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윌리스, 부러진 십자가

성서적 백성들을 위한 의제라는 원제목을 갖고 있는 본서는 오늘날 국가와 같은 권력 기관들의 우상숭배적 본질을 폭로하고, 그것드르이 우상숭배적 일탈을 교정함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된 사회와 그 새롭게 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기독교를 창조하도록 독려한다.


1.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


-순환적 고리 끊기


성서적 비전은 개인의 변화와 사회 해방의 토대를 구현할 새로운 백성들의 출현을 위한 발판이다. 체제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삶이 달라지고 급진적으로 바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낡은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의 행동은 새로운 현실에 철저히 기초해 있어야 한다. p38


세상은 불법과 폭력, 착취와 조작, 이익과 권력추구, 이기주의와 경쟁, 증오와 두려움, 고독과 상처라는 총체적 순환의 지배를 받는데 이 순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이다. 이 죽음의 도덕적 순환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작동해 지금의 상황을 초래했다.
신앙성서 기자들은 인간과 체제들을 장악하는 이 세상의 순환고리라는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철저히 깨어졌다고 주장한다.
p47


그것은 복음이다. 이 세상 권세의 지배권을 빼앗아 무장해제시키며 새로운 인류, 즉 성령을 힘입어 세상의 기준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전혀 다른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세상에서 죽음의 순환고리가 끊어질수 있음을, 실제로 그 순환고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끊어졌음을 구현하는 존재이다. 


-제자 만들기
복음전도자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를 묻지 않고,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을 믿는가를 묻는다면, 이렇게 믿음의 신학이 믿음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질다면, 삶의 변화보다는 교리에 치중하는 복음전도가 등장한다.
복음이 편안한 신앙과 단순한 공식이 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은 이제 타협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급진적 요구는 느슨해졌고, 제자도의 대가를 거리낌없이 은폐하는 대다수의 복음 선포로는 그리스도가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순으한 이 복음전도는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가치를 뒤흔들기는 커녕 그러한 가치들의 틀과 결의 안에서 작동한다. 그 결과로 교회는 국가의 편에서 국가의 수혜를 입고 대중의 인기까지 얻는다. 복음을 개인 윤리와 사적구원으로 제한한 교회는 이제 가진 자와 힘있는자들의 친구이자, 영적 조언자, 국가의 목표와 운명과 일체가 되는 명예로운 종교단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p60


복음을 불구로 만드는 교회가 성장할수록 배교자는 늘어간다. 이런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복음 전도자의 과제는,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쉽게 만들어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가 아닌 회개로 이끄는 제자도만이 하나님의 자비의 굳건한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p67


오늘날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구원론의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개인이 누리게 될 구속과 칭의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도래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과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가질수 있을지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실패한 보음 선포의 모습이다. 죄를 씻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가 강조될 뿐, 이 세상의 규범과 구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질서를 역사 속에서 가져오신 그리스도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소유가 되어 그 나라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과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도래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사함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으로 침투한 새로운 질서의 수단인 우리의 삶의 방식이자 정의이다. p. 69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경제와 정치에 관한 문제에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정립하기 보다는, 새로운 기독교적 삶의 생활방식을 만들어내는 데에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적 급진주의란 사회와 정치의 모든 '기정 사실'들을 지속적으로 면밀히 검토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한다는 의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환경을 탓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변화되는 존재며,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의탁할 때 비로서 시작된다. 이 변화의 과정은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 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반드시 수반한다. 기독교적 급진주의는 전략이 아니라 변혁의 결과다. p83



2. 근원으로 돌아가기

-순응이라는 적
제국의 호아제 숭배를 거부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죄명은 자신들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신들을 거부했던 무신론자들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기성 체제의 신들을 믿지 ㅇ낳는 무신론자들인가? 아니면 그 거짓 신들의 요구에 경의를 표하고 숭배하고 있는 유신론자들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온갖 역사적 체제와 이데올로기적 합의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p94



보수적 기독교는 문화적,정치적 기득권 현상 유지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감수하도록 부추기는 신학을 낳았다. 세속문화가 낳은 개인주의적 세계관에 맞서 사회 구조와 제도적 차원에서 기성체제에 저항하지 못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건전한 교리에 보이는 관심이 믿음의 내용과 일치하는 삶의 방식이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동떨어질때, 신앙은 죽은 정통이 되고, 복음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진보적 기독교는 탄탄한 성서적 기반을 이탈하여 기독교의 진취적 기상과 차별성을 상실하는 신학을 낳았다. 계시에 견고히 기초하지 않은 신학적 의제는 세속 문화의 변덕스런 사상과 사고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성서적인 신학을 홀대하고 계시의 의미와 중요성을 간과할때, 교회는 교회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세상에 의존하고, 문화와 정치의 패턴을 본받고 타협하게 되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는 모두 정치에 빌붙거나 복음적 기반이 희박한 변덕스런 유행과 방식을 추구하다가 결국 문화의 하녀로 순응되어 버렸다.


따라서 진정한 대안 현제의 가정과 가치들에 도전을 가하기 위해서는 현재 체제의 통상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체제의 외부에 철저히 뿌리내려야 한다. 그러한 희망은 정확히 신학 안에서 성서적인 믿음을 회복할 때, 계시를 재발견할 때 찾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뿌리인 성서로 돌아가 계시에 철저히 뿌리 내릴때, 어떤 사회 체제에서든 대안적인 집단적 실재이자 예언자적 현존으로서의 교회 본연의 역할을 되찾게 된다. p103


3. 우상, 권세, 그리고 예배


-우상 숭배
성서적으로 보면 우상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뒷전으로 내몰고 자기 힘으로 생명과 구원을 얻겠다는 결단에서 생긴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예배하고 그것으로 생명과 구원을 얻겠다는 신앙이다. p109


자기잇속을 챙기고, 소비하고, 남을 조정하는 생활방식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구원을 빼앗아 가려는 경쟁자로 여긴다. 소비와 조종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고 타인을 경쟁자로 볼때 나타나는 결과는 소외다. 곧 하나님과 타인과 자신으로 부터의 소외일뿐이다.


우상숭배의 순환을 끊으려면 우상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타인을 경쟁자이자 자신의 구원을 위협하는 반대 세력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생명의 원천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구원이 자신을 초월하는 다른 존재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것을 버리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길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사랑과 희생으로 소외를 극복할 때 구원과 화해가 가능하다. 스스로 낮아져 자신을 희생할때,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셨음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우상의 권세를 타파할 수 있게 된다. p112


우리는 왜 하나님이 권세들을 지으셨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주셨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권세들이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인간을 섬기도록 되어 있는 세상 구조들이 거꾸로 우리에게 주인 행세를 하고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권세들을 공범자로 만든 타락이 낳은 결과다. 인간들만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대적한 것이 아니다. 권세들은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롬 8:38)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 됨을 포기한 권세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권세들을 사용하신다. p.119


예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셨다 베일에 싸였던 권세들의 정체를 드러낸 것은 바로 십자가였다. 그전까지는 그것들은 없어서는 안될 궁극적 실재, 세상의 신들로 대접받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면서 권세의 정체가 폭로된 것이다.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임이 드러난 것이다.
유대교 율법을 대표하는 서기관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로 그 율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리스도의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은 바로 그 성전의 이름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개인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로마의 정의와 법을 대표하는 빌라도는 그분을 처벌하는 것이 로마의 정의와 법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들을 신으로 숭배하게 만든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했다. p115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권세들의 가면을 벗겨 정체를 폭로하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이 세상의 권세들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교회란 '이 세상 권세들의 전략을 꿰뚫어 보고' 그들의 우상숭배적 주장과 계획을 물리치고, 그들의 중요성과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인생에 미치는 그것들에 제동을 거는 공동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승리를 드러내려면 권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삶의 새로운 양식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p128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과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바울을 우리에게 권세들을 물리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일은 그리스도가 이미 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분이 하실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우리를 유혹하고, 종으로 삼으려는 권세들과 대적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언하고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p130

 
4. 힘있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삶이 숨막힐 정도로 힘들어진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도, 그들이 실패했기 때문도 아니다. 풍요에 취해 흥청망청하는 소비문화는 사람들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고 주변과 담을 쌓게 만들었다. 우리는 소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기 중심적인 사상에 빠졌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풍요가 주는 보상과 쾌락을 만끽하려고 평화와 정의, 생태계 보존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있다. p147


우리를 정복자가 아닌 자신을 내어주는 몸이 되라고 부르신 십자가에 달렸던 그 몸의 머리는 자신을 따르는자들에게도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재물을 쌓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력을 조종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러하셨듯이 자신을 비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p161


5. 새로운 공동체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창조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새로운 사회적 실재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생생하게 드러내야 할 새로운 공동체가 되지 못한 것이다. p173


무엇보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믿음의 의미, 우리가 몸 담고 살며 증언하려는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공동체여야 한다.


- 그리스도인이 받은 부르심의 성경과 요구들, 그 부르심이 세상에 성실하게참여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 다음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는 새로운 자각에 기초하여 새로운 생활 양식을 만들어내는 곳이어야 하고,


-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는 새로운 자각과 새로운 생활방식에 눈 뜨기 시작하는 세상에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곳이어야 한다.


회개와 방향전환은 대안을 제시할 때에라야 가느하다. 대안에 대한 담론보다는 대안을 삶을 살아내고 대안 자체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p177


또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이라는 외부 원으로 확산되어야 하고, 우리의 일상적 언어와 행동, 태도들은 예배가 되어야 한다. p187


기성체제의 억압과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폭력은 그 체제의 가치를 생명을 업신여기는 죽음의 호전적 힘을 다른 방식으로 답습하는 것뿐이다. 폭력이라는 수단에 호소하면 우상숭배의 악순환은 고착될 뿌니다. 하나님은 이 체제앞에 무력이나 권력이 아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 으로 이 일에 대응하셨다. p197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책임을 지는 방식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뿐이다. 신약성서의 믿음이 평가기준은 효율성과 성공이 아니라 순종이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실때 우리의 몫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께 철저히 순종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p208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대리인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받은 가장 고상한 소명이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지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의와 정의와 평화라는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할때에라야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죽음과 비인간화의 순환을 끊을 수 있고, 현 체제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거부할 수 있다.


성서적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점검할때, 교회는 체제의 순응적인 태도를 벗어 버리고 공동체의 변화를 향한 걸음을 내딛을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모든 세상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섬기는 일에 헌실할 수 있게 된다. p213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세상의 체제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닌 전쟁중에 있다. 교회는 세상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뿌리박은 새로운 실재, 곧 하나님 나라를 무기로 삼아 세상과 맞서야 하는 존재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세속적인 비전으로 대체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주의등의 가면을 벗겨내고 신화적 요소를 없애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존재다. p219


예수는 자신에게 세상이 제시한 여러 선택들을 온전히 뿌리치셨다. 종교정치지도자들(사두개인)과의 협력, 종교적 규칙을 적절히 준수하는 방법(바리새인), 정적주의자가 되어 갈등과 긴장의 현장에서 물러나 초연의 장소로 은둔하는 것(에세네파), 그리고 과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열심당원) 등에서 물러나 다른 선택을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공동체,
새로운 질서와 소망과 능력을 증언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선택해 세상과 구별시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증언하고 대리하게 하는 공동체.
기꺼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스스로 종이 되어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동체의 은사들을 통해 리더쉽을 발휘하고,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 악에 반응하는 공동체.
도덕적 자립과 예언자적 증언으로 국가에 맞서고, 새로운 생활방식과 새로운 응답방식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여 낡은 체제와 기성사회에 도전을 가하는 공동체.


바로 그런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다시 세우고, 사람들에게 화해를 선보이신다. 이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는 죄와 죽음의 악순환으로 칮다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 이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기존 체제는 두려워할 것이며,  그 공동체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발현할 것이다. p222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