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1
“이젠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이해받고자 애쓰고, 또 에너지를 쏟았다고 억울해하고 싶진 않아요. 관계에 더 이상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다고 확인받는 일을 계속하고 싶진 않거든요”
“여백을 열어두렴. 모든 것들을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구겨넣어 환원하고 있진 않니?”
“여백이라는 것이 뭐죠? 다가오고 있는 가능성 같은 건가요? 그런건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당장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당장 제 영이 죽었는데 어떻게 해요. 행복하길 바라신다면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행복을 보는 관점과 그 행복이 있어도 거부하는 그런 것과 연관이 되어 있을 거야. 뭔가 하나가 네 안에서 바뀌면 되는데 그건 네 안에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을 거야.”
“저는 목사님이 여백이라고 말하는 다가오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말해주기 전까진 말이죠"
“네 투사는 높은 편이야. 그래서 어디서든지 2프로 부족해, 항상 불만이야. 그것에 대한 기대와 투사를 조금은 바꿀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때론 침묵하면서 기도해 봐야 하는거야. 말로 다 풀 수 없는 게 많잖아”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를 선택할 때 되는 거야. 현철아,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거기에 죽음과 부활을 감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 길을 갈수 있는거야.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거라니깐. 내가 원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고 하나님이 끌고 가는 길에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어떤 에너지원이 있어야 돼. 그게 무슨 길이냐는 거야. 그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지지나 인정이나, 관계망 이런거라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거고, 그게 공부라면 그것을 극복해 나가라는 거야.”
ㅡ. 16년 1월 1일. 새벽 지도목사님과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