분 윤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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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자유는 욕망의 주체로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없다.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욕망에 예속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오히려 자유는 반드시 나를 파송한 자, 나보다 큰 자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불안의 근원은 이 일치와 창조에 대한 갈망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텅 빔(카오스)이 그분께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이 Todo, 전부인 영원을 향한 큰 갈망, 즉 내가 떨어져 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있다. 실존의 세계(불일치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이 '자유의 가능성’ 앞에 마주 서 있다. 떨어져 나가는 세계(타락한 세상 속)를 일치의 세계(근원의 세계)로 연결하라는 부르심은 지금도 여전히 '자유의 가능성' 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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