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향기, 향기를 잃어버린 시간.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즉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 혁명이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이 필요하다."

요즘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라는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이유는 모더니티(근대)에서 포스트모더니티(후근대)로의 이행과정을 세계사적 서술이 아닌 시간감각의 상실(향기를 잃어버린 시간)의 여정으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신중심의 고중세, 인간중심의 근대, 그리고 탈중심의 현대를 '시간'의 입장에서 거리를 떼고 조망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일인 것임은 분명하다. 시대적 흐름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는 시간을 공유했고, 해석했고, 관계했다. 한병철은 이러한 시대사적 흐름을 '시간'이라는 관점으로 재구성하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시대적 진단을 분명히 한다.

"신화적 시간은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히 놓여 있다. 반면 역사적 시간은 일정한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혹은 내달리는 '선'의 형태를 띤다. 이 선에서 서사적인 긴장 혹은 목적론적 긴장이 사라져 버리면, 선은 방향 없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점'들로 흩어진다. 역사의 종언은 시간을 점의 시간으로 원자화한다. -42p-

위 문구에 기대어 시간을 정리해보자면, 고중세(신중심)의 세계는 '신화적 시간'으로, 근대(인간중심)의 세계는 '역사적-계몽적 시간'으로, 현대(탈중심)의 세계는 '원자화된 점 시간'으로 명명된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현재", 특별히 운동과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를 가져다 준다. 신화적 시간속에서 운동과 변화는 영원한 질서 속에 있고, 불변하는 실체를 반영하는 세계에 놓여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 시간속에서 운동과 변화는 영속하는 현재를 알지 못한다. 사물들은 움질일 수 없는 질서 속에 붙박여 있지 않다. 시간은 오히려 되돌아감 없이 앞으로 전진하며, 과거를 반복하기보다 미래를 따라잡는다.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계몽적 시간 속에서 시간의 주인은 이제 '신'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그리고 시간의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인간은 이제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주체로 등극한다.

한병철은 이러한 현상을 '시간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시간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권력교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시간의 안정성'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권력의 교체와 함께 시간은 신이라는 받침대,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 작용하는 받침대를 상실했다. 받침대의 상실, 또다른 표현으로는 중력의 부재, 바로 여기에 한병철의 독특한 관점이 자리하고있다. 무슨말이냐 하면, 역사적-계몽적 시간이 앞으로 질주할 수 있는 이유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중력'이 부재하거나 약하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중력의 부재는 존재의 새로운 조건,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 냈고, 가속화 또는 감속화도 그러한 중력 부재의 현상 가운데 하나일뿐인데 사람들은 속도의 문제라고 착각한다고 진단한다. 즉, 세상이 가속화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들을 지탱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이들을 안정적인 공전궤도에 붙들어 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한병철이 <피로사회>를 통해 근대의 성과주체가 강제하는 자유, 자유하는 강제 속에 내달려서 스스로를 소진하는 우울사회가 되었다는 진단은 이러한 분석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있다. 사색을 잃어버린 활동은 표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력의 부재에 대한 해석은 '행진의 시대로서의 근대'를 '난비의 시대로서의 현대'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또다른 의미에서 시대적 자화상의 전환이다. 중력의 부재(궤도의 소멸)로 인해 이야기는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완전히 박자를 잃고 혼란에 빠진다. 현대의 다양한 사조가 사건과 정보로 가득차 있지만, 사건들의 더미를 연결하지 못하는 서술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완전히 박자를 잃어버려다는 것이다. 박자의 부재(중력의 부재)는 서술을 더 빨라지게도, 더 느리지게도 하는 가속화와 감속화의 현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제 일정한 방향이 있는 선의 시간(근대)은 사실 방향을 상실해버린 점의 시간(현대)을 향해 내달려 간다. 중력을 잃어버린 탈시간화의 시간은 모든 서사적 긴장을 소멸시킨다. 현대에서 사건들은 나열되고, 정합적인 그림으로 응축되지 않는다. 현대의 미적 긴장은 서사적 전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들의 중첩과 조밀화를 통해서 발생한다. (근대의 전진은 이제 현대의 유영에 자리를 내주었고, 지각은 인과적이지 않는 관계에 예민해졌다. 즉, 서사적 종말로 인해 높은 밀도의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새로운 지각형식이 탄생한 것이다.)

어쨋든, 중력의 부재는 방향상실을 낳았고, 방향상실은 서사를 잃어버린 탈시간화된 시간을 낳았다는 것이 시대사의 전환-근대에서 현대로의 전환-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다. (아마 한별철에게 있어 중력의 부재는 근대 이후로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탈근대'는 근대의 연장속에 있다고 분류할 것이다. 그에게 시대사의 구분은 서사와 탈서사의 구분이고, 서사의 부재가 극심한 현대는 근대의 부재보다 더 리얼하지만 보이지 않는 연장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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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시대사 정리를 따라가느라 저자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적어내지 못했다. 간단히 저자가 말하는 문제의식을 말하자면, 탈시간화 자체보다는 그로인해 발생하게 된 "지속성의 상실" 에 강조점이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비판지점으로 착각?!하는 가속화/감속화 현상에서 보다 심각한 것은 "지속성의 경험"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한병철은 '중력을 잃어버린 시간', 방향을 상실한 채 어지러히 날아다니기에 '난비의 시간', 박자를 놓쳐버렸기에 '리듬을 타지못하는 시간', 삶 속에서 서사적 세계가 담기지 못하기에 '원자화된 시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탈시간화된 위기의 시간(대)속에서 '시간의 향기'를 되찾자고 말하는 것이다.

덧. 시간의 진행이 어디론가를 향하는 전진이 아니고, 순간을 포착하는 시간감각으로서의 깊이가 아니라면, 그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탈서사화에 맞선 서사가 있는 시간이다. 향인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보여주는 동선은 중복됨이 없이 흐르는 시간, 연속된 시간의 향기를 보여주는 시간이다. 시간측정의 수단으로서 향은 많은 점에서 물이나 모래와 구별된다. 향기가나는 시간은 흐르거나 새어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향냄새가 공간을 채운다. 향기는 시간을 공간화하고, 그리하여 시간에 지속성의 인상을 준다. 물론 불꽃이 계속해서 향을 재로 만들어버리지만, 재도 흩어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는 글자의 형태로 머물러 있다. 그리하여 향으로 된 인장은 재가 되어서도 그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덧덧. 한병철의 독특한 관점이라면, 이전 저작들에서도 보여주었듯,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키워드(피로, 부정, 시간, 장치)를 시대사적 흐름에 터해 이야기하고, 동시에 시대의 대가들(푸코, 아렌트, 니체, 하이데거)과 겨룬다는 데 있다. (동시대에 대한 현대해석에 있어서도 사건의 철학(바디우, 지젝)과 차이의 철학(들뢰즈-가타리), 리오타르, 지그문트 바우만등 일각연이 있는 사상적 흐름과 자신을 대결하는데 있어서도 거침이 없고, 간결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부적절한 인용, 불충분한 인용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논지를 따라가며 읽으라 비판적 정리를 하지 못했으나, 그가 말하는 시간의 세계는 고전적이고, 때로는 너무나 이상적이여서 현실적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는 끝까지 읽고나서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려 한다.
덧덧덧. 비판적 책읽기 모임을 다니면서 새롭게 알게 된 모습이 있다. 책읽는 즐거움의 원천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온다는 점이다. 홀로 책이나 지식자체에 즐거움을 느낀적은 사실 별로없었다. 무슨말이냐하면, 평소에는 관심이 없던 분야였으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주 말하는 단어나 주제어가 나오면 촉각이 곤두서며 집중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한예로, 차이와 해체를 말하는 이들이 조화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철학/미학은 오히려 그 조화와 질서를 다르게 보려한다. 왜냐하면 질서와 조화의 이름으로 압제당하고, 폭력을 당했던 역사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비록 조화 그자체를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편견'과 차이의 '해체'를 통한 자유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더없이 조화/질서를 강조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이해는 그동안 내가 예술을 하는 지인들에게 가졌던 편견을 보다 깊은 이해로 바라볼 기회였기에 자꾸 메모하며 곱씹어보게 한다.
이 밖에 문학에서 말하는 섬세한 해석과 표현의 자유(최근 아이유 제제논란), 정치에서 말하는 획일화와 정당화 문제(국정화와 우민화)도 사실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지인들이 어떤 가치관에 집중하고, 더나아가 그것이 삶을 내던질 만큼 중요한 주제가 되는 순간, 표면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것에 내가 굉장한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되었다. 그래서 보다 진전된, 어쩌면 보다 진정한 관계를 하기 위해 상대방의 주된 관심사를 더듬거릴만한 여지나 기회가 있으면 굉장히 몰입하려고 한다. 혹자는 스스로가 재미없다고 여기는 주제를 어떻게 그리 열심히 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그 이유는 그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 있었다.(그전까지는 몰랐다. 그저 왜 나는 그 사람과 소통할 수 없는가에 열등감을 느끼며 살았다. 웃픈이야기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사랑하는 방식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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