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비콕스, 『세속도시』 요약 서평.

 

  거룩한 ‘신’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가? 우리는 흔히 ‘세속’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거의 예외 없이 성속의 구별로서 영원보다 일시적인 곳, 피안적인 차원보다는 현세적 실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세속’은 허망하고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속화’된 세계를 ‘종교적’으로 강화함으로서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미혹하는 세계관에서 자신을 자체 ‘격리’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이 그러한 세계관에 물들지 않도록 신앙적 ‘저항’운동을 결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비콕스는 이런 ‘상식적’ 견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세속화는 계속 밀어닥친다. 만일 우리가 현시대를 이해하고 또 그것과 의사소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시대의 끊임없는 ‘세속성’에 대항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 시대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운동들을 ‘종교적’으로 강화함으로서 우리의 종교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지는 싸움이기에 하비콕스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신’을 왜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겠는가?” 에 대한 응답, 그가 『세속도시』를 집필한 이유이다.

 

  따라서 세속화를 향한 하비콕스의 시선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매우 긍정적이며, 더 나아가 세속화의 시선을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시대에 대한 정치적, 신학적 응답으로 매우 적실하다고 역설한다. 미리 앞질러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세속화’란 종교적, 형이상학적 속박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과정이며, 나아가 인간의 관심을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즉 내세에서 현세로 그리고 과거나 미래로부터 시작이 아닌 ‘지금, 여기의 삶의 자리’로 향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성숙과정이자, 신의 선물로서 주어진 삶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명 “세속적 기독교” 혹은 “사신신학”의 흐름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주장했던 세속화된 응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그가 세속화가 피해야 할 불길한 ‘저주’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획기적 ‘기회’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한 ‘세속도시의 도래, 즉 우리가 마주하게 된 새로운 형태의 인간 공동체의 도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 세속인.

 

  세속 대도시에 사는 세속은 그 나름의 사회적 형태(shape)와 더불어 존재양식(style)을 가진다. 사회적 형태를 말하자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고도로 구별하여 간섭받지 않으려는 ‘익명성 보장’과 어느 한 곳에 고정되거나 정착하지 않는 ‘이동적 방랑’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율성이 극도로 보장된 사회적 형태에서 세속인의 존재양식은 더 이상 '신이 있다, 없다'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시대는 이제 '신'의 있음과 없음의 여부가 결코 심각한 문제나 주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찾는 현대인들에게는 ‘의미라는 신’은 있을지언정, ‘기독교의 신’을 위치지우는 것은 그닥 큰 의미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하비콕스가 제시하는 세속인의 존재양식은 그것이 성취하는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실용주의’와 초현실적인 실재의 소멸을 뜻하는 ‘불경성’이란 양식(style)이다. 실용주의는 간단하다. 과거에 달리 세속화된 도시인은 더 이상 신비한 것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정력과 지능의 적용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별로 관심을 않는다. 그에게 있어 세계는 신화적이지도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통합된 형이상학적 체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입맛따라 일련의 문제에 적실할 ‘계획’이 제시되면 그만인 세계이다. 불경성 또한 실용주의에 연장 이외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세속인을 불경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모독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비종교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세상을 어떤 다른 세계의 눈(신화적 세계관, 형이상학적 세계관)으로 보지 않고 그냥 그 자체의 눈으로 본다. 즉 세속인은 그가 찾는 어떤 의미도 이 세상 자체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낀다. 불경스러운 인간이 만약 종교를 믿는다면, 그저 ‘의미라는 종교’를 믿을 뿐이지, 다른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2. 세속화 : 인간화 작업을 위한 신의 역사적 개입.

 

  그렇다면 새로운 형태의 세속인에게 필요한 신학적 응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양식을 제거하고, 세속도시 시대에 적절한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다. 세속도시는 더 이상 초현실적인 신화적 언어도, 체계적 정합성을 지닌 형이상학 언어세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밀려오는 세속화란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은 그 파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타는 법은 배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속화’를 ‘세속주의’와 구별하며 세속화의 본의를 성서적 근거를 통해 논증한다. 세속주의를 극복하되 세속화는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간략히 구별해보자면 세속화의 근본 구성요소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해방’이라면, 세속주의는 폐쇄된 세계를 유지하려는 ‘고착’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역사화 과정 속에서 폐쇄되고, 고착된 이데올리기를 넘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세속화된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성서적 근거를 통해 논증하며 훌륭하게 보충한다. 즉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래는 언제나 세속화의 차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라는 성숙함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그 근거를 다음 서술에 나타나듯, 성서의 세계관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예로,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구체적 현실의 이야기속에서 드러난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이 태양과 달, 별들이 반신적인 존재들이며 신들이 지닌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히브리인들은 그것들의 종교적 지위를 완전히 거부한다. 즉 성숙한 세속인들은 자연을 숭배하지도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돌보고 이용하도록 했다. (자연의 탈주술화) 둘째로, 출애굽의 이야기는 정치의 비신성화의 역할로서 종교적으로 합법화된 독재군주로부터 벗어나 성숙한 세속인들로 하여금 역사와 사회변화의 실천자가 되도록 했다.(정치의 비신성화) 마지막 셋째로, 시내산의 언약에 나타난 우상숭배 금지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든 숭배해서 안된다는 것을 가리켰다. (가치의 속화-상대화) 이는 세속인들로 하여금 시대의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우상숭배라는 행위에 빠지지 않도록 해줬다. 즉 그것은 허무주의에 깊은 바다에 빠지지 않고서, 모든 문화 산물과 온갖 가치체계의 덧없음과 상대성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이질적인 정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들이 성숙함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책임감 있는 청지기로서 그 자격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바로 이것이 세속도시에서 신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신없는 시대에, 신과 함께 하는 방식은 이제 세속화된 세계 한복판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의 요청, 즉 새로운 역사의 현실을 일궈내길 요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식으로 제자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세속-도시는 ‘성숙’과 ‘책임’을 예시한다. 세속화란 한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을 제거함을 뜻하고, 도시화란 인간의 상호성이라는 패턴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실한 상징을 회복해야함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행위에 뒤따른 인간의 응답이 세속도시를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정당한 행위인 것이다.

 

3. 교회 : 성숙한 인간도시 건설, 변화의 선봉으로서 교회.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시는 일에 발 맞추어 그와 함께 세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나라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뛰어들고, 행동하는 사고여야 한다. 콕스는 이를 전통적인 선교의 3대 기능(케리그마-선포,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니아-교제)를 사회-정치적인 범주로 재해석하면서, 성서근거에 이어 또 한번 전통의 근거로서 훌륭하게 재구성해낸다. 즉 세속도시에서 교회는 세속 세계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권세자들도 인간을 지배할 힘과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선포’(케리그마)하고, 도시의 완전함과 건강함을 위해 도시의 균열을 치료하는데 ‘봉사’(디아코니아)하며, 상호작용하며(코이노니아) 눈에 보이는 성숙한 인간의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공공신학적 담론과 같이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다양한 반대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계율과 전통보다 현실인식이 선행하는 저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전통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변화’를 통해서 도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도시 세속인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가 보기에 과거로부터 회귀가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에 대한 적실하고, 실용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삼키고 있는 새로 출현한 기술적 현실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타협할 것인가에 대한 합당하고 적실한 지혜가 필요하지, 결코 사변적인 형이상학 신학논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속도시 시대에는 ‘정치’가 형이상학을 대신해 신학의 언어가 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세속적인 말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능동적이거나 생산적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떠나 인간의 생활과 사고에 통일성과 의미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공공장소이다. 오늘날의 교회 선교는 정치적으로 재구성된다. 바로 여기, 다양한 세속도시의 문제를 단순히 개교회적인 방식이 아닌 학문적, 과학적 방식등 그 외 전문분야들을 특정한 인간 문제에 집중시킴으로서 통합하는 것이다. 이는 바꿔말하자면, 기존의 교회와 신학이 했던 모든 방식을 비종교화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우리의 교회와 신학의 언어가 했던 모든 종교적 색채를 편견없는 중립적 의미의 세속적 삶의 모습으로 성육화하는 것이다. 세속화의 해방은 추상적인 ‘종교언어’에 물든 어떤 미성숙한 맹목성과 편견을 버리게 하고, 오히려 구체적 인간의 정의와 문화의 성숙한 실현을 위한 책임 앞에 우리를 마주세운다. 그것은 비록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진 않지만, 언제나 우리가 마주하는 세속 도시, 이웃에게 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통해 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즉, 신을 말하는 것이 평범한 것이 되어버린 사회를 우회하면서, 신의 이름을 통상적으로 읖조리는 판에 박힌 역할을 오히려 버림으로서 ‘신 이야기’를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가까이 있는 신으로 역설하는 전략을 택한다.

 

결론. 숨어계신 신과 세속적 인간.

 

신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까. 하비콕스는 말한다. 세속도시에 사는 인간을 신의 동반자, 즉 인간의 역사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임무를 지닌 협력자로 인정할 때 비로소 세속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 신은 세속적인 사건들 안에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점차적으로 드러내신다.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 시대에 더 이상 ‘신’이라는 낡은 명칭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비콕스의 주장에 따라 낡은 명칭들에게 어설프게 완고한 집착하거나 아니면 불안스레 새로운 명칭들을 만들어 종합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밀려오는 미래의 사건들에 두팔을 벌려 응답하는 세속적 충실함으로 신의 새로운 이름이 회복되길 고대하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길을 잃은 현대사회에 신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 세속도시는 그런 점에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의미를 지니며 여전히 읽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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