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에르케고어. 공포와 전율
언어가 존재를 담아내지 못할 때 우리는 종종 침묵을 하곤 한다. 『공포와 전율』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러한 침묵,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며 행했던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려한다. ‘침묵’의 본질을 ‘믿음’에 의한 실존적 곤혹이라 일컫으며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파헤쳐 보려는 무모한 시도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신앙의 비밀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자신의 염원의 전부인 이삭에게도 그것은 이해될 수 있게끔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선 단독자의 절대적 의무였고, 절대적인 의무를 짊어진 자는 ‘외로운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고뇌와 불안을 동반한다.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사흘하고도 나흘째 되는 날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무엇이 그를 언제든지 후회하고 발길을 돌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아가게 했을까. 더 나아가 이삭을 재물로 바치기 직전까지 칼을 움켜쥔 채 있는 힘껏 내리치게 했을까.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 말하겠지만, 세상은 그것을 ‘살인미수’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 하나님의 명령은 이중적인 긴장 속에 놓여있다. ‘무한한 것’들을 붙들기 위해 ‘유한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유한한 것’들을 버릴 수 없음으로 인해 ‘무한한 것’을 붙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부조리한 ‘역설’이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만약 하나님이 이삭을 요구하시면 언제든지 이삭을 기꺼이 바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으실 것이라 믿었다. 이중적 믿음과 결단이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일체의 것을 단념함으로써, 일체의 것을 획득했다. 그것은 실존적인 고뇌와 존재론적 불안에서 벗어난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실존적 고뇌와 불안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획득된 ‘역설’이 점이라는 점에서 가히 주목할만 하다. 체념의 무한한 운동으로 인해 획득된 신앙의 경지,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진정한 ‘믿음의 기사’의 모습이라고 감탄했다.
왜 이러한 모습이 위대한가?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아니 오히려 어리석거나 당황스러움에 가까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운명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이는 심히 위험한 행동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에르케고르는 <문제>라는 장에서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룬다. 그는 윤리적인 것과 구별된 ‘믿음의 세계’에 대해 다루며, 철학에서 논하는 방식에 대한 거리낌을 거침없이 되내인다. 나는 이지점에서 왜 그가 실존주의의 시초가 되었는지에 대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잘 아는 바 헤겔의 체계에 대한 반박일 것인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나에게 한 개체가 보편자의 유혹에 맞서 행한 무한한 정열을 보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역시 여전히 불확실한 것들에게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 말은 얼핏보면 간단하지만, 자신의 일체의 것 즉,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갈망하는 것이 담보로 걸려있을 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영원한 것을 붙들기 위해 ‘시간적인 것’을 체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체념과 믿음은 결코 사유의 방식이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것은 반복되는 ‘성찰’이 아니라 정열적인 ‘집중’, 신앙의 비약이다. 그의 주장에 따라 살펴보자면, 이러한 신앙의 비약은 보편적인 세계로부터 환대받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그러한 행동은 헛된 존재가 되는 길이라고, 그러한 망상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세계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설득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기사가 되고자 하는 이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련은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고난이다. 에누리가 없는 것이다.
비평이 아니라 감상이라면, 나는 실존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논리적이여서가 아니라 나의 논리가 이끄는 길이 나를 더이상 영원한 것들의 세계로 인도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단독자’라는 실존을 위해 이야기 한 것처럼 심미적 영웅과 비극적 영웅과 구별된 신앙의 기사의 모습은 만족의 범위를 결코 시간적인 것에서 찾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영웅은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자신을 체념하지만, 믿음의 기사는 보편적인 것을 오히려 단념한다. 믿음은 보편적인 체계 위에서 정초 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히려 그러한 회귀가 영원의 입장에서는 시련이고, 되려 유혹이 될 것이다. 끝나는 믿음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유혹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편함을 감출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우리가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익숙하지 않는 것은 낯선것이고, 낯선것은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케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의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안에 신앙이 가능한 것 역시 우리 안에 이미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라면, 동시에 우리가 안에 불신이 가득한 것 역시 우리 안에 이미 익숙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존재론적 불안은 두 가지 속성에 대한 종합 중 어느 것 하나에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의 논지에 따라 삶을 성찰하고 더 나아가 결단해야 한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겪어내야할 존재론적 불안을 인정하며, 어떻게 하여야 변화 속에서 무한한 것들의 질적인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다시 산다는 것은 시간을 단순히 ‘정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과 영원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맞아들임’으로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만일 타자라는 시간이 반복되는데 ‘사는 게 아니야’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차이를 수용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일상 속에 살고있다면, 우리는 타자를(일반적 타자를 비롯한 전적타자인 신의 속성까지도) 어떻게 만나왔는지, 혹 하나도 수용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멈추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신 앞에 서있는 단독자의 대면을 요청하고 있다면, 쟁기를 쥐고 돌아보지 않는 무한한 체념과 부조리함의 힘을 빌려 신앙의 비약을 일으켜야하는건 아닐까. 그것이 내가 타자의 철학을 공부하기 앞서『공포와 전율』의 논지 속에 찾아낸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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