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슬리 뉴비긴, 성경 한걸음

 

성서는 1)까마득한 창조이야기로 시작하여 2)한 백성과 한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거쳐 3)보이지 않는 미래의 이야기까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나와 상관있다고 하는가? 어떻게 지금 나의 이야기가 될수 있단말인가? 지금부터 레슬리 뉴비긴과 함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여행을 떠나보자.


*프롤로그.
관점 1. 창조세계를 보는 방식의 차이.
성경은 종교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 곧 창조세계 전체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했다. 즉 창조부터 종말까지 역사 전체와 그 속에 들어있는 인류의 이야기다.
그런의미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의 현실을 벗어나 역사를 초월하는 판타지로,, 역사 속의 자신의 맡은 배역과 책임은 없다는 등돌린 관중으로,, 읽혀질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한백성과 한 나사렛 예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사의 이면에는 '이 땅의 나라 백성의 삶과 방식'과 다른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영원히 이어질 '하나님나라 백성된 삶과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참여시키고, 약속하는 사랑의 편지였음을 가슴에 품고 읽어봐야할 무엇이다.


관점2. 창조세계를 보는 배경의 차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역사의 거대제국 창립에는 성경과 같이 자신들의 기반을 정립하기 위한 창조와 시작에 대한 담론들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등등 그들 나름대로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싸움과 전쟁과 유혈의 승리로서 이야기의 배경에는 '폭력'이라는 주제가 자리잡는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시작은 창조세계를 보는 관점
은 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창조세계와 시작은 폭력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분은 순전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고, 인류가 세상을 누리며 그분께 사랑을 돌려드는 '사랑의 관계와 안식' 이라는 배경이 전제로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삶은 끊임없이 경쟁하고 투쟁에서 승리하는 몸부림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 백성된 삶의 가치안에서 쉬며, 즐거워 하는 초대가 삶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중심주제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와 방식의 시각을 놓치지 않을때 창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비로서 깨달을수 있다. 


1. 인간의 선택
자. 그렇다면. 사랑의 관계로 읽혀져야 하는 성경에는 왜 타락이라는 주제로 시작하는가. 그것으로 인해 왜 신이 짚밟히고, 모욕을 당해야 하는가.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신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인간이 자신을 섬기도록 조정?! 할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 사랑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프로그래밍화된 로봇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으로 창조해 인격적인 교제를 하길 원하셨다. 그것이 신을 거절하고, 거부하고, 의심하는 위험성이 있다 하더라도 기계로 조정하는 순간 사랑의 원리는 성립될수 없다.


인간은 선악과에 선택했다. "무작정 하나님만 믿고 있을수 없다. 우리에겐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다. 사실은 전부를 알아내는게 우리의 직무가 아닐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우리가 스스로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때 하나님과 신뢰가 깨졋다. 신뢰가 깨짐으로 우리는 길을 잃었다. 우리는 벌거벗었고 연약하며, 다치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해 숨고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이웃은 적으로 변했고, 하나님이 주신 동산은 맞서 싸워야할 광야로 변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살인자와 피해자 되었고, 살인과 시기와 분쟁이 세상의 풍조가 되었기에 창조세계는 혼돈과 폭력의 악순환에 빠졌다. 하나님은 이렇게 멀어져 가는 사랑의 존재와 세계를 분노와 사랑으로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부르짖음으로 시작되는 창세기는 성경 전체에 메아리 친다.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도 자녀들을 찾고 계신다. 거절하고, 거부하고, 미련한 불신의 자녀들을 찾고 계신다.



2. 하나님의 선택
잃어버린 자녀를 향한 시작은 다시 노아로 부터 시작된다. 홍수로 휩쓸리고 한가정으로 시작된 메마른 땅에서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창조세계와 더불어 '은혜의 언약' 을 맺으신다. 이를 통해 땅을 멸하지 않고, 노아의 후손을 멸하지 않는 이야기를 약속하신다. (노아의 후손은 인간세상에서 히브리 민족으로부터 70개의 나라로 갈라지는데, 이들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며,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궁극의 수혜자들이자, 사랑의 자녀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바벨탑을 세워 또다시 신을 거부하고, 인내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을 통해 다시 새로 시작하신다. 노예와 같은 삶에서 건짐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여전히 거부한다.
광야의 삶에서 매일을 만나로 음식을 삼고, 반석에서 나는 기적의 샘물을 마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지만. 이집트로 돌아가 익숙한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 사랑으로, 신뢰함으로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됨 삶의 방식을 배워야만 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는 한 백성이 땅을 소유하고 자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방식(법)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율법서를 통해 가르쳐주고 있다. 


3. 사사, 왕, 예언자
땅과 자손을 통해 하나님의 방식을 드러내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왕되신 삶을 버리고 그들은 "우리는 왕을 원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되고 싶습니다" 라고 울부짖는다. 하나님은 또다시 인내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사람들(사울, 다윗, 솔로몬)을 세운다. 정치질서는 세워지지만 그것자체가 하나님을 저버린 깊은 타락의 원천임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과 멸망속에서 드러난다.


땅과 자손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이스라엘 민족들이 땅과 자손을 내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에게 국가에 임한 재앙은 하나님의 패배였지만, 예언자적 전통에 충실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택받은 민족이 된다는 것은 곧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온전한 순종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4. 귀환과 쇄신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망했다. 수도는 폐허가 되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으며, 성전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세상백성의 원리로 질문한다.


"너희 하나님나라는 이제 어디 있느냐?"


하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원리로 살아가는 시편의 저자는, 그 깊은 수치와 고난 속에서도 승리의 함성을 노래한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패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건은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언약, 약속에 충실하다는 표시였다. 이경험을 재정비함으로 다시한번 이스라엘이 거룩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포로됨, 종됨은 군사적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짐으로써, 온전한 순종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여호와의 뜻을 이루는데 있음을 알았다. 훗날 예수는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이 이사야의 예언본문에 비추어 해석하신다.


느혜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에스라를 통해 언약과 백성됨의 삶이 재정비 된다.


하지만 동시에 페르시아는 강대국인 그리스에 휩쓸리고, 그리스는 강대국 로마에 휩쓸린다. 이스라엘의 성소와 백성의 삶은 점점 강대국의 문화 방식으로 더렵혀지고 삶을 지배해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로마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에 놓여 절규한다.
"오 주여, 어느때까지 입니까...?"
바로 그 세상 속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신다.


5. 하나님 나라와 예수
이스라엘 민족은 더이상 자기 나라에 살지 않는다. 그들은 세계 전역에 노예로 종으로, 거민으로 흩어진다. 그들은 흩어진 세계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율법서와 예언서를 읽고, 시편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통치질서가 나타날 날만 고대하며 살아간다.


어떤이는 열심당으로 정치적 저항을 하고(마카베오), 어떤이는 집권하는 세력에 협조을 하면서(사두개인), 어떤이는 율법을 누구보다 준수하면서(바리새인), 어떤이는 세속을 떠나 구별된 삶을 살면서(재세례파) 저항하고.. 고대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수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선포한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그나라는 새로운 정권도 아니고, 새로운 프로그램도 아니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새로운 철학도아니다. 그나라는 예수 자신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왕권, 통치, 질서를 알려면 예수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분의 말씀에 온 백성들이 술렁인다. "그 나라는 무엇이고, 어디란 말인가?" 예수를 따르면서도 그들은 알수 없는 의문에 빠진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가르치셨어야 했다.


6. 희생제물
예수는 그의 사역가운데 병자를 고치고, 눈먼자를 고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일은 그분이 죄사함을 선포하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어져 있는 죄된 관계를 짊어지고, 값을 치루고, 해결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된 삶의 비밀임을 알려주고 싶으셨다.


하지만 백성들이 원하는 그들만의 나라의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나라를, 땅을, 자손을 확보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었다.


이러한 염원을 담은 예배당 성전에 들어가 그들을 내쫒으신다. 이 성전과 방식은 파괴될것이다. 대신 새로운 성전과 방식이 생겨날것이다. 이 성전과 방식은 헤롯성전처럼 거대한 돌들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로 지어진다.


그리고 결단하신다. 겟세마네 동산에 이것이 정말 아버지의 뜻인지를 되물으면서, 온전한 순종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결단하신다. 바로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시기로 결단하신다. 아담때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모욕하고, 짚밝고, 부정했던 그들이기에.. 결단하신다. 그들의 죄가 잃어버린 신뢰를 ,사랑을, 회복하지 못기에.. 결단하신다. 결국 예수는 인간으로 와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표하여.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 중 한 인간으로 아버지께 부르짖는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라는 고뇌에 찬 울부짖음은,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자녀의 울부짖음으로, 응답된다.


"다.. 이루었다.."



7. 새 생명, 새 공동체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시신을 둔 무덤은 사흘이 지나자 비어있었고, 예수는 부활의 현현으로 제자들 앞에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심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죽음을 당하는 것은 이해해도 부활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일이 아닌가. 평범한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적 법칙으로는 결코 설명될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유사한 일이 있다. 이 또한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의 법칙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사실인데, 바로 세상이 처음 생겨난 창조의 사실이다. 기독교 교회가 늘 단언해 왔듯이 첫 부활절(예수의 부활)은 일종의 새 창조다. 세상에 새 시대가 열린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목적에 따라 온 우주를 창조하셨듯이 재창조의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던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새로운 창조와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사건앞에 분투한다. 복음의 새 메시지를 옛 방식(율법)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하는가? 옛 방식(율법)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구속력이 있는것인가?
바울은 이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율법(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전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았다는 징표였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으니, 징표가 조건으로 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백성과 맺은 언약에 충실(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회심자들이 교회를 이루었고, 고린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주권 아래서 어떻게 살것인지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제사와 희생제물, 제사장직등을 구약에서 말해지는 모든 원리와 방식이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


8. 미래의 계시
성경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읽으려는 우리의 시도는 이제 결말부에 이르렀다. 한 백성(이스라엘)과 한 예수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이제 예수를 믿었던 남은자들이 사는 시대에 남겨졌다.


계시록에서 세상을 유혹하는 큰 권력으로 상징되는 '큰 음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싸움의 한쪽은 제국의 권력이고, 다른 한쪽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모든 군사력과 경제력과 이데올리기의 무기로 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나라의 미듬과 소망과 오래참는 고난과 희생을 무기로 해서 싸운다.


수많은 거짓과 변명과 혼란이 있겠지만, 마침내 드러난 세계에는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세계로 펼쳐짐을 예고한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이런뜻을 포함한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거짓이, 미혹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모든 실상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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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역사와 우리 이야기.
프롤로그에서 말했듯이 성경이 창조세계와 인류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두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첫번째는, 내 인생의 의미가 역사 속의 문명화 사업과 이를 통한 미래의 완전한 사회에 기여하는 측면에 있다면, 정작 나는 죽기때문에 그 완전한 미래에 동참할 수없는것이 아닌가? 왜 내가 희생되어야 하나.. 이러한 영성은 우리를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두번째는,  내 인생의 이야기를 위해 전체의 이야기와 의미를 희생함으로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것이다.. 이러한 영성은 우리를 타인과 성서의 이야기를 배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제 2의 아담으로, 한 백성의 대표자로,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떠한가? 희생한것인가, 희생당한것인가. 제 3의 길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예수의 삶은 세상적 관점으로 보면 실패로 끝났지만, 그분은 온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 새 창조이 첫 열매로 영광을 얻게 하셨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고대할 것이 생겼다. 부족하지만 내모든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 대부분이 그럴 가치가 없을지라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것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희망과 나 자신을 향한 희망을 여기서 하나로 만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된 삶의 비밀은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순종에 있고, 그 사랑과 순종을 이루시고, 회복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으로 만난다.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울부짖는 아파하심과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는 자녀의 울부짖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안에서 희망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희망을 믿고, 소망하며, 참고, 사랑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창조에서 부터 종말에 이르기 까지 경험한다.


이를 깨닫기 시작할때, 우리는 공공의 창조세계 속에서의 책임과 고뇌를 회피하지 않고(판타지x), 역사 속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해질수 있다.(관중x) 우리는 각자 인간 역사의 모든 수고와 고통에 동참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드린 것들을 결국 마지막 때에 그분의 나라에 속하게 됨을 확신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침없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삶에 자리가 어떠하든지 이 진리의 소식이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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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변에 믿지 않는 지인들에게 소개할 생각으로, 믿긴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에 대해 일독을 해보지 못한 지인들을 위해 장문을 글을 정리합니다.  쓰다가 제가 지친것도 있지만. 이러한 의도를 잘 설명할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댓글좀 달아주세요, 성경의 이야기에 대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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