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없는 믿음의 종교

바디우에게 '진리'는 경험적이거나 명제적인 진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질서, 창조의 질서를 뜻했고, 라캉에게 '진리'는 지식안에 구멍을 내는 어떤것 이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현대는 '사실과 지식'의 영역을 일찍감치 제쳐두고 '사건과 현존'안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다는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이야기 해야할까?(혹은 무엇을 믿고 있는 걸까?)

'믿음'이란 단어는 그리스도인들만 명명하는 고유어가 아니다. 현대인들도 새로운것이 도래하도록 낡은 것들을 재해석하고, 심지어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기 일쑤니 말이다. 오히려 그 모험은 무모함이 아닌 주체적 자기실현과 헌신이었기에 용기있는 결단으로 불리는게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이는 개인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들 역시 따로 또 같이를 고민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인간존재는 그들이 똑같이 시민 모두에 결속되어 있고, 전체 집단에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들 나름대로 자유의 표현으로 보기에) 자유롭게 복종하기도 하는 법을 만들 수 있을까?'를 물으며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했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으로의 복귀나 아나키스트의 국가없는 사회의 꿈 이라는 본원적 자유로의 복귀가 아니라면 시민정치는 어떻게 저 쇠사슬을 정당화하며 자유와 평등의 균형상태를 존재하도록 할수있을까?'을 물으며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좁혀나갔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등을 겪으며 보여준 현대인들의 역사는 선의 철학적 정당화가 아닌 차라리 선에 따라 행하기 위한 주체적 동기부여가 낳은 시행착오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믿음없는 이들의 믿음'은 신과 같은 어떤 형이상학적 실재의 존재를 일컫는게 아니었고, 어떤 신념적 교의, 교회제도, 영혼과 내세의 불멸성에 대해 묻는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믿음없는 믿음이란, 종교의 확약이나 보장없이 매순간 존재함을 선포하고, 무한한 사랑의 요구에 거하려 하는 주체적 행위를 일컫는다. 그것은 무한한 요구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 믿음으로서의 존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맞서고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믿는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없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종교적 광신과 인간소외의 냉소주의에 맞서 오히려 믿음을 지켜야한다고 피력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한 믿음은 책임을  모면하는 자유가 아니라 책임을 구성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힘을 초과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전력을 다해 무한한 요구에 맞서 잃지 않아야하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분투했던 것이다.

본회퍼는 '어떻게 우리는 종교없이 신을 말할 수 있는가'을 물으며 신없이 신과 함께하는 세상을 고민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은 한발짝 더나가 믿음없는 믿음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되묻고 있다. '어떻게 종교없이 신을 말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신 없는 종교가 인간존재에 연합에 함께 결속시킬 힘이라고 말할것인가'라고.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 신자든, 비신자든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말일것이다. 이 경계에서 종교의 자리는 어디인가? '공동적인' 사건은 벌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믿음이란 이름으로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걸까.)

ㅡ. 믿음없는 믿음의 정치. 1장을 읽는 도중에 발췌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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