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극적 주체로서 농담하기.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현실이 시궁창인데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반발하는 하는 이가 있다면, '비극적 주체로서 농담한다'는 것은 더욱 말도 안되는 궤변에 불과할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궁창인 현실 속에서, 시급히 또는 성실하게 안정을 구축하는 것일터이니 말이다.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면, 웃어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고 비사회적, 비조화적 행동이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비웃음 거리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비극의 주체로선다는 것은 근거없는 삶의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존을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고통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겠다는 숨겨진 진지함이다. 그 진지함은 결코 경직과 비장이 아닌 특유의 자유로움과 창조적 재치로 내재화되어 간다.
또한, 비극의 주체로선다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고통은 밖이 아니라 삶의 근본문제라고 인식했다. 우리네 인생에서 고통은 어쩌다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비극의 위대함은 어디서나 존재하는 고통을 그저 수동적인 필연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고민함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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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이러한 비극적 주체로 농담하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2차 세계대전 배경의 비극적인 상황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한 귀도(아버지)의 이야기다. 그의 삶은 항상 밝았으며 사랑으로 가득한 인생이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던 이들 가족에게 닥쳐온 불행,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따라 귀도(아버지)와 조슈아(아들)는 강제로 수용소에 끌려간다. 귀도는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조슈아에게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실은 하나의 '신나는 놀이'이자 '게임'이라고 속인다. 귀도는 자신들이 특별히 선발된 사람이라며 1,000점을 제일 먼저 따는 사람이 1등상으로 진짜 탱크를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1000점은 최후까지 숨바꼭질에 안틀키고 숨어있는 이에게 돌아간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탱크를 좋아했던 조슈아는 귀가 솔깃하여 귀도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셀 수도 없이 넘기며 끝까지 살아남는다. 마침내 독일이 패망한다. 그러나 패망의 날 탈출을 시도하던 귀도는 독일군에게 극적으로 발각되고, 숨어있던 아들은 이를 목격하는데...


마지막 장면. 이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독일군의 총구를 뒤로하고 끌려가는 상황에서 철문에 숨어있는 아들을 향해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더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숨어있는 아들을 향해 해맑을 윙크를 날린다.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를 향해 '내가 1등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윙크로 화답한다. 아버지는 그날 총살을 당하고, 아들은 다음날 탱크를 탄 연합군에 의해 구출된다. 텅빈 수용소에 최후의 1인으로 남은 1등? 조슈아는 탱크를 선물받았고, 그는 마침내 승리했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현실속에서도 귀도는 아들에게 게임을 통해 긍정의 힘을 심어주었으며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마법처럼 현실로 다가왔다. 귀도의 시선은 익숙한 우리의 시선을 비웃는다. 주인공 귀도는 소외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특유의 재치와 임기응변으로 시대정신을 비웃는 비극의 주체이다. 그는 비극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골탕먹인다. 이 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비사회적이고, 비조화적인 행동을 기계적인 습관처럼 벌이는 세상이다. 미쳐버린 세상이야 말로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이 있다면, 아마 "아들아, 아무리 처한 현실이 이러해도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란다." 일 것이다.   영화속 드라마틱한 귀도의 삶처럼 인생이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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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들을 이야기를 바탕으로, 토론을 했다. 토론에서는 괴도처럼 비극적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웃어버린 경험이 있는지 나눠보자고 했지만, 나는 반대했었다. 그런 나눔은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비극을 동경하는 낭만화로 거리를 두게하지 현실에 뿌리박은 우리의 이야기로 끌어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히려 다른 제안을 유도했다.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더라도, 우리가 왜 비극적 주체로서 농담하는 주인공에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비극적 주체와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은지, 또는 묘하게 공감하는 씁쓸함과 그너머에 있는 명랑성(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네 현실은 퍽퍽하기 그지없다. 고통은 재수없는 누군가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어쩌면 매순간 벌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 왜 찾아왔는가라는 질문보다 앞서는 것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지독함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 고통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장치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에 의해서 두려워하는 비극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처럼 경직된다. 장치가 억압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하지만 웃을수 있다는 것은 더 큰 생명력이 있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웃음은 경직과 비웃음을 전복시킨다. 정상적인 세상과 비정상적인 비극적 주체는 이제 정상적인 비극적 주체와 비정상적인 세상으로 전복되는 시각이 생긴다. 웃음과 생명의 방식은 장치와 억압의 비사회적,비조화적인 허구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긍정했던 장치와 억압을 다시 재해석(다르게 보게)하게 만든다.

그러니,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문제아' 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기왕 문제아가 된김에 비극적 주체(고통을 적극적으로 끌어앉은채 도망가지 않는 것)의 중심에서,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비폭력적 저항, 사랑으로 재해석되는 비논리적 일상, 생명의 방식으로 역설되는 더 큰 의미의 명랑성이야 말로 비극을 견디는 힘이다. 그것이 장치와 억압의 두려움을 없애고, 사방팔망 막힌 상황을 재구성해 줄 것이다.

비극적 주체는 고통을 끌어안은채 새로운 생명의 명랑성을 고민하는 자이다. 이 고민 없이는 새로운 창조적 사건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혼돈과 비극을 덮어버리거나 도피하지 말고 웃자.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니까.

[수업내용을 다시 정리하며..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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