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서평)

#. 근원을 품고, 다시 세상 속으로 (서평)

 

“저는 썩은 개고기를 먹은 집안의 자식입니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의 비극은 이 고백 속에 숨겨져있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추억하고 싶은 순수하고, 장난끼 많고, 사랑받던 어린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개척교회 목회를 선포하시면서 내 삶은 많은 풍경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온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3층짜리 생일케익에 꽂힌 초를 불곤 했던 나의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선포 이후에 전혀 다른 삶의 배열 속으로 영문없고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야했다. 15층 고층아파트에 살던 나는 그 이후 10층짜리 아파트로, 5층짜리 빌라로, 2층에 속한 원룸으로, 반 지하로, 끝내는 끔찍했던 컨테이너 박스로 나를 옮겨놓았다.

 

11번의 이사와 4번에 교회 이주, 특단의 대책으로 찾아갔던 기도원은 아버지에게는 간절한 탈출구였으리라. 굳건했던 아버지의 신앙과 달리 나는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좌절해 있었다. 밑바닥으로 끝없이 곤부박칠치는 현실은 불신앙과 날로 심해지는 반감을 낳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 마음상태와는 상관없이 흰돌산 기도원에서 열리는 목회자 특별기도회는 매회 3000명이라는 목회자로 언제나 북새통이었다.(물론 추첨을 통해 자동차를 주거나, 수십만원아치의 상품을 주기도 했다.) 어쨋거나 그곳은 대부분의 목회자와 가정이 모인 곳이었고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목이 새도록 기도하고, 울부짖었던 통곡의 골짜기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그곳의 3천명의 기도소리는 아직도 묘한 슬픔과 함께 내 귓가를 때리곤 했다.

 

그렇게 매년 정기적으로, 또 수시로 찾아갔던 기도원에서의 만남들은 비극을 견디고, 새롭게 살고자 했던 신앙인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한 가지 아이러니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물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도원에서 들려오는 희망이 “저번년도에 왔던 아무개 목사 있지? 여기서 그토록 기도하더니 이제는 대형교회 목회하면서 성공했데, 그래서 이번년도에 안왔잖아” 라고 말하는 그들만의 연대방식이었다. 현대판 베데스다 연못, 나는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간절한 사람만이 살아남아 베데스다를 떠난다'는 베데스다를 보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 아닌 누군가가 연못에 1등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숨겨진 두려움과 경쟁은 가장 거룩하다 불리우는 기도원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한 희망의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없는 진실함을 주기보다는 더 강력하게 기도해야한다는 처절함과 숨막히는 경쟁심을 낳았다.

 

우연히 집어든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의 저자 서문은 이러한 나의 처절함과 숨막힘에 균열을 내고, 매우 색다른 방식으로 삶을 재해석해볼 것을 권유했다. 그것은 결코 단지 열심을 내지 못한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것은 시대전체의 문제이며, 욕망의 구조와 이를 이용하는 세계에 대한 문제라고. 문제를 보다 큰차원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했다. 저자는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를 현대철학의 ‘장치’라는 사유에 깃대 분석하면서 인간과 종교가 이 장치에 포획당하지 않으면서 실증과 경제논리를 벗어나 어떻게 ‘신비와 야생의 영역’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묻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이었던 내가 기도원 한복판에 서서 ‘하지만 뭔가 이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고 물었던 질문이었기에 속절없이 저자의 생각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유와 해방을 노래해야할 종교가 어쩌다가 원초적 야생성과 생명의 원형성을 상실당하고 포획당했는가?”, “종교는 이 비극 한가운데서 어떻게 생생한 기쁨과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단순한 비판만이 아니라 웃음으로 승화된 비폭력적 저항과 가장 아름답고 촉발적인 생명력이 숨어있는 힘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일련의 저자의 물음은 신기하게도 나에게 이제까지 익숙하게 걸어왔던 길(정주)과 새로운 길을 위해 모험했던 길(탈주), 그리고 저항했던 세월이 지나 다시금 걸어가고자 상상했던 길(이주)을 다시금 묻고 바라보도록 했다. 따라서 이 글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요약하거나 소개하기보다는 내 삶의 물음들과 연결하여 저자가 건넨 말에 내 삶을 반추하고, 해석하고, 느낀 바를 찬찬히 적어보려 한다.

 

1. 정주 : 익숙하지만 고착된 삶의 배열.

 

첫 번째 물음, “자유와 해방을 노래해야할 종교가 어쩌다가 원초적 야생성과 생명의 원형성을 상실당하고 포획당했는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시대의 욕망’과 욕망을 부추기는 보이지 않는 ‘장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실상’의 관계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예가 바로 ‘동해의 하나의 풍경’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비유한 부분이다.

 

“10년 만에 찾아간 동해의 풍경은 익숙했지만 낯설었다. 밤의 해변을 나서면 검은 밤바다를 수놓은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이 보인다. 구원의 빛처럼 보이는 등불은 실은 쪽배에 작은 등을 단 것으로, 그 빛에 몰려드는 오징어들을 포획하기 위한 ‘장치’다. 초라하지만 잔인한 이 실상은 멀리 바닷가에서 산책하며 바라보는 구경꾼들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다. 하지만 그 풍경 속에는 ‘고달픈 삶의 구조들’이 도사리고 있다”(p.14)

 

거짓된 집어등을 진정한 빛이라 착각하는 물고기, 이 은유는 저자가 이 시대를 진단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저자는 단순히 인간과 종교의 문제를 개인적인 종교인의 문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시대적 문제로 바라볼 것은 제안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시대에 보이지 않는 ‘욕망의 집어등’은 우리의 진실한 ‘갈망’들을 포획하여, ‘욕망’을 ‘자유’의 이름으로 부추기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해방으로서의 ‘자유’는 정치권력에 의해 적과 동지를 나누고 당파 짓는 이데올로기로 희생당하고, 인류애를 품은 ‘사랑’은 방송매체에 의해 욕망을 부추기는 유일무이한 주인공이 될 것을 부추긴다. 모든 취향과 문화까지 저마다의 방법으로 포섭하는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욕망의 집어등’을 현대철학자들(푸코, 아감벤, 들뢰즈)은 ‘장치’라고 명명했다.

 

사회의 작동방식을 안다는 것은 우리를 기호화하여 관리하는 사회의 체제를 파악하는 일이다. 현대사회 그렇게 하나의 기호아래 모든 차이들을 말살한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의 회전 운동이 동일해야 원활하게 작동되듯 사회는 ‘동일성’을 기반으로 모든 일들을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우리에게 편이와 목표를 재조정 시킨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욕망의 집어등’을 쉽사리 저항할 수도 식별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분석하며 현대에 들어서 우리가 저항해야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권력자나 장치를 만들어낸 기득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그러한 장치와 공생하는 주체에 있다는 점을 문제삼는다. 즉, 보이지 않는 적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자신 안에도 있다. 모든 것이 딱딱 떨어지는 근대의 시대와 달리 착취자와 피착취자, 적과 동지, 생명과 죽음의 영역은 현대인에게 좀처럼 구별되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가 자신을 소진시키는 착취하는 성과주체이고, 배후의 무의식이 명료하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의식의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 현대를 여는 일련의 혁명은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가 오히려 보이는 세계를 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우리의 종교의 영역에도 피해갈 수 없는 화두다. 이 시대의 ‘욕망의 집어등’은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신성의 영역마저도 유사신성의 형태로 교묘하게 가공하며, 포획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고착되게 하는 삶의 배열에 희망을 주어야할 신앙생활이 익숙하고-규칙적인 종교생활로 길들여지고, 갇힌 현재를 구원할 해방의 복음담론이 현실의 허물과 피로를 보상해줄 목가적인 장소로서의 천국으로 우리를 도피시킨다. 왜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일까? 장치도 장치지만 우리가 그러한 장치와 ‘공생’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장치와 주체’의 이중적인 공생관계에 균열을 낼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시대와 삶의 고착된 배열에 구멍낼 수있으며, 모든 사람이 생명을 품고 사는 새로운 룰, 새로운 언약관계를 만들어 낼 수있을까?” 시대진단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물음, 우리의 실천담론으로 이어진다.

 

2. 탈주 : 고착된 삶의 배열에 구멍내기.

 

삶의 배열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 안에 숨겨진 ‘고착된 배열’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의 3-6장에 걸쳐 우리 안에 숨겨진 고착들을 ‘앎’, ‘일’, ‘사랑’, ‘집’등의 우리의 일상의 익숙한 주제들을 엮어 우리의 고착된 사고방식에 구멍을 내려는 시도를 한다. 실제로 책을 읽으며 인상 깊게 느꼈던 점이 바로 이것인데, 저자는 우리의 사유 안에 깃든 익숙한 장치가 있기에 그 곳에 구멍을 내기 위해 독자들의 삶은 공감하면서도 그 사이로 틈을 내려고 부단한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민한 독자라면 우리 또한 저자의 논지가 때론 낯설기에 익숙한 세계를 떠나 저자의 논지를 따라 가야하는 사유의 훈련을 해야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중 나에게 인상 깊었던 점을 세가지정도 나눠보려한다.

 

첫 번째로 회복되어야 할 시선은 ‘차이를 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뭔가를 발견할 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 위주로 차이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시선에 숨겨진 장치에 의해 포획당했다. 저자는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도끼의 시선’과 ‘사색의 시선’으로 구별하는데, 먼저 ‘도끼의 시선’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안에 고립되거나 고착된 상태에서 꽂혀서 자기 목적, 자기 욕심, 자기 생각과 이기심으로 포획하려는 시선이다. 반면 ‘사색의 시선’은 어느 특정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전체의 관계망 속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이다. 떠다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은 원래 있었던 것이지 없던 것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깊은 사색을 통해서 주의 깊게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새로운 잠재성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고 우리를 초대한다. 마치 레비나스가 전쟁을 경험하고 나서 우리가 전체성이라는 폭력에 혈안이 되어서 타자를 자신의 동일성으로 포획해 왔다고 비판하며 현대의 타자철학을 열었던 것처럼, 깊은 사색의 타자성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것은 현실을 거부하는 ‘거리 떼기’가 아니라 현상 하나하나에 묶이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드는 일종의 ‘지향성의 전환’이다.

 

두 번째로 회복되어야할 시선은 ‘사랑이라는 감수성’이다. ‘사랑’만큼 우리의 동일성의 지축을 뒤흔들고, 새로운 혁명을 만들어내는 단어가 있을까? 저자는 우리의 내적 필연성에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시선을 확장하며 사랑이라는 담론을 끌고 들어온다. 왜냐하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타자가 와서 내 안에 있던 기쁨을 새롭게 배열하는 법을 알려주는 계기가 생겼다는 신호”(167p)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이전의 배열이 주었던 기쁨을 다르게 이어가고, 고통은 새롭게 재구성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앞서 말한 자신의 동일성과 이기심을 확장하는 기쁨을 일컫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거나 기대하는 내 안에 결핍된 것을 완전하게 채워줄,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안정을 추동하는 그런 사랑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특유의 방식으로 사랑을 재정의 하는데, 그것은 “빗줄기 속에 빗겨난 미세한 마주침”이란 은유다. 비내리는 풍경을 한번 상상해보자. 빗줄기가 중력의 관성에 의해 서로 평행하게 주룩주룩 내리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빨리 떨어진다 해도 ‘자신만의 속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관성적 운동, 즉 다만 중력에 이끌려 내려가는 것일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중력이나 관성에서 벗어날 힘이 우연히 일어나는 현상이 있는데, 이것을 학자들은 빗줄기 속에 미세한 빗겨남, 클라나멘이라 불렀다. 다음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사랑 또한 우리네 인생의 익숙한 배열로부터의 탈주가 마주쳐지는 순간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사랑은 서로의 욕망이 우발적으로 마주칠 때 그 틈바구니에서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빛이 드러날 때 사랑이 싹튼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기계적인 배열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빗겨난 다른 배열에 자신을 소속시키는 행위다. (...) 그러니 이별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새로운 배열과 창조의 가능성을 만나기 위해서 새로운 계기들을 만나자. 그리고 그 만남의 광장 속에서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각각 자기의 ‘내적 필연성’을 고집하지 말자. 내적 필연성이라는 것은 자기 삶에서 이미 흔적으로 형성된 고집스러운 주름들이기에”(p.168)

 

세 번째로 회복되어야할 시선은 ‘도래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우리는 세계 내에 내던져있는 존재라고.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을 주체적으로 뚫어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미 세계에 의해서 구성되어있고, 형성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습관, 언어방식, 삶의 태도는 처음부터 무색무취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눈 떠보니 만나게 된 부모님과 세계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습관화된 세계가 알아차려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습관화된 세계가 깨뜨려지는 순간, 그 세계를 지탱하던 방식이 무용해지는 순간이다. 하이데거의 그 대표적인 예로 ‘죽음’을 이야기 했다. 우리가 내일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오늘과 미래는 순간적으로 습관화된 태도를 벗어나 고유해진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습관적으로 지속되는 세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새롭게 형성될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는 죽음과 얽혀있는 삶의 역설을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해보고자 한다. 때때로 우리는 기존의 세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신에게 기도한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의 예수가 새로운 권력체계를 만들어 주는 길이라고 믿었다가 당황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 또한 무엇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는 믿는도끼에 발등이 찍힐 때 새롭게 도래하기 시작한다. 즉, 진정한 신과의 만남은 신의 대용품이었던 우상이 사용한 불가능한 지점으로 도래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과 습관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틈을 내려는 저자의 시도는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상적 장치에 대한 믿음의 순례를 요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은 본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드는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 우상은 그 당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환상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박치고 일어났다는 것은 어쩌면 장치에 포획된 현대사회에 새롭게 도래하는 제자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3. 이주 : 근원을 품고, 다시 세상 속으로

 

결론은 앞서 이야기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갈음 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기도원 n수생생활을 하시다 몸이 아프셔서 집에 앓아누우셔야 했다. 현대판 베데스다에서 낙오자라는 누명과 함께. 아버지는 한동안 집밖을 나오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아버지 자신은 부르심의 소명을 쫓아 기도하는 행위만큼은 놓치 않으셨다. 그렇게 20년이 지나도록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자문해 보았다. ‘도대체 기도가 기도가 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앙은 결코 힘있게 번영하는 ‘오르막 길’도 아니고, 모든 것을 비워내는 ‘내려막 길’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버지도 나도 안다. 삶은 결코 낭만적인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론 죽음과 얽힌 삶을 견디면서도 꾸벅꾸벅 걸어야하는 어떤 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에 일어난 아주 미세한 차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집앞에 우연찮게 놓여진 ‘베지밀’에 있었다. 몇년 전 우리 집 앞에 베지밀 사업장이 들어서면서 남아도는 베지밀 중 일부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아버지께 주어졌다. 아버지 그날로 곧장 베지밀 사업장에 가서 베지밀 10박스를 한꺼번에 사오셨다. 돈도 없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베지밀 박스를 구입하셨을까? 수소문을 해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베지밀을 사업주가 한꺼번에 싼값에 처분하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자신에게 달라며 한꺼번에 사오셨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20여년정도 몰아서 이젠 잔고장의 흔적이 난무한 98년식 카렌스에 베지밀을 빽빽하게 실어 넣으셨다. 그리곤 전주외각에 있는 양로원과 고아원을 방문하셨다. 때론 시골도 가셨고, 깊은 산골도 다니셨다. 그게 아버지에게는 기쁘고 신나는 일었던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유통기한이 지난 아버지의 사역이 너무나도 부끄러웠고 수치스러웠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한 고아원에서 감사의 의미로, 개고기를 해먹으라고 다리 한짝을 신문지로 돌돌말아 선물해오셨다. 꽁꽁얼려서 싸여진 개고기를 어떻게 먹어야할지 몰라서 화장실 대야에 닮고 놓았던 그 개고기는 시간이 지나자 썩어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는 그것을 잡수시려다가 어머니에게 호되게 타박을 당하셨다. 그렇게 나는 썩은 개고기를 먹는 집안의 자식이 되었다. 이게 내 삶에 주어진 유년시절이다. 내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와 삶의 배열들은 이러한 기억과 뗄레야 뗄수는 없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15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이제 나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것만 같다.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듯 탈주했으며, 똑같진 않지만 아버지와 같은 어떤 확신으로 정주했고, 이제는 다시 아버지와 같이 죽음과 얽힌 삶이라는 비극을 견디면서도 꾸벅꾸벅 걸어야하는 어떤 소명의 자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 누가 우리 부자의 고민을 알까?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눈에 아버지의 베지밀은 안타까운 사연이었을지 모르고, 효율과 성과라는 시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순간이나마 생생하게 살아있던 시간들은 그저 지나가는 풍경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아버지의 베지밀은 아버지 안에 숨겨진 내면의 신성이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봤다. 죽을 것처럼 아프고 힘들었어도, 자기보다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들을 위해 평생을 걸쳐 기도하겠다는 약속과 이행. 나는 이제 이러한 풍경이 결코 착취를 일삼는 소진사회에서 보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지향성.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도피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면서도 걸어가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망각이고, 도전이다.

 

“저는 썩은 개고기를 먹은 집안의 자식입니다” 이제 이 고백에 담긴 기억과 작별을 하려고 한다.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는 시간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고정된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틀대며 운동력을 일으키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주어진 배열들을 가만히 관조하자 비로소 나타났던 새로운 시선이고, 삶의 주름들안에서 피어난 뜨거운 감사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던 나의 고민은 나를 신학교로 인도했고, 종교철학과 인도했고, 지금은 진실한 공동체를 향한 꿈으로 나를 인도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수많은 타자들을 만나야만 했고, 그 타자들은 고집스러운 나의 삶의 배열에 구멍을 내는 순간들이었다. 이전의 패러다임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향해 용기를 내야하는 여정 속에는 아버지도, 베데스다도, 우정 어린 친구들도, 누구하나 배제될 것 없이 서로가 서로에 의해 구성되어 변해 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갈망’과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받았던 수많은 사랑들, 나는 믿는 자이기에 그것이 그 어떤 사회적 조건화에도 갇히지 않는, 장치들이 만들어낸 어떤 조건과 성과에도 갇히지 않는 ‘신성’이라 믿는다.

 

다소 내 삶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 길어졌다. 이 책이 부디 비극을 견디고 이제는 마침내 새로운 주체로 서서 다시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려는 무형의 독자들에게 희망의 말을 걸어오길 기도해본다. 만일 신이 대상적 형상이 아니라 갇혔던 시간을 해방시키고 변화시킬 수있는 힘과 사랑의 존재를 뜻한다면, 영원의 시간은 ‘지금, 여기’ 우리의 장치화된 시간에 틈을 내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 도래한/하는 시간에 작은 틈을 내어 전심으로 응답하게 될 때, 그때가 바로 우리 안에 포획되었던 야생의 영역과 신비의 놀이가 회복되는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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