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전도가 온다.
새로운 전도란 무엇일까? 며칠 전 신문기사에 '새로운 전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인 즉,일산에 있는 모 기독교대안학교에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을 매주 한번씩 1-3교시에 근처공원에 데리고 나가 어른들에게 전도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기사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향해 용기있게 복음을 전하는 아이들을 보며,입 한번 열어보지 못한 어른들이 부끄러워 해야지 않겠느냐고 질책하며 끝이 난다.
그런데 무엇인가 불편하지 않은가. 만약 그 전도가 정해진 메뉴얼에 따라 선포되고, 기계적으로 암기한 답변을 풀어놓는 방식이었다면, 아이들은 그때 '전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지 우려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전도는 '인격'을 담아내는 소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진정 부끄러워해야할 것은 아이들에게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충분히 전하지 못했음에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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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된 새로운 전도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전도가 온다> 라는 책을 집어들었다면, 금새 실망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위 기사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야기 속에서 '숨겨진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 한다. 기성세대가 추구했고, 다음세대가 겪어내야할 '전도'에 대해서 잠시 멈추고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다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도에 대한 성찰 및 문제제기는 이 책도 물론 하고 있지만, 다른 책들도 이미 충분히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도의 역사, 성서적 뿌리, 사상적 특징 등) 개인적으로 이 책에 차별성을 두고 싶은 점은 '새로운' 이전에 '온다'에 초점을 깊이 두고 다른 논의들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고 있다' 니 이건 또 무슨말인가? 전도는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지 않은가.
1. 온다 : 두 날개로 나는 기이한 새.
개인적으로 '온다' 라는 말의 어감을 무언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맞닥드려지는 경험이라고 한정해 보자면, 책에서는 1)시대적, 2)양육적, 3)개인적 으로 전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일을 겪고 있는지를 살피게 한다. '시대'에 대해서만 잠깐 엿보자면 두 날개(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로 나는 기이한 새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오늘날 문화는 기이한 새와도 같다. 왼쪽 날개는 여전히 모더니즘적이다. 명쾌하고, 합리적이며, 감정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지만 오른쪽 날개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이며 지적인 면뿐 아니라 인간 실존 전체를 모두 받아들이려 한다. ... 문제는 두 날개의 창조적 긴장 가운데 활동할 수 있도록 용인된 사회구조가 없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기 보다는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두 개의 불확실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성령의 날개에 의지해 움직인다고 믿으려 애쓴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호흡하는 공기를 피할 수 없듯이 우리가 사는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67-69)
사실 두 개의 문화적 날개는 그 자체가 불완전하다. 모더니즘은 '보편적 가르침' 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엄격한 해석을 요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유로운 흐름'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체험과 실존에서 발현되는 비이성적 영향력을 받아들인다. 모더니스트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분명하지 않는 사고를 한다고 비난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신비를 설명하는 순간 장엄함은 사라지듯, 냉정하게 지적인 접근만을 한다고 비난한다. (70)
교회는 모더니즘에 적응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의 가능성들을 붙잡채, 지난 전쟁의 전투를 계속 할 위험에 처해 있다. 만약 계속해서 모더니즘으로 기울어진 많은 교회들이 포스트모더니티의 비지성적 접근(체험적, 신비적, 관계적)으로 균형잡지 못한다면 호소력을 계속해서 약화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적 긴장'이다. 반드시 맞닥들이고, 헤쳐나가야할 현대사회 앞에서 교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는 이러한 긴장을 맞이함 속에서 겪어내야 한다. (87-89)
2. 새로운.
'새로운' 이라는 말을 명시하는 순간,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전도라는 것을 평가한다는 것이 거리낌이 생기고, 다소 모호한 부분도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보다 선교적 관점으로 복음의 본의에 대해 힘있게 호소한다.
신앙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전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오히려 평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시키고 환멸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125)
정직하지만, 깊이 생각해보자는 저자의 호소는 '태도'를 통해 더욱 힘을 얻는것 같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30년이상 지역 교회 및 교회의 선교와 관련된 문제를 갖고 씨름했던 전문가이다. 세 교구를 맡고 있는 교구 사제로, 후에는 교구 전도 자문역과 '복음화 10년' 이라는 세계성공회 주체로 시행된 프로젝트의 임원으로 활동했었다. 현장의 땀방울이 담겨져 있는 그의 약력은 단순히 현대의 전도에 대한 비판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복음의 메시지를 너무 가둬놓고, 교회의 의미를 한정킨나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내용의 장엄함을 축소시킨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있다. 그의 정직한 태도와 열정은 각종 '신앙실태조사'라는 객관적 지표수치의 분석을 통해, 성서적 뿌리를 근거에 둔 미래를 위한 제안들을 통해, 심지어는 전도 설교에 쓸 수 있는 3 개의 설교문을 책 속에 담아냄을 통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3. 전도가.
그렇다면, 오고있는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전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한 논의대로 이야기하자면 먼저 정직한 성찰일 것이다. 성서와 인간, 그리고 시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적용의 폭도 넓어지듯이, '전도'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폭으로 성찰하는 전도에 대한 이야기가 (18c-20c까지 이루어진, 전도방식의 의미와 성찰 / 넓은의미에서 연계되는 양육과 정착으로서의 다양한 공동체 형태 / 죄와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의 성서적 태도와 방식), 책 속에 소개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복음제시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기 위해 중요한 근거로 삼았던 세 헬라어 단어를 소개하는 것으로 뒷이야기를 갈음하려 한다.
1) 케리그마 : 복음의 내용
이 단어의 배경은 포고자(케릭스)와 그가 하는 일이다. 신문과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포고자를 통해 머릴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예를들자면 전쟁에서 이겼다던지, 왕가에서 누가 태어났다던지 하는 것들이었다. 포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전하는 소식의 내용이었고, 무엇보다 그는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정확해야 했다.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은 교육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케뤼그마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도는 불가피하게 교육 쪽으로 강하게 쏠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방식의 부정적 의미는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세심할 정도로 정확한 정의를 요구하고, 신앙을 표면화 시키고, 이성을 직관보다 지성을 감정보다 더 중요한 같이 강조할 수 있다. 또한, 한사람에 의해 전해지는 방식으로 인해 관계적이기 보다 계급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43-45)
2) 유앙겔리온 : 복음의 선포
유앙겔리온이란 좋은소식을 말한다. 헬라인들에게 그 말은 승리를 선포하는 것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였다. 그 소식을 가져온 사자에게는 월계수 화관을 씌워주었다. 이 말은 긴급한 어조를 지니고 있으며, 기운이 넘치는 사자는 존중을 받는 한편, 꾸물거리는 사자는 벌을 받아야 했다.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때때로 긴급성과 믿음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의 과업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를 짓고 어린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긴 과정이 아니라 대형 경기장에 모이는 '대중 전도'나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사용하여 퍼져나가는 선포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의 부정적 의미는 교회의 중요성을 복음의 한 요소로 축소시킬수 있고, 많은 이라는 숫자에 지난친 관심을 갖거나, 영접이라는 지난친 강조가 부르심이후의 삶에 대해 지난친 단순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46-48)
케뤼그마와 유앙겔리온 둘 다 동일한 단점이라면 모두 '말' 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가르친 말씀이건 전파된 말씀이건, 말들은 장황함의 숲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바울로가 전도를 말만이 아니라 또 성령의 능력이라는 요소를 지녔다는 점을 말씀을 통해 알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1:5 -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교육과 설교, 또는 그 중 하나에만 의지하는 전도라도 신약의 견지에서 볼 때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3) 미스테리온 : 복음의 신비
미스테리온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28번 사용된다. 그 말은 때로는 '비밀'이라고 잘못 변역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마치 하느님께서 뭔가 감춰놓았다가 사도들에게 누설해서 이제 더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미스테리온은 그저 갑자기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어떤 비밀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말한다. 신적 신비인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되었고, 계시되고 있으며, 계시될 것이다'. '신비'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광대한 하느님의 구원사적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신비는 전도에 그 이상이 있음을 시사한다. 모든 진정한 전도자는 자신의 가르침이나 설교가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 해도, 그들의 말 외에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안다...신비는 거기, 인간의 영혼 깊은 곳 안에 있다. (49-51)
물론 미스테리온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스테리온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면, 특이한 것에 지나치게 매혹당하거나, 역사적 사실과 전통적 관련성을 상실한채 너무 경험적이고 직관적인것에 의존한 것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도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검토이다. 케뤼그마로 복음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성육신과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반영을 기대하고, 유앙겔리온로 복음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처형에 초점을 맞추고, 미스테리온에 복음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알수 없는 곳에서 휘몰아쳐 와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기뻐한다면, 그들은 부분적인 복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들라헴에서의 출생(성부의 임재), 골고다에서의 죽음(성자의 구속), 그분의 성령을 보내주시 것등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삼위일체의 상승작용과 그리스도의 삶 전체에서만 완전하게 전도가 형성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어느 한 요소에만 집중하는 것은 부분적이며, 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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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간략히 책의 주요사항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다. 책의 장점만을 서술하고 단점을 생략하는 것은 책 소개의 정직한 소개가 아닐 것이다. 간단히 두가지만 단점으로 살펴보자면, 첫째는 저자가 영국 성공회 사제라는 점이다. 나라와 교파에의 특유성은 미묘하게나마 한국교회의 현실과는 다소 다르게 분석될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드는 줄어들면서 성직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반면, 한국의 신학생들은 오히려 늘어남으로 인해 교회안의 경쟁이 과열되는 듯하다. 하지만 '현대사회 속에서 겪고있는 교회의 쇠퇴' 는 여전히 참고할 만한 공유점이 많이 있음은 간과해선 안된다. (이러한 부분들은 양희송 대표가 한국적 입장에서 쓴 <다시 프로테스탄트>,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참고하면 한국적 상황을 잘 보안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재로, 대안으로 참고되는 수도원 공동체와 아테네식 복음제시 등은 한국적 정서에서 생소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생소함이 단점이 아니라 신선함이 될수도 있다.) 한국의 일부 신자들에게 수도원은 폐쇄공동체적인 상상을 일으킴으로 인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고, 아테네식 복음제시는 교회언어라기보다 세상언어적 전도방식의 고민이기에 조금 생소할 수도 있다. (물론 책은 둘 다의 오해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며 방향을 제시한다.)
최고의 전도지는 교회의 교회됨이다. <새로운 전도가 온다>는 통해 공감했던 것은 '폭넓은 의미에서의 전도' 이다. 전도가 일회적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예, 아니오' 라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가르침과 선포로 복음을 제시하기에는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는 멈추고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공식처럼 만들어진 복음전하고, 전도 전문가를 초빙하여 의존하기도 했지만, 성도간의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교제와 삶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열망과 진실함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개인일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서 일어나는 상호 관계와 연합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확하지만 경이로 가득 차 있는, 깊은 차원의 성령의 역사(미스테리온)에 대한 갈망이 있다. 특정한 전통에 국한시키기 보다 의식적인 것과 은사적인 것, 놀이적인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환대와 신비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될 필요가 있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과 말로 도전해서 자아와 비현실성의 화려한 길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진리와 하느님의 존재로 인도하는 것이다." 전도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 현대시대와 다음세대를 위해서, 전도와 교회의 참 의미를 고민하는 사역자들에게 추천 한다. 교회와 교회의 복음은 더 넓고지고, 깊어져야 한다. '새로운전도'는 이를 진실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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