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대안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정식은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자기의 현재 모습과 다른 무엇이 되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ㅡ. Nietzshe, Ecce Homo, II-10 니체의 대안은 급진적이고, 반종교적이다. 스스로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수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실로 우리는 이상에 매여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또다른 독선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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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12. 17:01

스탠리하우어워스, 불편함

스탠리 하우어워스, 그를 향한 나의 양가감정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애끊는 마음으로 폭풍공감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허망한 좌절을 느낀다. 이는 흔히 그를 둘러싸고 돌고 도는 “너무 좋은 이야기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아”라는 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뭔가 한국교회라는 맥락과 마주했을 때, 각도가 틀어지며 달라지는데 있다. 날카롭게 비수를 꽂는게 아니라 슬로건만 남아 허공을 휘젓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최근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해설하고, 소개하는 책 두 권을 읽었다. 한권은 이고, 다른 한권은 다. 두 책은 그동안 수많은 하우어워스의 책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이를 해설하고 소개하는 책이 좀처럼 소개되지 않은 점을 연결하려는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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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보다 방식

'예수 공동체'는 그것이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그것이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방식'을 통해 주님을 배신할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거룩한 부활 공동체를 더럽히는 일에서) 성냄과 오만, 폭력과 교묘한 조작은 신학적 오류나 도덕적 방종보다 훨씬 더 파괴정도가 컸다. ㅡ.유진피터슨, 현실_하나님의 세계,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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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없는 믿음의 종교

바디우에게 '진리'는 경험적이거나 명제적인 진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질서, 창조의 질서를 뜻했고, 라캉에게 '진리'는 지식안에 구멍을 내는 어떤것 이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현대는 '사실과 지식'의 영역을 일찍감치 제쳐두고 '사건과 현존'안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다는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이야기 해야할까?(혹은 무엇을 믿고 있는 걸까?) '믿음'이란 단어는 그리스도인들만 명명하는 고유어가 아니다. 현대인들도 새로운것이 도래하도록 낡은 것들을 재해석하고, 심지어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기 일쑤니 말이다. 오히려 그 모험은 무모함이 아닌 주체적 자기실현과 헌신이었기에 용기있는 결단으로 불리는게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이는 개인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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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뇌가 기능을 상실하더라도 습관은 몸에 남아있다고 한다. 좋은습관은 지각이성이 죽어서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세상의 습관도 이정도인데 경건의 습관은 어디까지랴. 시공의 제한을 넘어 영원과 접붙임을 창조한다. 우리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삶속에 송두리채 구현된다. 그것이 지각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영혼은 그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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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종

ㅡ. 종교적 인간과 참 그리스도인. '추종'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위인들의 제자 혹은 지지자와 구별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과 '새 삶'이 곧 예수 자신의 궁극 목적으로 주어져 있다. (...)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인 복음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새 삶에 비추어서야 비로소 그 참뜻이 이해된다.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과 분리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란 없다. (...) 따라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시는 것은 막연한 경배나 신비로운 결합 또는 글자 그대로의 모방이 아니라 각자의 실천적-인격적 '추종'이다. - 한스큉. 왜 그리스도인 인가. p319 부분 발췌. (종교적 앎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에 대해서 기말소논문을 써보려다가 발견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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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으로서의 하나님

#.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이 오밤에 적지않은 충격이다. 결국 헤겔의 신 존재증명에 대한 이야기 때문인데, 최근 칸트의 신존재증명 비판을 발제해서 그런지 더욱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칸트는 신존재증명의 3대비판(존재론적, 우주론적, 목적론적비판)을 비판하지만 그 이야기의 골자는 존재론적 비판의 툴이 나머지 둘에 모두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핵심은 '존재론적 비판'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비판의 핵심은 '현존'은 결코 '개념'의 추론에 의해 추론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촘촘하게 논증할 것이 많겠으나 결국 칸트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이론이성의 영역에서는 더이상 '신존재'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요청할 따름이다로 칸트의 주장을 정돈될 수 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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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부정

ㅡ. 자기부정(self-denial)과 자기거부(self-rejection) 자기부정은 '자기상실'이나 '자기거부'가 아니다. 초월의 영이신 성령이 오시면 '자기'의 세계는 부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자기-부정은 자기를 포함하면서도 갇힌(갇힌 사유로부터, 갇힌 체계로부터, 갇힌 거짓세계관으로부터의) '자기'를 넘어서는 진정한 자유의 선언이다. 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자기부정은 어떻게 설교되어지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제자도를 이야기 하면서도, 그 제자도의 정신은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를 극복되어야할 대상으로만 치부한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십자가의 자기부정은 부활의 생명을 함의한다.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피조성의 본향으로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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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과 도취

열망과 도취, 그 사로잡힌다는 경험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누군가는 이것을 몰입정도로 바라볼지 모르나, 아는이는 이것이 살아야 할 이유일만큼 급진적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자기안의 뜨거운 불덩이을 손으로 다스리는 것마냥 위험하고, 범람하는 감정일까? 끌려쏠려가 버린적이 없기에 황홀감의 높이도, 잃어버린적이 없어보았기에 허망함의 깊이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더듬거리며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글픈 건 체험없이 반성하고, 도취없이 균형을 이야기하고 있는 무정한 보고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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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하지 않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의 제한된 관점으로 계산하고, 비교하여 무엇을 아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참된 기도는 자기 생각과 느낌을 옹호하고 키워서 결국 자기를 방어하는 대신, 온갖 두려움과 적의를 놓아버리고 '완전타자'한테서 오는 안내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기도의 본질은 현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는데 있다. ㅡ. 리처드 로어, 벌거벗은 지금. 1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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