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래리크랩,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다.
- 하나님 발견인가, 자아 발견인가.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보다 자신을 발견하는 쪽으로 관심의 축을 옮겼다. 자신을 애지중지 하는 것이 지고의 선이되었고, 자기혐오는 천하의 몹쓸 죄가 되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가치 있고 사랑받을만한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일이 교회의 중점 사역이 된것이다.
자기부인과 희생적인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내면의 유아성을 인정하고, 아픈 기억을 치유하고, 중독을 극복하고,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자아상을 개선하고, 자기보존을 위해 한계를 설정하는 법을 배우는데 급급하다. 자기혐오 대신 자기애를, 수치심 대신 자기용납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굳게 잡고 씨름하기 보다는, 문제가 주는 고통을 제거하는데만 몰두한채 하나님 자체를 찾기보다는, 자신을 괜찮은 자아로 느끼는 것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것 조차 자신이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위한 것이라는 전제을 기반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목적을 주목해보면,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써 그분을 있는 그대로 누리기 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해 내가 중요시 하는 성숙한 나와 이해할 만한 세상을 얻으려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써먹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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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하나님 발견하기, 그것이 핵심이다.
1. 본능적 갈망
이 세상사는 시민들은 보통 두가지 목표를 가지고 산다. 첫째는, 더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 둘째는, 주변 사람들과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베푸는 모든 박애주의와 선행과 희생의 배후에는 그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는 자기본위의 동기가 숨어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이들의 도덕적 가치는 자기중심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곤 하기때문이다.
철저히 자기본위의 격렬한 갈망을 추구하는 문화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보다 자아실현이 지고의 가치가 될때 신앙생활은 어떻게 변질되는가. 교회의 사랑과 섬김, 자비하심과 용서는 자기중심적 갈망을 합리화하는 탐닉가와 순응자의 신앙인을 낳게된다.
-탐닉가들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의 필요를 채워 주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한테 해준 것만큼만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죽게 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이루 말할수 없이 가치있는 존재임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만큼 나도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게 마땅해, 낮은 자존감이야말로 가장 흉악한 죄야!"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독교화된 자기몰입의 도구로 정당화시킨다.
-순응자들은 벅찬세상에서 자기를 보호하며 사는 방법은 교리와 규칙의 준수라는 점을 강조한다. 진리의 율법준수에 헌신한다는 교만때문에, 철저한 율법준수에 의거하여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이 된다.
"내가 누군지보다, 어린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것보다 말씀의 규칙을 따르는 게 훨씬더 중요하다. 순종하다 보면 필요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다 치유될것이다. 진리는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것이기에 내감정과 의심은 중요하지 않다. 옳은 일을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만사가 다 잘풀린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영혼을 짓누르면서까지 자기보호를 하기 위한 도구로 정당화 시킨다.
탐닉가와 순응자 둘다, 하나님 중심이라고 소리높여 주장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소리칠수록 자기중심적인 타락적 기반을 스스로 증명할뿐이다.
2. 초월적 갈망
하나님을 향한 참된 갈망은 의지적인 노력으로 생기지 않는다. 주님을 향한 참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다. 따라서 하나님을 발견하려 할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신과 인생에 관한 불편한 현실들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각은 불치의 고통속에 있는 우리를 철저히 무력하게 만들고,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제 2부. 하나님 발견의 걸림돌들
왜 우리는 고통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보다는 고통을 해결(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할까? 하나님이 자신이 주장대로 그렇게 선한 분이시라면, 그리고 영혼의 풍성한 기쁨은 하나님을 아는 정도에 달려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발견해야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해야하는데.. 왜 현실은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타락한 기반' 이 우리안에 굳건히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하. 나는 하나님을 의심한다.
하와는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했고, 아담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와의 범죄를 덮고도 남을 만큼 춘분히 선한지를 의심했다. 아담 이후로 우리는 치명적인 의심병을 안고 태어난다. 바울은 이병을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이라고 불렀다. 이 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성향. 또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만큼 충분히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성향을 말한다.
하나님을 의심하자! 라는 타락한 기반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도전하기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온다. 인생의 모순속에서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배신감이나 화가 나서 쏟아내는 규탄에 가깝다. (내가 강간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계시는가? 우리 가족이 자동차 사고로 죽음를 당할때 하나님은 어디계시는가?)
내 영혼속에서 꿈틀거리는 이 에너지는 하나님께 도전하고 싶어한다. 승산은 없어보이지만, 결국 내가 지겠지만 그래도 두어 번 펀치를 날릴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미친짓으로 보일때 우리는 자기신뢰가 전적으로 더 안전해보인다. 그것이 더 안전해 보일지는 몰라도, 실상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족하게 여기고, 그 부족분을 스스로 메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자아를 신뢰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1층. 나는 네가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대로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생길때, 우리는 내가 바라는대로 나를 도와줄수 있는 다른사람를 찾는다. 상대방에게 공손한 태도와 친절로 접근하지만 실상 하고 싶은 말은 "나를 쉬게 해줘" "내가 네게 상처를 줄지라도 너느 나를 용납해줘" "내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건 없건 나를 존중해줘" "내가 어떤식으로 인정해줘야 하는이 알아서 파악해서 인정해줘"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나의 필요를 채우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자기상처와 갈망에 집착한채, 내가 1순위이고 나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니 네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서슴없이 주장한다. 핵심은 자기자신이다.
내방식대로 일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으로는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다른사람에게 가서 숙력된 기술을 동원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다른 사람을 조종해서 나의 안전감을 확보받으려한다.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것을 상대에게 요구하는 이러한 행동은 병적이기보다는 사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다.
2층.나는 너를 미워한다.
내가 필요한 것을 상대방이 제공해 주지 않을때, 내가 원하는 목표가 달성되지 않을때 우리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나님을 의심하다 보니 화난상태로 남들에 게 도움을 구하게 되고, 도움을 구했지만 도와주지 않는 그들을 이제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억누르거나 억지 친절로 감출수는 있을지 몰라도 속은 여전히 추악한 미움으로 가득하다.
상대에 대한 실망과 미움의 문제를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히 엎드려 그분의 긍휼과 위로로 회복하지 않으면, 다음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3층.나는 내가 싫다.
관계가 힘들어지고 평소에 의지했던 사람이 끝내 나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할때, 처음에는 그 사람을 미워하다가 결국은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좌절감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이다. 허기진 마음을 완전히 채워줄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기혐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틀려먹은 사람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를 사랑하는 oo가 나를 이렇게 함부러 대할리 없어. 내가 뭐가 잘못되었지는 파악하고 그것을 제대로 고쳐낸다면 oo 가 나를 사랑할꺼야!" 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동시에 세상에 실망하면서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초라한 자아상이 끝끝내 필요했다. 잘못된 자아상에서 겪는 충격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더욱 압박한다. 왜냐하면 내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면에 있는 자신의 문제 때문이기에, 열심히 노력해서 나쁜 자아상을 극복해내야한다고 스스로를 부축인다.
잘해보려는 압박간 저변은 근본적 문제는 사실 자기혐오가 아니다. 상대방도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 실망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실망감을 해결하려고 작정한 자기중심성이다.
자신의 자아중심성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납하셨다는 기쁨과 그분을 더욱 닮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지 못한채, 관계속에 상처를 입고 자신을 미워하면서 더 나은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면, 다음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4층.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관계속에서 상처입고, 자기혐오로 상처입은 사람은 실제적인 도움을 원한다. 그들은 상황을 바꾸거나 기분을 북돋워 줄 명쾌한 행동 지침을 바란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것은 이것이다. 이런 태도에는 상황을 개선하려면 반드시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그 일을 할수 있다는 좀 더 미묘한 전제가 깔려있다. 내 힘으로 얼마든지 만족스러운 삶을 뿌듯한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잘 꾸려 나갈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낼꺼야. 난 해낼 능력이 있어, 난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그럼 모든 것이 다 잘될거야!" 라는 교만을 낳는다.
살아남기로 작정하면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안전할꺼야라는 수많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법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한 타락의 구조는 견고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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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하나님을 발견하는 여정..
하나님은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나에게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나를 용납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반역을 아시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 이땅에서 나의 도성을 세우려는 결심을 아신다. 선을 행하려는 나의 미약한 열망이 악을 행하려는 열망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도 아신다. 그래서
나를 용납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친구삼고 싶어하신다!
나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깊어질 때 우리는 희망이 용솟음친다. 동굴은 아직 어둡지만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나락에 떨어질수록, 자신에게 실망할수록 감정에 함몰되어가기 보다는 선하신 그분 곁으로 더욱 다가가 안식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어떻게 하면 타락한 구조에서 거룩한 구조로 옮겨 갈수 있는가. 자기내면을 정직하게 직시하게 될 때, 타락한 구조는 ‘붕괴’되고, 외부의 그 무엇이 우리를 ‘매료’시켜 하나님께로 이끈다. 이 ‘붕괴’와 ‘매료’야 말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성령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도록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1. 선한 열망을 키워라
악한 열망이 강해 보이는 것은, 그만큼 선한 열망이 약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악한 열망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선한 열망이 너무 적어서 문제인지도 모른다. 섹스중독, 일중독, 어린 시절의 학대 등의 문제의 핵심은 악한 갈망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선한 갈망이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이다.
중독의 문제는 그것을 약화시키거나 저항력을 기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동성애 충동을 줄이려고 아무리 뿌리를 파헤친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된다. 공동체의 힘을 빌려 중독을 해결하려 할때는 또 다른 중독, 공동체라는 중독에 빠진다.
악한 욕망에 굴복하기보다 저항하고 싶어 하는 내면의 갈망을 분출해야 한다. 선한 갈망을 강화하는 좀 더 폭넓고 설득력 있는 목적에 사로잡혀야 한다. 거룩이 죄보다 좋아 보일 때, 자아 발견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해질 때, 그리스도와의 친밀감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가 아깝지 않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순종은 조작적이지 않고 진실할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책임있고 지혜롭게 풀어가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의 최우선 목적은 하나님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로 갈등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가 아니라 ,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열망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 이다. 이렇게 질문하고 순종할때야 비로서, 자신이 세운 생존 전략에 대한 확신이 무너질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어려움이 지속될 때, 문제를 극복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에게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2. 충분히 붕괴하고, 새로운 매혹에 이끌려라.
하나님은 타락한 구조를 이용해 우리를 가까이 이끄신다. 먼저 그 구조에서 나오는 두려움과 고통을 우리가 고스란히 느끼도록 내버려두신다. 그런 다면, 우리를 매혹하사 우리의 고귀한 갈망을 채워 줄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서만 만족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 붕괴와 매혹 전에 먼저 우리 더러움을 깨끗이 문질러 씻고 나오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반대다. 더러운 문제를 솔직히 직시하고, 영혼의 깊은 고통을 인정하자. 그 고통을 피하려고 온갖 전략을 강구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했음을 고백하자. 그럴 때 위를 지배하던 추한 열망이 모습이 드러내고, 더욱 깊은 갈구가 용솟음쳐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것이다. 그런 노출과 분출 과정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그 고통의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생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3. 공동체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로 나아가려면,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타락한 구조 속에서 나름대로 만족했던 삶을 붕괴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다시말해, 서로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우되, 우리가 얼마나 조작적이고 방어적이며 자기본위적인지를 드러냄으로써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솔직한 대화를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를 매혹해 하시는 성령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있어, 자신만의 독특함을 누리며, 무슨일이 생기든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안식하도록 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
이야기를 할 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의심하는 한 영혼이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셔서 남에게 베풀고, 존재하고, 예배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절실히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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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현재 이야기(사람들에게 접근하기)를 할 때, 하나님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우리의 단호한 의지와 실망스러운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드러날 때, 그런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고 싶어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의미있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를 열어두고 싶은 갈망에 매혹된다.
2. 우리가 속이야기(고통에 대한 해결책)를 할 때, 하나님이 안 되면 사람들이라도 우리를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도와주지 않는 그들을 미워했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깊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완고함을 깨닫고 그것을 붕괴하신다.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꾸밈이나 방어의식 없이 살고 싶은 갈망에 매혹된다.
3. 우리가 가장 깊은 속이야기(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할 때, 즉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두려움과 분노에 떨었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깨닫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싶어하는지,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사악한지를 깨닫는다.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끊임없이 신뢰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나를 용납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실패하고 상처 준 현재의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마음이 열려 자기를 내어주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실망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속이야기를 하는 고통 속이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보좌 앞에 존재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강한 팔에 안겨 쉬고 싶은 가장 속 깊은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예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가.
이 믿음의 기초가 드러났을 때 우리는 타락한 구조가 아닌 거룩한 구조로 땅을 기경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갈망보다 그리스도를 알려는 갈망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려는 갈망보다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갈망으로, 치유를 받으려는 갈망보다 소망을 주려는 갈망으로, 인생의 주도권을 통제하려는 갈망보다 그분이 주신 계획을 신뢰하려는 갈망으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우리안에서 그분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키우시는 일이란 사실을 아는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우리의 갈망보다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고 싶은 하나님의 갈망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 속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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