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의 회복

#. 포이어바흐의 투사를 넘어, 참-사람의 회복 추구하기.

'종교적 인간'의 신앙성찰에 대해 기말소논문을 준비하다가 월터윙크의 <참사람>이라는 책을 만났다. 그의 주장은 예수가 스스로 말한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을 단순히 예수만의 칭호가 아니라 참-사람의 궁극적 원형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의 이야기가 특정종교(기독교)가 아니라 '참-사람'을 향한 종교성을 가진 인류 모두에게 해당하며, 그것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기말을 잠시 놓고, 그의 책을 끝내 내려놓지 못한 해본적없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포이어바흐의 '투사'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먼저 저자는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요약하자면 '신적인 것이라고 경배를 올린 모든 것은 사실은 인간의 완전성을 종합한 것이며, 따라서 신학은 인간학이며, 그래서 기독교의 숨겨진 의미는 무신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포이어바흐가 '투사'를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여긴것에 대해 반대한다. 무슨말이냐 하면, 투사는 어쩔수 없는 인간의 생질인 것을 무조건으로 인정하지만, 그 투사를 '통해서' 우리는 세계, 하나님, 그리고 우리자신의 무의식에 대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하나를 배우는 것이라고 '투사' 심오한 차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간략히 말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라는 고백을 "그건 단지 너의 상상일뿐이야"라고 말하는 포이어바흐에게 "물론이지! 그게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방식이야~"라고 이야기 하거나, "너는 너 자신의 의미들을 우주 속으로 투사하는구나"라는 포이어바흐의 질의에 "예, 맞아요, 그게 바로 우주가 우리들을 존재하게 한 이유지요. 우리는 의미들을 우주에 투사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지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투사'의 심오한 차원은 단순히 우리의 이미지대로 하나님을 창조하는 것(응결)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이미지들이 응결되는데 그것은 우리 내부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 무의식 너머로부터도 응결된다. 즉, 중세의 유대인 신비가들은 그 장소를 "영혼의 뿌리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윙크는 "암호화된 원형"에 대한 "상상의 회복"이라고 명명했다.

그가 이렇게 투사를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학문적 배경 속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저자는 유대-기독교 신비주의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을 역사비평과 자기실현(개성화)에 관한 융의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즉, 융에게는 자아(ego)와 자기(self)는 구별된 개념이다.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인 반면, 개인적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전체정신의 중심으로서,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할될 때 비로소 전체인격이 실현되어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본다. 다시말해 저자는 융을 빌어 "그리스도는 전체적 자기self의 원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자기(self)를 그리스도에 투사하고, 그리스도를 모방하도록 가르친 기독교의 역사다. 그로 인해 기독교의 역사는 무의식의 그림자를 외면한 채 또 다른 페르조나를 부과함으로써 신자들을 참-사람을 향한 자기실현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러한 통찰에 입각하여 예수가 왜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지칭한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자신만을 가리키는 배타적 칭호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는 참사람의 원형으로 선포했는지를 해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가 구원자/하나님의 아들로서 믿음/예배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예수가 가르친 믿음의 본질을 밝힘으로써 하나님이 단번에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교리(위로부터의 기독록)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을 성육신 하셨는지(아래로부터의 기독론)를 묻는다. 즉 '그리스도의 인간학'의 반대편인 '인간성의 기독론'만이 기독교인들의 인간성 안에서 투사가 아닌 하나님의 진정한 이미지와 유사성을 계시할 것이라는 예언자적 외침이다.

포이어바흐의 투사를 "팽창의 위험성"으로 직시하면서도, 참-사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성 안에 잠재된 '인간변혁의 창조성'을 사람됨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하는 초대장으로 피력하는 그의 주장은 교리와 율법에 복종하는 것과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도발적이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간디가 바라본 예수 한 사람의 이야기로 마친다. "기독교가 세계에 주는 선물은 '기독교'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인간성'의 계시자이며 촉매자인 '예수'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기독론이란 정신적 담지자가 계시한 "사람의 아들"로 인해 태어날 수 있겠는가? 윙크는 이 충동이야 말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본래적 인간의 원형적인 현상을 보여준다고 믿고 있다.

ㅡ. 월터 윙크의 <참사람>을 읽고, 부분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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