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투르니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이미지와 등장인물
인간(personne) 이라는 단어는 배우들이 썻던 가면(sonare.. per)에서 파생한 말이다. 하지만 더 깊이 어원의 사용을 살펴보았을때, 구스타프 융이 사용한 '페르소나(persona)'는 배우들이 연극하는 '등장인물(personnage)'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우리는 실제인간(실제의 자아)과 등장인물(우리가 맡은 역할)을 직관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가 있다. 이 책은 이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왜곡되고 변형된 이미지와 등장인물이 자기자신에게도 영향을 주고, 그가 속한 환경을 통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면 그의 진정한 실체는 어떻게 찾아낼수 있을까? 파편된 이미지의 단면들을 수천장 겹쳐 놓는다고 해서 정확한 이미지가 통합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그를 '알아가는 단계'에서 '이해하는 단계' 로 넘어가면서 힌트를 얻는다. 정보는 지적인 것이지만 교감은 영적인 차원이다. 정보는 등장인물에 대해 말하고, 교감은 실제인간에 다가간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파악한 접근법은 연구이고 설명이며 해석이지 이해와 교감이라고 할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본능과 제약, 융의 무의식과 통합, 아들러 개성화 등등은 등장인물의 매커니즘을 설명)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시도이여야 한다. 이해와 교감은 우리가 어떤 이론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환자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환자가 털어놓는 이야기의 정확성에도 영햐을 받지 않는체 진실성으로 개인적 접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방법(지적 정보교환/ 영적 교감)이 서로 관계에 있더라도 이 둘을 통합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정신은 인간을 현상의 집합체로 파악하는 동시에 실제인간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현상에 집중하면 실제인간이 사라지고, 실제인간에 집중하면 현상이 흐릿해진다. 왜 이러한 어려움이 생길까... 외부적 장애물과 내부적 장애물을 통해 알아볼까 한다..
2. 외부적 장애물 : 실제인간이 사라진 세상
우리는 살면서 짜여진 각본과 같이 등장인물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와 평판을 은밀히 지켜내려는 요구로 인해 이러한 등장인물을 벗어던지는것이 쉽지가 않다. 이러한 치장은 필연적인 사회적 삶에 의해 외부적으로부터 강요되기도 했지만,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사회와 오랜 교육에 의해 등장인물이 실제 인간에 덧씌어지고, 이런교육방식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화된다.
문명사회에서 실제인간이 등장인물 뒤로 소멸돼 가는 현상이 오늘날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발달, 도시에 집중된 인구, 삶의 기계화 때문이다. 실제인간이 본래의 창조물이라면, 등장인물은 관례화되고 자동화된 틀이다. 획일화된 삶과 운집한 대규모 인구가 우리에게 규격화된 틀을 강요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많은 기업과 정부가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장에 심리학을 도입하지만, 그러한 시도조차 규격화된 정신공학적 검사나 통계지수의 형태로 파악되고 결국 다시 등장인물화 되어 수치화된 등급에 따라 분류되어 버린다. 과학은 이렇게 실제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활용된다.
3. 내부적 장애물 : 모순된 존재
사회적으로 당당한 정치인이 개인적으론 소심하고, 사회적으로 순종적인 회사원인 개인적으로는 거칠고-모험을 즐기고, 사회적으로 양보하는 학생이 개인적으로는 탐욕을 억누른다.
우리 인간은 내적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다. 어쩌면 이처럼 복잡한 내면을 완전히 알게 될때 비롯되는 현기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급적 단순한 등장인물로 우리 자신을 꾸미는 것이 아닐까..? 누구든지 정직하게 자신에 대해 직면하면, 무의식까지 파고들지않더라도 이런 모순은 금세 드러난다.
사회의 교육에 의해 모순되는 제약은 교육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육은 어린시절 내면에 깊숙이 스며들어 강력한 그림자로 자리잡는다. 자기암시와 반복되는 습관의 영향은 우리 내면에 모순된 성향들을 형성하고 강화한다. 따라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생적인 본성과, 그 본성의 표출을 억누르는 그림자가 내적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은 본성의 자연스럽고 충동적인 표출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대립하는 두 힘을 소멸시켜버린다. 결국 실제인간도 등장인물도 왜곡됀 모순으로 나타날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심리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며 해결한 문제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문제를 제기한게 사실이다. 이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모순되고 불안정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제 병든 사람은 물론이고 건강한 사람까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충동이 진정한 실제 인간의 모습일까? 의식적인 삶은 우리자신과 무관한 껍데기일까? 교육과 심리기제는 우리에게 덧씌워진 등장인물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삶이나 의식적인 삶을 과소평가해서 인간을 지나지체 단순화해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을 총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힘과 모순까지 모두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 인간은 의식적인 기능의 활동으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매커니즘으로만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 인간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의 뒤에 감춰져 있다.
불안정하고 복잡하며 신비롭고 이해할수 없는 실제 인간의 최종적 실체를 완벽하게 포착하기는 불가능한다. 등장인물과 실제인간이 완전한 일치도 완전한 불일치도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부끄러운 순간에 불현듯 나타나는 희미한 빛이나 그림자를 통해서만 실제 인간을 조금이나 인지할수 있는 힌트를 얻는다.
우리는 이런 인간 조건, 즉 실제인간과 등장인물간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받아들여야한다. 이런 긴장관계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며, 이런 긴장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4. 생명체의 특징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실제인물'은 내부에서 조용히 감추어진 채'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등장인물'로 과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겉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라고 섣불리 결론지으면 안된다. 저자는 생명체의 특징을 통해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명력' 이라는 개념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각 생명체에는 각 기관의 기능을 보여주는 설계도 같은 것이 있고, 그 배열은 해부로 밝혀진 모든 요소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형성된 공통된 결과이자, 그 요소들의 결합으로부터 형성되는 조화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 살아 있는 것들의 특징은 물리화학적 속성이 아니라, 그것은 어떤 명확한 개념, 설계, 계획에 따라 생명의 잉태로 목적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생명은 살아있는 현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현상의 방향을 결정할 뿐이다. 생명력은 어떤 현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현상들을 관리한다. 반면에 물리적 주체들은 현상들을 만들어내지만 그현상들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생명체의 고유한 특징은 그구조도 아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인 현상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 현상들을 조직적으로 관리된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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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점에서 생명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할수 있다. 과학자는 오케스트라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각 연주자들을 분석하지만, 연주자들의 연주가 빚어내는 조화로운 하모니의 비밀까지 알아내지는 못한다. 그 하모니는 작곡가가 미리 짜놓은 것이고, 연주의 목적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완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지가 개입된다. 하나는 자신의 계획을 악보로 표현해낸 작곡가의 의징이고, 다른 하나는 작곡가의 의지를 다소 충실하게 해석해내려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의지이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어떻게든 두 의지 에어느정도 충실하게 따르려는 눈에 보이는 실체다.
이 책의 구성도 다를바가 없다. 작곡가는 자연계를 구석구석까지 계획하고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님'이고, 지휘자는 보이지 않지만 그 계획을 충실하게 따르는 '실제인간'이며,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등장인물'이다.
그리고 하나님, 실제인간, 등장인물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변증한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실제인간이되고, 실제인간을 도외시 하지 않으면서도 현실감각을 갖는, 그리고 현실과 실제 너머에 삶의 근원에서 샘솟는 자유와 새로운 삶에 대해서 설명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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