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 (존 H. 왈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절이다. 학생부시절, 매번 성경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사실 경외감보다는 막연함이었다.
첫 단어 '태초에'.. 태초가 언제란 말인가? 5억년전인가. 500억전 전인가. 무한대인가. 무한대면 시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두번째 단어 '하나님'도 막연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처럼 생기신 분인가? 무소부재하다는데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번째 단어 '천지' , 네번째단어 '창조하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느까지가 땅일까, 하늘이 우주라면, 우주가 끝없이 확장하니 하늘도 끝없이 확장하는걸까. 창조는 뭘까? 없던게 생기는 마법일까? 멈춘게 움직이는 신비인까?
학생부시절 이러한 의구심은 '호기심'이 아니라 '믿음없음'에 대한 잡념정도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창세기 1장 1절 때문에 겪는 막연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학교에 가면 진화론에 맞서 창조론을 변론해야 했다. 막연함을 가지고 변론을 했으니 말도 안되는 감정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야! 어쨋건 니 말은 지금 원숭이가 우리 조상님이라는 거 아니냐!!)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진화론에 굴복하는 것은 내 신앙이 굴복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아무튼 난 진화론은 싫어!'로 귀결되었다.
이 끝나지 않는 찝찝함은 대학교때도 끝없이 영향을 미쳤다.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지적설계이론, 신 다윈주의등등 나의 주변부를 빙빙도는 이론들이 여기저기 들려오고, 더 나아가 진화가 명백한 사실이니 이 세상에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가 불가피한 해결 과제가 되어 버렸다. (그냥 난 믿음으로 살테다!라는 외골수로 밀어부치기에는 세상이 녹록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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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읽게 된 존 왈튼의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라는 책이 신학교 시절, 내가 창조와 진화에 대한 논쟁을 멈추게 된 방법론적 접근을 대변해 주고 있어 한번 정리해 보았다. 한마디로 창세기사가 창조와 진화라는 논쟁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라는 것, 대표적으로 '컨코디즘' 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컨코디즘은 창세기 본문이 과학적 주장에 일치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의 모든 세부적인 면을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진화론적 추론으로 오랜지구론이 더 지지를 받았음에도 하루 24시간 7일동안 창조했다는 맥락으로 젊은지구론을 주장하거나, 홍수로 인한 지층, 성서의 기적사화등등 성경의 세세한 모든 문자적 단어들이 과학에 기초하여 대체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원래의 고대문화의 맥락에서 이탈시켜 현대 문화의 맥락에 끼워 맞춰 해석하려 하기때문에 그순간 그 텍스트가 말하려고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하면서 부정확한 번역을 낳을 수 있다. 책의 저자는 위의 수많은 제안들에 대해 개별적인 토의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정작 우리가 창세기에서 더 치열하고 정직하게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정말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이다. 즉 창조 이야기를 저자와 원 청중(original audiences)의 입장에서 읽도록 도와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게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 이야기를 원 문화의 맥락에서 읽게 해주기 위해 히브리 원어에 대한 심층적 연구와 고대 중근동 신화문헌(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관련 고대문헌)들을 폭넓게 인용하였다. 주의할 점은 신화분석을 통해 이스라엘이 다른 고대신화 문헌을 차용하고 복제했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화라는 것이 본질상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움직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문화의 기원이론, 즉 고대세계의 공통의 개념적 세계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근동이 공유하고 있는 중요한 세계관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서 원 청중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 공통의 세계관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독특하고 고유한 창조의 관점을 비교분석하여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방법론적 문제제기의 골자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헌을 해석할 수 없고, 문헌을 해석하지 않으면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고대창조신화들은 세계가 어떻게 있어왔고, 어떻게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문화를 보여주기에 문화를 번역하기 보다 오히려 먼저 문화 속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논지).
1. 창세기 1장의 배경은 고대 우주론이다.
그런의미에서 창세기 1장은 현대 용어로 우주론을 기술하거나 현대의 질문들을 검토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갱신하거나 수정하도록 어떤 계시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별들이 태양들이라는 것을, 지구가 공 모양이며, 우주를 떠다니는 것을 몰랐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이 증기가 아니라 물질로서 신의 거처를 떠받치며 물들을 막아두기에 충분하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또한, 고대 근동의 사고에서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가르는 이분법이 없었다. 신은 고대 세계에 충만했다. 어떤 일도 신과 관계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신들은 개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들이 드나드는 외부 세계가 있다는 것 자체를 전제하지 않았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세계의 다른 사람들을 따라 모든 일을 신의 행동으로 믿었다.
이런식으로 그들은 고대 세계의 누구와도 같은 방식으로 우주를 생각했고, 오늘날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대 우주 지리학에 개의치 않고 원하시는 바를 전달 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신 과학이론과 물질의 기원에 대한 우주 지리학의 세부사항을 계시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원 청중이 이해하는 용어로 계시하고자 한 의도를 완벽하게 전달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2. 고대 우주론은 기능 지향적이다.
창세기가 물질의 기원에 대한 창조가 아니라면, 무엇을 창조한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고대 세계에서 존재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했던 것은 우주의 부분들이 기능하는 방법이었지 그것들의 물질적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고대 세계 사람들은 물질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정연한 체계 속에서 기능을 가짐으로써 어떤 것이 존재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 보자면, 어떤 회사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때, 회사건물이나 웹사이트의 존재여부를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비즈니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능을 할때를 말하고, 어떤 대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파헤쳐진 땅에서 건설 장비들이 들어오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직원과 학생들이 교육목적과 커리큘럼 속에서 기능적 역할을 할때를 말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기능적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물질적인 것들이 이미 구비되어 있을 지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 실제적 창조행위는 어떤 것을 질서 정연한 체계에서 기능적인 역할을 하도록 임명하는 것이지 그것의 물질적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대 세계 사람들에게 질문은 '무엇을 인지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부여됬느냐'가 더 중요한 초점이었다. 그들은 존재를 물질적 차원보다 기능적차원으로 보았다. (그 배경자료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많은 수메르 신화와 바벨로니아 텍스트인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이집트의 창조문헌인 멤피스, 헬리오폴리스등을 통해 비교분석한다)
3. 창조하다(히브리어 -바라)는 기능들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더나아가 히브리 원어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기능적 차원의 근거를 뒷받침 해준다고 주장한다. 구약에는 창조하다(히브리어-바라) 동사가 대략 50번정도 나오는데 그 언어 사용자들의 쓰임을(관용법) 면밀히 살펴보면, 무로부터 물질을 창조했다는 물질적 활동보다는 기능적 활동이 시작됨으로 더 잘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자면, 창세기 1장은 2절, 땅이 혼돈하고(토후) 공허하다(보후)라고 묘사는 '물질의 부재'보다 '기능의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 창세기 1장의 혼돈(토후)은 아직 기능이 없는 우주적 물들, 아직 질서가 주어지지 않는 장소들을 의미한다. 이제 창조는 물질적 실체를 물질이 결여된 상태로 가져오는 활동이라기보다, 무기능적 상태에서 기능성의 상태로 확립(역할, 질서, 통치, 조직화)되는 과정으로 비춰진다.
4.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 수많은 의구심은 이제 보는 방식을 달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천지창조의 세밀한 내용들을 차원이 아니라 물질의 기원의 방식으로 보면 첫째날의 낮과 밤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해와 별과 달은 넷째날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첫째날의 빛, 낮, 밤은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맥락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창조가(셋째날) 태양의 창조(넷째날)보다 앞선것도 다른방식으로 읽혀져야 할것이다.) 다시말해, 일어난 일의 순서는 물질적 쟁점과 관계되지 않고, 기능적 쟁점과 관계된 것이다.
기능론적으로 첫째날에는 시간을 위한 토대를, 둘째날에는 기후를 위한 토대를, 셋째 날에는 먹을거리를 위한 토대를 창조하였고, 넷째날과 다섯째날에는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천구와 결합된 기능들을 성취하도록 직원들이(넷째날-해, 달, 별 / 다섯째날-새, 바다, 생물) 적절한 위치와 적절한 역할로 임명된다. 그리고 여섯째날에 사람은 나머지 피조물들에 대해 하나님을 대표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란 정체성은 주위의 모든 것과의 연관성을 구체화시켜준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를 회사에 대한 유추로 사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직원들은 그 경계에 따라 사무실에 배정되고, 그들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상사에 대해 듣고, 그들의 사내 위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는다. 그들의 근무일이 시간으로 결정되고, 그들이 생산적이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현장 감독들이 배치되고, 공장은 가동 준비 상태이다. 그러나 회사가 가동을 준비하기 전에 오너가 도착해서 집무실에 들어가려고 한다..
5. 신은 신전에서 안식한다.
마침내 일곱번째 날 신은 안식한다. 신이 안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문화에서 안식은 삶의 근심과 걱정, 할 일로부터 해방되는 안식을 생각할지 모르나, 고대 세계에서 안식은 난국이 해결되거나 안정이 확보되어 정상적인 일과가 확립된 것을 의미했다. 신에게 안식은 우주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책임없는 해방이라기보다는 장애없는 활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중단하다는 히브리어-샤밧(창2:2)은 의미론적으로 맡겨진 어떤 활동이 완성되다를 의미한다)
고대 근동의 텍스트에서 신전은 우주 창조의 결과로 창조행위의 권위를 상징했다. 그런의미에서 신전은 그 권위가 지속적으로 행사되는 장소를 의미했다. 신전은 기능적 창조의 중심이고, 통제가 시행되는 장소였다. 이것은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백악관을 자신의 거주지로 취하기 원할 때, 단순히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실에서 선잠을 잔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경영하는 일을 마침내 시작할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다시말해, 선거의 소란스러움과 불확실성은 끝나고 이제 중요한 사업에 착수 할 수 잇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를 성전으로 보는 성경의 다른 맥락들에 대한 이해를 안식과 임재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을 성전으로서 우주에 초점을 맞춘 창조기사로 본다면, 일곱번째날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자신의 거처를 취하시지 않고서는 우주 성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기사의 핵심진리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라는 것이다. (덧붙여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전의 우주적 상징성은 새물결 플러스에서 출판된 그레고리 비일의 <성전신학>을 참조해도 좋을듯 하다. 이 책은 에덴동산이 하나님이 이 땅에 두신 최초의 성소였고, 이스라엘 성전은 온 우주를 그 안에 반영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야말로 이땅에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성전임을 집요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요약하자면, 왈튼은 창세기 1장의 창조창조는 '물질의 기원'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우주의 기능'에 대한 기술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천지창조의 7일은 물질적 우주가 존재하는데 걸린 기간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기능성 성전으로서 우주 낙성식에 헌신된 기간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주석에 '태초에'는 특정시점이 아니라 시작기간을 가르킨다는 발견은 꽤 충격이었다! 성경에서는 주로 즉위 이전 왕의 미확인 통치기간을 가르키는데 사용되었다) 그것은 성전의 창조를 상징하는 성전 건축의 물질적 단계가 아니라 기능들의 낙성식을 말한다. 즉, 창세기 7일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은 우주의 기능에 대한 기록이며, 안식일은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즉위식이자 우주 성전의 낙성식을 보여주는 기사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주는 성전이고, 하나님은 성전의 왕으로 등극한다라는 해석을 위해 그 근거로 기록 당시의 고대 중근동 문화와 수사학적 문헌접근에 기초한다. 그리고 문헌적, 문화적 배경을 간과한채 증명의 수단으로 펼쳐지는 현대 과학적 접근방식은 텍스트의 오독을 불가피하게 한다는 것이 책 내용의 골자이다. 위 내용에 모두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물질의 기원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아닌 정직하고 건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면서도, 과학과 믿음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책이었다.
사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찝찝함은 양자택일의 문제를 강요함에서 온것 같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과학과 믿음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는 교육방식은 정직한 방법론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과학의 순수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있는 합법적 취약점을 검토하는 것이 과학을 더욱 발달하고 진보하게 하는 정직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뉴튼에서 아인슈타인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불확정성의 원리)
반대로 성경과 신학의 통합을 신경쓰는 사람에게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한채, 종교적 진리의 위신을 거는 것은 진지하고 성실한 신학적 접근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는 진지하고 성실한 과학자들에게 거부하도록 강요된 책이 아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비록 생물학적 진화를 선전할 이유를 주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생물학적 진화의 조사 결과들을 거부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경험과학의 최종 목적이 형이상학적 열린접근과 다양한 방법론이 아니라 오직 반 목적론적 무의미로 귀결되는 것을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성경적 사고와 맞서는 것은 과학적 기제가 아니라 성경적 가르침을 부정하는 배타적 물질주의다.
우리는 과학과 믿음을 충돌하는 이분법적 접근이 아니라, 보다 정직하고, 건강한 접근방식으로 신비의 세계를 탐구하도록 독려하는 접근 방법을 필요로한다. 신학과 과학의 분리주의적 진영논리는 이제 더이상 바람직한 공공교육의 현장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정리하자면, 창세기 1장은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여러 견해들을 명백히 논쟁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견해를 제공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텍스트의 범위를 넘어 말하도록 다른이들을 강요할 권리도 없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신학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더 필요한 자세는 텍스트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장 공손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가치와 의도에 맞게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도 과학과 신학의 논쟁에 대해 꼭 한마디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성경은 목격자가 무엇을 보았겠는가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해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 비록 그 고백이 증명은 될 수 없더라도 희망이 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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