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하우어워스, 불편함

스탠리 하우어워스, 그를 향한 나의 양가감정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애끊는 마음으로 폭풍공감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허망한 좌절을 느낀다. 이는 흔히 그를 둘러싸고 돌고 도는 “너무 좋은 이야기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아”라는 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뭔가 한국교회라는 맥락과 마주했을 때, 각도가 틀어지며 달라지는데 있다. 날카롭게 비수를 꽂는게 아니라 슬로건만 남아 허공을 휘젓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최근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해설하고, 소개하는 책 두 권을 읽었다. 한권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교회들>이고, 다른 한권은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다. 두 책은 그동안 수많은 하우어워스의 책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이를 해설하고 소개하는 책이 좀처럼 소개되지 않은 점을 연결하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교회들>은 좀 더 독자층의 문턱을 누구나로 낮춰 쉽고, 친절한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이고,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는 조금이라도 하우어워스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연구자로서 대화를 거는 방식에 가깝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제는 두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느끼는 양가감정이 무엇인지 좀처럼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뭐랄까. “덕과 성품을 통해 하나님 나라 비전에 충실하자!”라는 슬로건 외에 좀처럼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고나 할까. 물론 저 슬로건 자체에 담긴 함의가 결단코 빈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은 내가 본회퍼를 연구할 때 느끼는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본회퍼, 값비싼 제자도를 말했던 본회퍼”라는 슬로건 하에 본회퍼가 지닌 학문적 층위와 깊이가 부지불식간에 사라지는 느낌말이다. 이는 비슷한 맥락에서 학문적 층위에서 어떤 담론에 대해 하우어워스가 대립각을 세우며 주시했으며,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고, 왜 그래야만 했는가가 잘 보이지 않고, 목회적 차원에서 은혜롭게 소비되는 것과 닮아있다.

한국적 맥락과 마주했을 때, 각도가 틀어진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깐 어떤 독자가 그의 책을 읽고 “교회공동체가 중요해.”라는 말이 남았다면, 그것은 (조심스럽지만)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하고자 한 메시지가 반도 전달되지 않았을 수 있다. 이것은 누가누가 더 잘 해석했냐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하우어워스의 말마따라 이것은 우리가 지닌 이야기의 ‘빈약함의 문제’다.

일전에 <바울과 은혜의 능력>를 줌으로 독서모임을 했을 때의 일이다. 끝까지 다 읽고 서로의 감상평을 듣는데 많은 독자들이 하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은혜는 우리 자아를 온전히 새롭게 형성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의 반응을 일으키는 능력이며, 이 압도적인 비상응적 선물에 의해 개인과 사회, 모든 것이 변혁된다”는 그의 핵심 주장에 대한 의문에 있었다. 선물을 강조하려다 보니,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역사 안에서(in) 확인되지만, 그 연속성이 인간적 패턴의 연속성에 따라서(according to)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 이상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평범한 독자들은 바클레이의 옛관점과 새관점을 새로운 해석의 빛 아래 양립가능하게 중재하는 바클레이의 학문적 작업보다 그가 주장한 내용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복음의 내용은 그러한데, 그것에 대한 경험이 빈약하니 그 진실성에 대해서도 의문과 질문이 더해지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 비상응적 은혜의 선물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경험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구체적인 변혁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연대를 이루며, 나와 너, 우리를 어떻게 새롭게 하는가. 이 모든 물음들이 관념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지닌 복음의 내용이 지닌 충격적인 폭발력과 밀도를 제대로 음미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된다.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데 복음의 내용에 대해 되려 당사자인 자신의 진영에서조차 낯선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향한 관심과 의문은 이러한 빈약함에 기반해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런 교회공동체의 신실한 이야기를 ‘전수받아’ 자신도 그 이야기의 일부를 입고, 자기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빈약한 이야기를 ‘전수받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구원받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우어워스는 주장한다. 나를 지배하는 거짓된 세속의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예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에 의미에 대해 말이다. 이는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예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으니’ 속량, 곧 우리가 죄사함을 입었도다에 대한 현대적 버전이다.

우리는 우리가 찌든 무엇으로부터 ‘건져져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문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것은 옮겨진 정체성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를 식민지 통치 가운데 있는 거류민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표현도 하고 있지만, 이 또한 구체적인 흑암의 권세에 매여 있음이 진정 복음의 능력에 의해 파쇄되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중이라는 충격을 지닌 사람 외에는 그 말은 여전히 막연한 사람이 많을지 모른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맥락이 내러티브나, 성품, 덕 자체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 셋이 엄청난게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은 백번 인정하되, 이 키워드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지닌 정말 고유한 ‘정체성’의 문제를 어떻게 드러내어야 하는가,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지닌 정체성의 한쪽 측면을 거세해버리는 담론의 방향에 어떻게 안휩쓸릴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본질인 것 같다는 뜻이다.

가령 예를 들어, <평화의 나라> 책을 읽게 된 점은 나에게 많은 부분 막연했던 슬로건 제거에 도움이 되었는데, 첫째로, 참된 윤리는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이상을 찾는 도덕철학에 반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면 아름다운 이 철학에서 하우어워스는 인간의 ‘선택’에 집중된 어떠한 환원을 본다. 왜냐하면 어떤 ‘선택’은 사실 그 ‘선택’이 가능하게 된 ‘성품’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그 사람이 믿고 따르며, 익힌 이야기와 신념, 또 이로인한 어떤 확신에 의해서 어떤 선택에 도달한다는 점을 간과한 채, 자신은 홀로 완전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착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우어워스는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행위와 선택)를 묻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점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하나의 서사적 존재로서, 특정 이야기를 공유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맥락으로 풀어보자면, “도덕 행위자로서 인간은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통해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한 ‘덕과 성품’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덕과 성품은 그 공동체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이야기와 전통, 예전 안에 깃들어 있다. 한 인간이 도덕적 이라는 것은 내면에 그 사람을 움직이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과 같다”(33)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인 그러니까 세례로서 정체성을 입고, 매주 설교를 통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익히며, 헌신과 봉사 그리고 전도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행위 익혀가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하우어워스는 ‘보편’를 통해 ‘특수’를 해석하기보다 ‘특수’를 통해 ‘보편’에 말을 거는 방식에 가깝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법칙을 찾는 것(현대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한정된 법칙을 익혔더니, 마침내 드러나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유함과 독특함이 이 세상과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무슨 메시지를 건넬 수 있을지를 대화해 보자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야기의 충실함과 충만함이다. 선택은 성품에 기대어 있고, 성품은 교회이야기에 기대어 있다면, 또 교회이야기는 예수이야기에 기대어 있고, 예수이야기는 하나님나라의 충만한 실재에 기대어 있다면, 우리는 이야기에 충실한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자문해봐야 한다. 홀로 덩그렁이 남아 버린 '자아', 빈약한 '나'가 아니라 그 자아를 둘러싼 숨겨진 이야기, 거대한 광맥과 깊이를 추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우어워스의 논지는 우리가 서 있는 ‘행위’와 우리가 증언해야 할 ‘나라’ 사이에 남겨진 간격과 밀도를 회복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우리가 서 있는 ‘행위’는 일종의 나무의 결처럼, 그 심층에 어떠한 이야기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어 나타나고, 이야기에 충실한 탁월함의 과정과 결과로서 표출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정녕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고유한 룰과 법칙, 그리고 체험적 이해하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가 콘스탄티주의를 말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고, 공공신학을 말하며 세상복음과 자신을 구별하는 이유이다.

계속 쓸말이 생각은 나는데 너무 졸려서 일단 내일로...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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