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행위로 나타나는 그리스도.

인간은 공동체로부터 얻은 모든 힘을 바쳐 이 공동체 안에서 일해야 한다. '강한 자'의 자질은 공동체보다 우월한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 이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모든 물직적, 정신적 혹은 영적 은사는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목적을 성취한다.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교제도 포기될 수 있다. (타자를 위해 스스로 저주를 택하는 모세와 바울의 역설적 사랑을 보라. 죄가 없는 자로서 타자를 위해 죄와 형벌을 대신 짊어지는 그리스도의 단절과 죽음을 보라) ㅡ. 본회퍼, 성도의 교제,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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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3. 00:25

#. 성도의 교제와 나다공동체.

읽었다. 아니 읽어 보았다. 때론 이해가 되지 않아도, 때론 선문답같이 느껴지고, 구조적 난해함에 길을 잃더라도 멈추지 않고 끙끙거리며 읽었다. 마지막장을 읽을 때쯤, 어렴풋히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단어들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종말론적이고 시원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저 너머의 '피안'이 아니라 현실 한복판이라는 '차안'의 중심으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우리의 교회가 보여줘야 한다는 그의 사자후가 들리는듯 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왜 이책의 부제가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유럽의 국가사회주의가 낳을 '전체주의'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낳은 '개인주의' 사이에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가야할 길은 그 양자택일도 그 종합도 아닌 교회공동체 고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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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29. 01:40

#. 스탠리그렌츠·로저 올슨,『20세기 신학』 서평.

보수와 진보를 누가 정했으며, 왜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는가.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수많은 비판과 반성이 난무할 뿐 정작 대화의 현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렵사리 대화의 장에 참석을 한다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자신에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기껏해야 ‘그래도 상대 진영을 존중해야 할 필요는 있다’는 류의 구실이나 명분이거나, 한 발 더 양보하더라도 상대 진영을 논지를 자신의 진영의 입장에서 재해석되기 쉽상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입장이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긴장이 더 깊고 넓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구심이 든다. 누군가는 좀 더 보수적 성향이, 누군가는 좀 더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진영논리는 이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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