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는 죽었는가

#. 어떤 창피.

우연찮게 읽고 적지 않게 놀랐다. 나는 왜 이 책에 감탄했던 걸까, 그렇다고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려 이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이건 내게 있어 창피하고 내밀한 자조에 불과하다. 다만 이 책으로 인해 내가 이제껏 무슨 고민을 했는지 드러났다는 것이 다소 충격이여서 그저 '감탄'이라 일컬어야 마땅하다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동안 내게 있어 인간의 '주체성'이해는 근-현대를 걸쳐 마치 이카루스처럼 그 주체성이 그 정점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가, 그 정점에 이르러 사정없이 곤두박질 친 역사로 그 그림이 정돈되곤 했다. 즉, 데카르트로 상징되는 근대 인간의 주체성이해는 독일관념론(피히테, 셸링, 헤겔)을 거쳐 주체의 절대화 과정을 겪어 정점에 이르렀다가, 독일관념론 이후 하나의 덩어리로 실체화된 사유주체가 해체되면서(키에르케고어, 니체) 더 이상 사유와 존재를 떠 받쳐줄 근거를 인간의 '의식'에 고정시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의 주체성이해가 '의식'의 범주가 아니라 '무의식'의 범주, 또는 구조주의와 그 이후의 사유가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언어'의 범주로 넘어간 것과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에 이르러, 주체성 이해는 이제 곤두박질 치다 못해, 아예 그 자리를 내어주고, 쫒겨나기에 이르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바 '주체의 죽음'은 최근에 일어난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지난 몇 백년 동안 서양 근대 문화과 준비해온 예정된 일의 귀결이 되버린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과 '주체는 허구다'라는 주장은 이러한 과정들의 귀결점을 깔끔한 선언으로 대변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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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충격은 내용이전에 나의 기만을 발견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내용으로 보자면 난 충분히 "어쩌면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 교양으로 가질만한 위와 같은 내용은 정직히 말해, 나에겐 파편화된 지식이었다. 그러나 강영안 선생님의 지난 연구의 발자취를 잘 정돈해 온 것만 같은 이 책의 전개방식은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깔끔한 지형도를 제시해주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제껏 천착했던 문제가 '영성'이었다기보다 '자아'라는 문제였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깨달았다는 점이다.

지나고보니 반복되는 집착은 '자아'에 있었다. 신학에서 거진 철학이나 종교학으로 넘어왔지만 그래도 집착했던 것은 '자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살피려 한 것 같다는 것이다. 본회퍼를 읽을 때에도 하이데거를 '자아에 사로잡힌 체계'로 이해하며 계시의 자리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고, 키에르 케고어를 읽을 때에도 데카르트나 헤겔을 '객관적 진리 체계'로 이해하며 주관적 실존이 나타날 공간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체계에 대한 저항에서 나의 실존의 생생함을 찾느라 집착한 나머지 소위 실존주의에 천착, 곧 스스로 '자아' 중심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사르트르로 상징되는 실존주의 마저도 내가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미 데카르트식 '자기' 즉 옹근 모습을 갖춘 자아가 아니라 이미 분열된 가운데  있는 실존을 '자기'를 통해 극복또는 인정하려는 지난한 통찰을 가리키는 것 이었다. 그런의미에서 실존주의자만큼의 용기도 내지 못한게 사실이다.)

한마디로, 나는 데카르트가 아니라 하면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주체' 이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니었나 싶다. 즉 사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명증적으로 인식하는 '나' 그것에 집착하느라 철학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이것은 진심 피하고 싶은 인정이다. 그것은 "불안을 잠재우는 확실한 내가 좋다!"는 생각에 집착하느라 타자를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의 세계를 내 앞에 몰아 세우고, 그게 성찰이 되었든 반성이 되었든 판단의 최종적 근거를 오직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확보하는데 집착한 모습이 꼭 데카르트가 같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 데카르트다. 오직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 혈안이 되느라 자신은 구했을 지언정, 정작 나머지 나의 바깥과 나와 함께 거주하는 타자의 세계에 대해 아무런 확실성도 보장해주지 않았던 데카르트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현대'를 읽는 키워드를 '데카르트' 비판을 기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내게 있어 이해이전에 어떤 창피였다. 그 비판은 간략히 말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비판인데, 철학하는 이들은 이미 아는 세계이지만, 내게는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던 어떤 조각들이었다. 그래서 내겐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먼저 <객관주의 비판>은 데카르트 이후에 삶의 모든 분야에서 침투한 '과학적 합리주의' 이념을 비판이다. 저자는 그렇게 명증하게 믿어왔던 '사실'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역사성 차원에서 그 권위를 잃어버렸음을 설명한다. 즉 명증하게 믿어왔던 그 '실재'라는 개념이나 사실이 언어, 도식, 해석적 틀, 관점등을 매개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인식 대상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은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이는 내가 이제껏 '자아'의 생동감에 집착하느라 '해석하는 주체'의 문제를 보다 명료하게 보도록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집착했던 '자아'도 맥락속에서 허망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다시금 바라보게 해주었다. (아마 누군가는 현대철학을 접하며 그 당연한 걸 어떻게 놓치면 읽어올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주관주의 비판>은 데카르트 이후에 주체를 중심하는 사유하는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자아 존재와 자아 사유를 통해서 지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고, 그리고 난 후 세계를 근거지우려는 데카르트의 노력은 자아중심주의적 주관주의 전통을 형성시켰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현대철학자에 이르러 그러한 주장은 허망한 주장에 불과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자아는 기원이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통해 형성된 결과일 따름이다. 즉 주체는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그물 속에 위치한 자로 전복되어버린 것이다. 그 권위가 사라졌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따라서 현대철학이 자아의 절대성을 비판함으로서 인간 주체가 세계의 근원이며, 절대 주체자란 생각을 철저히 깨뜨리는데 공헌했다는 점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의 태도는 여전히 자아 중심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체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재구성된 권력의 이행이든"(푸코), "주체는 타자의 욕망으로서, 자기소외에 비롯된 산물이든"(라캉), "주체는 존재와 다르게 타자로 초월해서 진정 책임있는 주체성의 확립의 자리를 찾을 수 있든"(레비나스) 나한테 그러한 것들은 그 주장 그대로 결코 들리지 않는다. 의식 주체는 죽지 않아야한다. 나는 여전히 해석학적으로 유동되는 '이해'의 범주를 삶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고(객관주의), 나라는 확실성의 축이 흔들리는 매개나 소외를 충분히 수용하여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주관주의)

분명한 건 아는 것과 사는 것, 그 이중적 기만이 내게 작동하고 있다는 인정이다. 내가 아는 세계는 현대철학일지 모르나, 내가 사는 세계는 근대철학이다. 그나마 희망을 더듬어 찾아보라면, 어렴풋 뒤늦게 사랑이라는 것을 겨우 감지한 나는 철학이라는 것은 본디 삶에서 터져나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겨우 감지하게 되었다는 점뿐이다. 객관주의니 자아중심주의니 이런 것들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 제시하는 어려운 말들은 사랑하는 자, 즉 그것이 진정 전적 타자이든, 이웃이든, 사랑하는 애인이든 어떻게 해야 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깊이 물어본 자에겐 이미 오래된 물음이며, 금새 그 본의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랑'에 대해 깊이 살아내 본 사람은 철학적 난제에 대해 직감하는 어떤 문제의식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요구받았었고, 처절한 자리를 위치 지어낸다. 그런 점에서 결국 난 애초에 살아내지 못해서 아무리 들어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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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오만(근대)과 절망(현대), 그 어느 것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붙잡고 있는 메인(본래) 화두이지만, 내게는 이러한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자체가 버겁다고 말해야 할듯 싶다. 나는 여전히 근대의 자명한 오만이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불현듯 "하나님의 의냐 자기 의냐" 라는 멘토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난다. 아이러니 사게도 '자아'에 대한 집착은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더 깊은 수렁 속에 빠져있는 나를 보고있어야 하니말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철학수업은 나를 짓누면서 결코 자유를 돌려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있어서 만큼은 그동안 '자아'라는 문제를 내가 왜 그리 좋아했고, 집착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이미 그 논의가 한참 전에 끝났기에, 이젠 그 반성과 극복이 현대에 어떤식으로 이어져 가는지 전반에 걸쳐 설명하고 있었다.

그냥 막 써 갈긴 생각이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성찰해 봐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느껴지듯, 또 언제나 그렇듯 뭔가 발견한 생생한 것에 열의를 쏟느라 또다시 놓쳐버린 일종의 '본의'를 다시 주어담아야 겨우 철학을 할까말까하기 때문이다. 난 정말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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