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주섬에서 기울임으로, 대학원을 지원하며..
#. 마주섬에서 기울임으로, 대학원을 지원하며..
'생각의 집'이라는 프로에서 서강대 최진석 교수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지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격'의 차원에서 되물어 본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 진심으로 여러분께 묻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 자기가 더 자유로워 지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 본인이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 자기 행위를 결정하는데 더 수월해 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 자신이 더 행복해졌습니까? 혹은 이웃들과 더 잘 지내게 되었습니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 눈매가 더 깊어졌습니까?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이 질문에 "예"라고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지식과 경험이라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정말 지식과 경험의 축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까? "
1.
관찰과 통찰은 '지식'의 공간이 아니라 '인격'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최교수는 우리 사회의 취약점으로 '질문이 없다'는 점을 에둘러 꼬집는다. 대답할 지식이 많으면 대답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질문'은 할 수 없다. 그것은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과 사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고유한 물음을 던져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현실은 이론에 대한 신뢰, 가치관에 대한 결탁, 그리고 지식에 대한 축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기 바쁘다. 삶에 터전에서 터져나오는 물음을 충분히 씨름을 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이미 있는 이론에 기대어 즉각적으로 자신을 설명하려 든다. 이를 최교수는 '훈고적' 분위기라 말하며, 우리에게 되물어 질문한다. 혹시 내가 만든 삶의 결과로 내 삶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생각의 결과로 내 삶을 꾸려간 것은 아니었는지를 말이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는 단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결을 같이한다. 질문의 힘은 이론의 깊이나 지식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고유하게 터져나오는 '궁금증'이나 '호기심' 같은 인격적차원(원초적 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론이나 지식은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것이나 궁금증과 호기심은 자기에게만 있는 유일하고, 고유한 문제의식이다. 그런의미에서 관찰과 통찰은 새로운 지식을 일으키는 활동성이지만 그것 자체가 지적이라 말할 순 없다. 오히려 인격적인 차원에 가깝다. 차원의 층위에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의 문제다.
더 나아가 최교수는 지적으로 '게으르다'는 표현을 기존의 이론이나 지식을 '부지런히' 답습하는 사람을 향해 빗대어 비판한다. 치열한 사고과정이 생략된 성실이야 말로 성실한 게으름, 인격적 준비가 안된 지식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적으로 부지런 하다는 것 또는 질문을 던지는 다는 것은 한가지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터전 위에서 어떤 현상이 보여주는 의미를 계속 파악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삶 속에 터져나오는 물음의 시선을 쉽사리 놓치않는다. 그때야 비로서 훈고적 기풍에서 창의적 기풍으로(지적으로 게으른 상태를 극복하여 지적으로 부지런한 상태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기존의 이론이나 지식을 답습하는 '훈고적 기풍'을 넘어, 고유한 인격에서 터져나오는 '창의적 기풍'을 발현할 수 있을까? 최교수는 이를 독특하게도 '마주섬'에서 '기울임'으로 설명하는데, 기존의 이론이나 지식과 마주서는 '훈고'에서, 새로운 곳으로 자신을 기울이는 '창의'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이론과 지식에 맞서 있는 훈고적 기풍의 사람들은 논리성, 합리성, 정합성 등을 금과옥조처럼 중시하지만, 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 자기를 기울이는데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기울여야 이야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예로, 물리학 이론이 이론으로 보일 때 물리학은 논증차원에서 이야기 되지만, 물리학 이론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특별한 이야기로 들릴 때 비로소 창의적인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면으로 맞서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주로 '논증'을 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자신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속에 동질성을 포착하고, 논증을 익숙한 자신을 스스로 기울이게 만든다. 더나아가 기울여진 이야기는 고유하며,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란 은유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궁금증'과 '호기심'의 갈망에 터해 하나로 엮어보려 하는 것, 그것은 신이 인간에 숨겨준 인간을 가장 탁월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기울게 할 수 있는 힘은 결코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인격의 차원에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이다. 혹 찾더라도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 생각의 집, 당신은 누구인가? 발췌 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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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대학원을 지원을 미루면서, 또 용기내어 지원을 하면서 물었던 문제의식은 모든 높은 수준의 사유, 윤리적인 민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가지는 것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 자체였다면 아마 가까이로는 내 주변, 멀리로는 전세계 곳곳에 혀를 내두르는 탁월하고, 유능한 이들을 보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비교하는 일, 그것 그 자체가 대학원을 다니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대학원의 학업계획서나 면접에서 묻는 질문은 의외로 씸플하다. 복잡하고 고차원적이지 않다. "왜 지원했느냐,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 외에 어떤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가" 정도이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요구받는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문은 결코 단순하거나 저급할 수 없다. 세밀하고 다층적 물음을 끈덕지게 물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누구나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질문이지만, 답변은 결코 하나로 추려지지 않는다. 수없이 반복되는 질문과 질문의 머뭇거림은 지루하지만, 결코 쉽게 도려낼 수 없는 끈덕진 문제의식이다.
그래서일까.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탁월한 교수진과 양질의 교육과정 이전에 물어야 했던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질문의식이었다. 군장교로 있으면서, 제대이후에도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나, '신학생활'을 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대한 물음 때문이었다. 정직하게 수많은 이론과 지식을 답습하느라 정작 내안에 터져나오는 물음에 대해서 정돈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위에서 말하는 훈고적 기풍의 사람이요, 지적으로 성실하게 게으른 사람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지도목사님을 만난 이후로 맞서는 것 너머 기울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있다. 학교도 아닌 교회도 아닌 삶의 자리에서 내던져야 하는 우상은 무엇이고, 내어드려야하는 갈망은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고 있다. 익숙한 방식과의 결별이라는 점에서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것 투성이었지만 삶의 자리에서 힐끗 힐끗 엿보는 진정성에 기대어 겨우겨우 한발짝 한발짝 내딛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생각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막무가내의 부딪힘으로 되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떤측면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안정'이라는 욕구에 더 많이 기대어 걷고 있었던 여정이지만, 지도목사님은 그 미숙함 자체를 인정해 주시면서도, 동시에 결코 그것에 안주하도록 허용치시도 않으셨다. 끊임없이 익숙한 판단과 편견 너머에 역사하시는 놀라운 잠재성과 전체성의 차원에 대해 말하셨고, 나의 계획을 넘어 뚫고 들어오시는 그분의 약속과 은혜의 깊이와 넓이에 기대어 되돌아 보기를 권면하셨다.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부 풀어내자면 끝도 없지만, 정말 힘겨웠던 여정이었다. 늘 나는 불평쟁이였고, 스스로 구경꾼이 되기를 자처했으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기보다 손가락 자체를 시비하느라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른이라는 나이를 마음의 할례를 받는 기간으로 선포하면서 밖으로 향하던 물음을 안으로 돌릴 수 있었다. (애굽적 삶의 방식을 떨쳐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할례처럼, 신학함에 숨겨진 마음의 할례기간은 제법 많은 아집과 욕심, 그리고 주도권을 놓지 못하는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지금도 확인받고 있다.) 본래 내가 회복해야할 자아를 찾았던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세밀하게 찾아오시는 메아리에 삶을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상대(맞서)하려고만 했지 흡수하려고 하지 않았던 나의 삶은 이제 용기있는 집중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나 질문을 받지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물음 앞에 서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자문은 결코 지식에 기대어 있지 않다. 원초과 갈망의 자리에서 고유하게, 때가 차서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흘러나왔던 이야기이다. 그런의미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은 나를 창의적 기풍의 사람으로, 새로운 곳으로, 고유하고 특별한 이야기로 이끄시면서 성현철을 성현철로 존재하게 만들시고 계신지도 모른다.
한때 나는 "하나님이 너를 향한 선하신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을 믿니?" 라는 지도목사님의 질문에 자신있게 "아니요, 믿지 않고서야 제가 이렇게 철저하게 중장기 계획을 세울둘순 없었을 겁니다" 라고 답변을 했었다. 기능에서 인격으로, 마주섬에서 기울임으로, 논증의 자기방어에서 이야기의 소명의식으로. 이제는 그것이 모순이 아니라 역설임을 어렴풋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서 용기를 가지고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었다. "여여하게, 그러나 세밀하게" 고유한 질문과 질문속에 숨겨진 은혜의 손길은 나를 그렇게 오래 머물렀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경청과 순명의 순례길에 오르도록 했다.
ㅡ 201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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