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예배당인가? 인격공동체인가?

#. 교회는 예배당인가? 인격공동체인가?  

- 브룬너, <교회를 오해하고 있는가?>를 읽고나서

 

우리는 흔히 '교회'라는 말을 들을 때, 건물로서의 교회에서 펼쳐지는 '예배당'를 떠올린곤 한다. 실제로 성가대의 찬양소리와 성만찬과 세례가 시행되는 거룩한 장소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조금 시야를 넓혀 생각해 보아도 그리스도교의 교회들(그리스정교회, 로마카톨릭, 성공회, 개신교)은 모두 '건물로서의 교회'와 '거룩한 성례전'이 시행되는 '장소'가 곧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을 격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하지만, 브루너는 <교회를 오해하고 있는가?>라는 책에서 이러한 '건물과 전례로서의 제도화된 교회'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교회개념만큼 교회를 오해하게 하는 단어가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실제로 원시 공동체로서 예수 공동체는 건물로서의 교회를 주장하지도 가진적도 없었고, 신약성서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로서 '부름받은자'로 표현되었다. 즉, 원시공동체에서도, 신양성서의 교회에서도 근본적으로 교회는 제도적인 특징(성직, 성가대, 성례전, 교회법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가? 예수 공동체는 본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부름받은자, 말그대로 예배당으로서 기독교회, 교단이나 종파로서의 집단 이전에 예수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교제, 사귐으로 인한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독일어 신학용어에서는 교회라는 단어를 두가지로 나눠서 설명한다. 전자에서 말하는 '제도화된 교회'는 kirche로서 교회당, 예배당, 교파, 종파로 번역하고, 후자에서 말하는 '인격공동체'는 gemeinschaft로서 공동체, 사귐, 결합, 연대를 지칭하는 '인격들의 만남'이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격공동체와 제도화된 교회를 구별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화된 교회의 예배당에 더욱 익숙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오해하고 있는가?>란 책을 통해 브룬너의 문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문제의식은 인격들의 만남(geminchaft)를 제도화된 교회(kirche)로 착각하게된 그리스도교 역사를 지적하는 것이고, 그 해결로서 역으로 인격들의 만남(geminchaft)이 어떻게 제도화된 교회(kirche)로 변형되었는지를 관찰하고, 이를 통해 교회의 참된과제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클레시아, 즉 인격들의 만남(geminchaft)이 어떻게 제도화된 교회(kirche)로 변형되게 되었는가? 필자는 이책의 요지를 크게 세가지로 나눠서 재구성하여 본 책의 요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것은 '교회개념'에 대한 교정으로서 원시공동체에 대한 설명을 1)원형(form)공동체로 설명 한 뒤, 이것이 어떻게 역사 공동체에서 2)변형(de-form)되고 수정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할 인격 공동체에 대한 3)회복(re-form)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오늘날 우리의 자리에 터해 고찰해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돈은 단순한 교회개념의 혼란을 넘어 우리의 현실에 대해 다시 참된 교회됨에 대한 생각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1. 원형(form) : 생생한 사귐으로서 기적

 

교회는 제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가 하나의 유대교 종파로 부터 분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초기 사도들은 유대교적 '제의공동체'라는 주변의 시선을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은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를 형성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정결법과 음식 규정, 금지령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례'에 대한 규정이 유효한 것인지, 즉 '전통'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문제를 제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유대교와 겨우 결별할수 있었다. 다시말해, 원시 공동체의 시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제도와 전통'으로의 오히려 탈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공동체와 초기 원시공동체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간의 '사귐'과 '교제'의 회복에 달려 있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홀로 짊어진 혼자만의 사역과 비전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류, 즉, 죄인된 공동체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 의지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가시화되어 최종적으로 나타난 것은 단연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 사역의 정점으로수 십자가의 구속이었다. 우리는 종종 구속의 의미가 단순히 개인의 죄의 회복이라고 생각하는데 머무르는 경향이 있지만, 그 실상은 십자가에서 마침내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의 회복'이 그 핵심적인 초점임을 간과한다. 이는 다시말해, 에클레시아, 부름을 받은 자의 역사는 처음부터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심부터 시작하여, 신약의 예수 공동체를 거쳐, 성령을 통한 주님의 현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초청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고 있고, 지금도 성령안에서 백성과의 '교제회복'을 위한 당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계신다. 그렇기에 제자공동체의 정체성은 결코 '제도'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성령과의 사귐'에서 시작되었음을 에클레시아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의 역사적 원천이 명료화 된 시점은 오순절의 이적을 통해서이다. 사람들은 신앙인이 되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지만, 오순절의 역사를 보면 그것이 반대이며, 심지어 분리되지 않는 이야기란 사실을 알수 있다. 오순절 사건에 사람들은 모여 '성령의 부어짐'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부어짐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에 함께 '묶여있음'을 경험하였다. 즉, 오순절 사건에 있어 공동체는 우리의 함께 '묶여 있음'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 있여 존재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라는 깨달음으로부터 온 사건이었다. 서로 함께 '묶여 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묵여 존재함'이며, 동시에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줄과 함께하고자 했던, 교제, 에클레시아의 목적 그 자체가 된다. 다시말해 공동체의 기적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바로 이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자들을 묶어주는 본질이었다는 사실이 마침내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깨달음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며, 성령과의 사귐인 에클레시아를 '몸이라는 비유'를 통해 어떤 유기체적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도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즉 생물학적 이해가 아니라 '인격성'의 범주의 교제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공동체(에클레시아)는 성령과의 교제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함께 묶여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분과 우리는 머리와 몸된 지체로서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집단인격의 제도화된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입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구원 행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로 묶여진 교제의 존재이며, 서로 형재애을 나누며, 서로에게 돈과 물건, 시간과 능력, 안전과 삶을 나누는 현실을 살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그 시점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속박된 우리의 삶에 대한 미래지향적 희망, 그리고 다음세대에 결쳐 마침내 완성될 종말론적 실존에 대한 응답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즉, 우리는 성육하신 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와 '교회됨'의 과제는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2. 변형(de-form) : 제도화된 질서로서의 '교회'

 

교회의 변화와 발전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응답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서 출발한 것으로부터 더 많은 의미가 덧붙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까운 예로서, 우리는 예수 공동체 이후에 펼쳐진 사도공동체의 분열을 먼저 살펴볼 수 있다. 사도들의 공동체는 당시 크게 팔레스타인-예루살렘의 '베드로 공동체'와 요한공동체,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바울공동체' 사이의 논쟁을 교회 역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간략하게 말해 예수의 죽음 이후 증인된 삶에 대한 '권위'는 직접목격과 간접목격이라는 원사도와 속사도의 문제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공동체는 '사도의 권위'가 증인됨의 증표로 강조되었다고, 반대로 '바울공동체'는 사도들의 서열적 권위가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영적 권위'가 증인됨의 증표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할례를 통한 논증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결구도를 보편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화해 구도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 있어 증인된의 증표는 '성령 안에서 일어난 사귐' 그 자체였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전통 사이의 논쟁은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반복되는 씨름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사건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전통이 없이는 복음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성서보다 앞서 존재했지만, 원시공동체는 신약성서를 배출했고, 이러한 문서로 기록된 전통이 구전 전통 세계를 판단하는 기준과 보증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대 가톨릭교회는 '영지주의적 이단드로가 싸움'이라는 대결해서 이단과 대결하기 위한 하나의 통일된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사도를 계승하는 '감독제도'를 형성하는 것이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 데 필수적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신학적인 근거로 정초되었다. 교회의 씨앗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발전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12세 중반 그리스 정교회(동방교회)와 분리된 로마 카톨릭(서방교회)은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전개하기 이른다. 그들은 공의회와 신학적 합의를 통해 전통이라는권위가 곧 성서의 권위와 동일한 권위임을 밝혔다. 이 행보의 마지막 단계는 "교회가 전통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유일한 곳'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말은, 후에 교회의 가르침은 곧 교회 권력의 대리자, 교황으로부터 제정된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동방의 감독직이 바로 원천적이고, 사도적인 진리의 보증이라고 여겼고, 더 나아가 서방의 교황법은 제도가 전통에 승리를 거두었고, 제도는 사도적인 진리의 보증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을 의미했다. 이제 전통이라는 개념은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채, 더 이상 원천에 되돌아가는 증언의 연결고리가 될 수 없었다.

 

한편, 동방과 서방교회의 이러한 '제도화'는 그리스도교인의 양적 팽창이라는 또다른 요인 속에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초기 원시공동체의 영적인 조직체는 그리스도인의 기하급수적인 양적 팽창과 지역교회와 종파들의 확장으로 인해 또다른 국면을 맞이해야 했다. 초기 원시공동체의 종말론적 재림을 향한 긴장은 역사속에서 무기한 연기됨으로 인해 생기는 긴장관계의 완화와 구원에 대한 보장을 성직을 통해 확보하려는 교인들의 요청 사이에서 긴장을 낳았다. 따라서 동서방의 교회는 점차 초기의 '영적인 조직체'로부터 교회의 안정화를 위해 '법적인 조직'화로 이어져야만 했다. 이것은 후에 영적 약화가 어떻게 성만찬주의와 제도주의로 뒤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배경을 형성시켜주었다. 즉, 성직자와 교회를 통해 구원이 주어진다는 인식은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교회이미지를 점차 다른 방식으로 왜곡 시켰다.   

 

3. 회복(re-form) : 인격적 교제로서의 '공동체'

  

따라서 개신교의 등장은 '제도화 된 서방교회'와 '고착화 된 동방교회'의 전통 사이의 왜곡에 대한 새로운 응전이었다. 보이는 교회를 통해 '성령의 교제'를 완성하려는 가톨릭의 '집단주의'에 대항하여 개신교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 칭의사건으로 인한 '내면의 성소, 개인의 변혁'을 제시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에클레시아는 결코 어떤 사물 도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인격성', 한 백성, 그리고 하나의 모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명 "원천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 아래 펼쳐진 계획이었지만, 1500년 역사가 이 슬로건 하나에 단순히 되돌려 질 순 없었다. 이미 교회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했고, 역사 안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말론적 증인된 삶의 사명에 대한 과제를 그리스도교가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회복(re-form)'과 대화의 단초를 확인할 순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모든 증인됨의 역사는 교회의 제도적인 완성을 향해 진행중인 역사라고 생각했다. 즉, 신약성서에서 등장하는 에클레시아(공동체)가 그 자체가 자기목적으로 완성된 것이지, 다른 목적 선교를 위해서 밖으로 나가야 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교회가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반대로 개신교는 교회는 하나의 '외적인 제도'이며, 구원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목적을 갖지 않고 오히려 목적을 위한 수단(이를테면, 선교를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공동체), 즉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브룬너는 이 양자 모두 에클레시아(공동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에클레시아는 순전히 '인격 공동체'(geminchaft)이다.  만약 개신교처럼 '보이지 않는 교회'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친교의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칭의를 향한 '선택된 자들의 수'를 의미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가톨릭 '보이는 교회'로 한정한다면, 그것은 사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제도, 집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즉, 개인주의나 집단주의 모두 서로 나누는 교제인 '그리스도 공동체'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kirche)라 불리는 제도화된 특성을 갖는 다양한 역사의 모습들이 다시 에클레시아, 그리스도 공동체(geminchaft)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관계가 필요할까? 그것은 흔히 말하는 성도의 교제, 믿는자들의 모임이 단순히 '옆에 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서로 묶임'의 사건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가 제도화된 틀로 여기는 세례와 성만찬의 본래적 의미도 제도 이전에 이러한 '인격성',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성만찬은 처음부터 주님이 겪으셨던 죽음의 고난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이 자신의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 거행했고, 공동체가 십자가를 바로 앞두고 베풀어졌던 최후 만찬의 의미가 성만찬의 기원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십자가에서 죽음을 극복하신 것이 그분의 죽음이 주는 화해보다 더 크다는 것을 다시 중심에 놓아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빵을 '기쁨으로' 떼었다. 다시말해, 공동체는 만찬식을 거행할 때, 그들은 부활하신 이의 살아있는 임재를 '인격적인 만남'으로 체험하는 것이 성만찬의 본질이었다.  세례역시 마찬가지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당의 교인이 되는 것 이전에 세례를 통하여 개인이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의 죽음에 참여함에 동의한다는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은 세례를 통해서 백성의 죄를 대리적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예수의 죽음과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의 몸에 속하게 된다. 즉, 성만찬과 세례는 어떤 제도적인 추측과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현실에 대한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에클레시아는 결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본래 신성한 교회법에 관하여 아무것도 앚리 못했다. 즉 에클레시아는 제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개혁을 통해서든,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통해서는 교회가 에클레시아가 되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에클레시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의 과제는 교회가 에클레시아가 되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것이다. 신약성서를 통해서 드러난 에클레시아의 본질 그 자체가 에클레시아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교제와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제가 바로 에클레시아였다. 그리고 동시에 에클레시아를 이루고 있었던 거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형제와 갖는 교제가 전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본질의 결론이다.

 

결론 : 더불어 함께 있음과 행함의 공동체

 

우리는 되어짐의 과정에 있는 에클레시아를 꿈꿀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지니고 있다. 만약 사랑의 교제, 자기자신으로부터의 탈존, 서로에게 속함이 에클레시아의 기준이라면, 교회가 에클레시아에 가까이 있는지, 또는 멀리 있는지는 신약성서에서 증언하는 에클레시아에 의해서 금방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만약 가장 공식적으로 확정된 가르침이 교회의 지체들을 진정으로 살아있는 예수의 제자로 만든다거나, 교회가 스스로 하나의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한 그것이 본질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역사를 통해서 형성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본래 그리스도교와의 '교제'라는 독특한 형식을 쉽게 간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이상은 인간의 구원을 향한 '안정성'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람들은 무언인가 무정부적이지 않는 것을 찾는다. 그것이 공산주의라는 세속적인 무신론의 모습을 갖고 있든, 또는 거룩하고제의적인 교황교회의 모습을 갖고 있든 모든 흐름은 전체주의적인 집단주의로 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 둘의 형태 안에서 안전을 구한다. 개인이 지는 마지막 책임성에서 해방되는 바로 그 '안정함'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하고 깊은 교제의 요청을 오해했다. 그래서 친교와 현상적으로 비슷한 집단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치 않은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유'이며 동시에 '묶여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인간과 화해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만이 자유롭다. 아버지께서 이끄는 '아들을 통하여' 진정 자유로운 자는 또한 동시에 진정으로 묶여 있는자며, 결속되어 있는 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런 묶임을 통하여 진정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는 단계에 묶여 있다. 그래서 이런 묶임을 통하여 결속된 사람, 공동체는 자신을 깊고 내적인 연결에참여하는 사람들과 연결하데 자신을 내어놓는다. 즉,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께 속한자는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사역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구속된 자유와 자유로운 구속,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약성서의 공동체는 만난다. 자유는 ~으로부터 자유한 "홀로있음의 고립"이 아니라 ~을 위한 자유로서 서로 속해 있음 "함께 있음의 공동체"에서 그 본질이 진정으로 드러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에서 자유와 속함을 발견한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자!라는것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에 대한 오해가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의 일치된 구조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약속을 다시금 우리의 기억속에서 불러일으키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안에서 하나된 '거룩한 자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 그것은 단순히 옆에 있음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와 종말에 이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의 증거이다. 브룬너의 마지막 주장을 인용함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또는 교회없이, 필요하다면 교회에 반대하여 일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민족이 형제애를 나누는 곳으로 이끄실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에클레시아'이다. 교회가 이런 인식에 열려 있는가 또는 닫혀 있는가에 바로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 -에밀 브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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