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으로서의 하나님

#.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이 오밤에 적지않은 충격이다. 결국 헤겔의 신 존재증명에 대한 이야기 때문인데, 최근 칸트의 신존재증명 비판을 발제해서 그런지 더욱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칸트는 신존재증명의 3대비판(존재론적, 우주론적, 목적론적비판)을 비판하지만 그 이야기의 골자는 존재론적 비판의 툴이 나머지 둘에 모두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핵심은 '존재론적 비판'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비판의 핵심은 '현존'은 결코 '개념'의 추론에 의해 추론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촘촘하게 논증할 것이 많겠으나 결국 칸트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이론이성의 영역에서는 더이상 '신존재'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요청할 따름이다로 칸트의 주장을 정돈될 수 있겠다.

하지만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주장과 전제를 전면적으로 뒤집는다. 즉, 이론이성의 영역에서 신은 증명될 수 있으며, 더욱이 그 증명방식은 오히려 '존재론적 증명'을 오해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의 저서 <종교철학>에서 그는 "존재라고 하는 규정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불충분한 규정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불충분한 규정을 버리고 "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이란 새로운(충분한) 규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정신으로서 하나님이 칸트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개념'에서 '존재'를 추론하는 것을 철저하게 분리한 칸트의 개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다. 즉, '개념'과 '존재'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다른 모습이다. 얼핏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이 명제는 "활동성"이라는 성격을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배제함으로 인해 생기는 오해이다. 즉 헤겔은 칸트가 오성이 존재와 개념을,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 사유하는 정신을 어떤 '고정된 성격'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다음의 헤겔의 말을 살펴보자.

"헤겔이 말하는 <개념>은 <존재>를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정립시키는 이 영원한 '활동성'이다. 개념은 정체되어 있는 것,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성을 스스로 지양하고, 자신을 객체화 시키며, 이를 통해 형성된 자기자신과의 차이를 지양시켜 나가는 끊임없는 '활동성'이다"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 38)

따라서 이제 안셀름의 증명이나, 아퀴나스의 증명처럼 <존재>는 어떤 <개념>에 의해 추론/발현되어 추가되어지는 성격이 아니라  존재와 개념은 동일한 것으로서 개념 자체에 속한 것이 된다. 즉, 양자의 통일성은 정신으로서의 <개념>이 자신의 존재의 특수성을 지양하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존재의 동일성을 찾아 나가는 "절대적인 과정"을 겪는다. 이를 헤겔은 "하나님의 생동성"이 발현되는 정신의 자기전개라고 명명했다. 다시말해, <개념>과 <존재>가 구분은 되지만, 결국 정신이라는 동일성의 자기정립이다. <개념>은 현실로서의 자신을 객체화시킴과 동시에 부정함으로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동성으로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정립/고양되어 가는 과정을 겪기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뭐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이 개념은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개념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방식이 마치 명제들의 전쟁의 땅 한복판에서 갑자기 헤겔이 그 명제들은 결코 땅에 뿌리 박은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그 기반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더 나아가 서로 대화하고, 급기야 끝내는 서로 하나가 될 수있다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사유방식은 모든 사유를 대상적으로, 즉 아군과 적군, 주체와 객체, 인식과 대상, 이쪽과 저쪽이라고 생각하기에 급급했던 사유방식, 즉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정태적이고, 고정적인 개념'에서 한발짝도 다른 가능성을 두지 않은채 끊없이 맴돌고 있을뿐이었다.

이러한 헤겔의 사유하는 "정신", 사유하는 "활동성", 사유하는 "변증법"은 그 성격이 결코 칸트처럼 '주관적' 성격에 갇혀 있기 않기에, '객관적 세계'를, 구체적인 현실을 말할 여지를 자유롭게 열어 제낀다. 정신의 자기전개는 그 증명방식에 있어 자기를 지양하면서도 동시에 지향해 가면서 끝임없이 '고양'되어 간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이 말한 "인간 정신의 하나님에게로의 고양" 헤겔의 신존재증명 방식이다. 이것이 바르트에게는 어디까지나 여전히 밖으로부터가 아닌 신-개념에서 출발한 자기 내적인 변증법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견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바르트가 빗지고 있는 칸트의 물자체의 세계와 인식주관 세계의 '분리'가 단순히 '분리를 위한 분리' 그자체가 아니라 신-인-세계의 하나님의 운행하심이라면, 헤겔의 "활동성"에 대한 설명을 비판적으로 변증해야 할 것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헤겔이 칸트를 비판하면서 건져올린 <사유>와 <현실>의 변증법적 대화과정은 결코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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