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정론의 딜레마 : 전능성의 오해
신정론 논쟁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과 악의 존재가 어떻게 서로 공존하는가?” 라는 논리적 딜레마와 “전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악를 허용할 수 있는가?” 라는 윤리적 딜레마가 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일어나는 광범위한 모순에 대한 해결은 간단치 않을뿐더러,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악(살인, 거짓말, 절도, 탐욕- 인재)과 자연적인 악(쓰나미, 지진, 화재, 기근-재난)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삶을 위협하는 이 문제는, 고통에 대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바를 전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의 문제와도 연관되기에 중요한 논의임은 부인할 수 없다.
수많은 논쟁을 다룰 수 있지만, 논의 이전에 필히 벗겨 내야할 주제로 [오해]로 한정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우리네 현실은 퍽퍽하기 그지없고, 고통이 왜 찾아왔는가라는 질문보다 앞서는 것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지독함에 가깝기 때문이다. 맥그리거의 [사랑의 신학]은 그 지독함에 대해 [오해]라고 뿌리 깊은 재해석을 요구한다. [오해]에 대한 재해석은 오해로 쌓인 앎의 축적보다 더욱 유의미한 삶의 희망을 제시할 것이다.
1.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불변성을 향한 인간의 투영.
전능성은 인간의 욕망이 신을 향해 투사됨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인간은 부족과 결핍, 죽음으로 상징되는 운명 앞에 자유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있고,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죽지 않아야 하고, 고통이 없어야 하며, 늙거나 실패하면 안 되는 존재여야 했다. 영원하다는 것은 완전하고, 변하지 않으며, 흔들리지 않는 무엇으로 상징되었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 전통의 수많은 논의는 뿌리깊은 불변성을 향한 집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향연>에는 “우리는 선을 갈망하는 것만큼이나 불멸을 필연적으로 갈망한다”고 적혀 있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는 “동적인 창조자인 제작자가 하는 일은 그가 의존하고 있는 정적인 창조자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을 만큼, 신은 정확하게 똑같은 상태로 영원히 유지되어야 했고, 어떠한 변화도 겪지 말아야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플라톤)보다 눈에 보이지는 세계를 통해 본질을 탐구하려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렀어도 불변성을 향한 집착은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부동의 원동자로 설명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석이론은 조물주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부동) 신의 사랑은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감정성을 합리적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잇는 유일한 ‘철학적’ 견해로 간주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들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희미하게 짚었을 뿐이다.
제국교회 로마로 대표되는 카톨릭의 시작은 그리스-헬라의 불변성에 대한 집착이라는 세계 때문에 산통을 겪어야 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인간이 신이라고 투사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전능)과 대척점에 있었다. 무력화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수난불가설과 삼위일체의 논의에 막대한 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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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무한히 독창적인 신의 권능.
고대-중세-근대-현대를 막론하고 신(전능)을 향한 인간의 집착은 뿌리깊다. 저자는 관습적인 공식화를 잠시 접어두고, 보다 환대 받을 수 있는 신학적 개방성을 추구해 보자고 제안하며, 시몬느 베이유의 ‘신의 포기’ 개념을 소개한다. 저자는 신학적 범주가 그동안 그리스-헬라/ 라틴화된 사고방식 속에서는 악의 문제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지적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정직한 방법이 없다고 본다.
“종교가 하나님에 대해 보편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표현할 때마다 언제든 그릇된 종교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들은 내가 전제군주적 힘이라고 부른 것의 사용을 통해 우상을 숭배한다… 오직 신의 포기(divine renunciation)개념을 갖고 있는 종교만이 진짜이다”(시몬느 베이유)
저자는 무한한 정도의 힘으로 상징되는 전제군주적 힘의 성격을 자기비허롤 상징되는 본성적 힘의 성격으로 방향을 교정한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가 아닌 무한히 독창적인 사랑의 권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힘의 성격은 자기 확장이 아니라 자기 축소의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 이외에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말 전능하다면, 무한히 강력한 신이 확장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므로 그는 자기확장을 통해 신을 강화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진행되는 유일한 방식은 자신을 제한하고, 비우고, 포기하는 방식이다. 성서의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창조가 자신을 확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제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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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성에 대한 오해는 1) 신의 전능이 극단적으로 전제적인 힘의 무하한 행사인양 전능성을 공식화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2)“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학적 제안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다.
악의 비밀에 대한 해답은 신이 갖고 있는 ‘힘의 성격’을 이해함으로써 더 분명해 진다. 자기비움의 사랑으로 신정론의 딜레마(통제하시는 하나님, 전지전능하고 불변하는 하나님, 무감정성의 하나님)는 극복된다. 악은 피조물들이 자신의 존재 법칙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자연계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실패는 ‘자기비허적 신’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우리를 괴롭힌다. 하나님은 성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리 없겠지만 피조물들의 매정함으로 생기는 자신의 고통까지도 완전히 사랑하신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들을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신의 관대함(하나님은 피조물들의 매정함으로 생기는 자신의 고통까지도 사랑하신다)이야 말로 악이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자기비허(창조적 사랑의 겸손한 권능) 힘과 악의 비밀(피조물을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신의 관대함)은 ‘신의 섭리’가 ‘기도’를 통해 창조적 사랑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통해 더욱 구체화 될 것이다.
무한히 독창적인 사랑의 권능은 인간의 투영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사랑의 권능으로 인도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필연은 이루어지는 역설은 독창적인 사랑의 진정한 전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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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신정론에 대한 오해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관성은 논리의 일관성이 아니라 신의 본성(자기비허)의 일관성을 지니고, 관계성은 수직적 주종의 일방이 아니라 수평적 존중의 쌍방을 지닌다. 전능성은 전제 군주적 힘의 성격이 아니라 관계적의 창조성의 독창적 사랑의 권능을 말한다.
- 맥그리거 [사랑의 신학]을 정리하던 중.. 끄적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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