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영적해석학의 부재
ㅡ.영적해석학의 부재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영적 현상'을 세심하게 이해하고, 그에 대해 사고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심적 표상'을 형성해주는 '영성교육'이란 거의 전무하다 싶이 하다. 내가 하고 있는 종교철학과 영성연구소의 일이 훗날 자유로운 세미나 속에서 일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순히 문제에 대한 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적 화두를 가지고 그 과제를 해결하게끔 이끄는 토론을 유발하는데 중점을 두는 세미나가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1. 영적 현상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사유구조를 만들수 있는 가건물로서 '종교적 인간'을 이해하는 책들을 나누고. (예를들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성스러움의 의미, 성과 속, 마음의 혁신같은 책)
2. 사유훈련으로서는 '앎'과 '삶' 사이에 차이와 간극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그 정신사의 발전에 맞추어 나눈다면 (예를들어, 사고행위의 한계로서 '존재'를 보게 된다면 칸트의 <이성의 한계로서의 종교>, 실존행위 한계로서 '세계'를 보게 되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3. 사고행위의 '앎'과 실존행위의 '삶'의 단계를 거쳐 신앙행위의 '삶'의 자리가 지니는 하나님의 자리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 함의가 무엇인지 토론할 수 있다면, 단순히 자기도취와 우상숭배의 자리에 빠지지 않은 영적현상이나 하나님의 이름의 맞갖는 자리에 대한 신중함의 사유가 길어질 수 있지 않을까
4. 더 나아가 실제적인 보완으로서 현존하는 영적 경험의 선배들이나 고수들이 따라오는 이들과 함께 참여하여 영적여정중에 갖을 오해의 여지를 없애고, 너무 어려워서 풀기 힘든 문제를 제외(식별)시키거나, 지도하는데 중점을 둔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영성교육을 받는 이들의 필요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무엇을 잘못했으며 어떻게 고쳐나아가야 하는지 즉각적으로 확인할 기회가 제공되지 못한 다는 점에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영성'이라는 주제 자체가 신비의 영역에 있으니 지나친 일반화는 환원을 낳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삶의 자리에서 피안과 신비로 내몰린 '영성'의 자리는 해악중에 해악이란 생각이 든다. 수행적 수련의 내면적 훈련 만큼 사유의 근육도 길려질 수 있다면, 좀더 균형있는 영성교육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늦은밤 종교철학과 영성을 이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서 끄적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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