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를 읽고나서

#.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를 읽고나서

 

종교적 체험이 없는 종교가 가능한가. 인류 역사상 다양하게 펼쳐진 종교적 현상은 논란의 아이콘(때로는 극단적, 때로는 현학적)이기도 했지만, 종교적 경험의 증언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종교적 본질 중 하나이다. 우리는 때때로 회심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놀라운 간증을 듣고, 더 나아가 환상과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거나 천국과 지옥을 다나왔다는 증언을 의심어린 눈빛으로 흘겨 듣는다. 심지어 이러한 신비체험은 종교적 창시자나 영적 구도자의 모습에 이르러 때때로 광기어린 형태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환상을 보는자나 병적인 거룩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소위 종교적 천재들이 보이는 괴팍스러움, 정신이상적 기질, 병적 충동, 강박증과 망상처럼 여겨지는 행동을 관찰할 수 있다.

 

1. 종교적 경험, 신비인가? 망상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것은 초월적 ‘신비’현상인가. 병적인 ‘망상’현상인가. 만일 그것이 단순한 인간 신념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어떤 ‘초월적 감수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인가? 윌리엄 제임스는 그의 책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바로 이러한 문제에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단순히 치부한 ‘저 광기어린 종교적 감수성’은 왜 연구되지 않고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만일 우리가 이러한 종교적 천재들의 경험을 단순히 인간의 생물학적 혹은 기질적 특성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본 환상을 ‘후두골피질’의 장애현상으로, 성 테레사를 ‘히스테리 환자’로, 그리고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유전적 퇴행성 환자’로, 자기가 살던 시대의 거짓에 불만을 느껴 영적 진리를 갈망했던 조지 폭스를 ‘결장 질환자’로 설명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설명이 ‘종교적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게 정당할까. 우리는 종교적 본질을 논하면서 무언가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너무나 섣부르게 ‘신비’로 치부하거나, 토론하기를 꺼리거나 곤란한 일로 처리하기 바쁘다. 하지만 종교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종교적 체험의 자리에서 유리된 채 철학적 ‘원리’나 ‘논리’의 본질을 통해서 종교적 의미를 연구하려는 시도야 말로 진정한 종교의 의미를 더욱 표류하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우리는 종교를 가능하게 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더욱 공정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가 보기에 ‘종교현상’은 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언제나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상이므로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그물로 그렇게 쉽사리 붙잡힐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경험은 때때로 매우 개인적인 ‘양심의 갈등’, ‘구원받았다는 확신’, ‘피조물적 무성’, ‘공포와 전율’, ‘공허감과 고양감’, ‘실존적 불안과 물음’을 동반하지만 바로 이러한 인간 개개인이 표현해내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야말로 종교 자체가 기인하게 된 원천과 근원이라 본 것이다. 이처럼 보편적 기준에 매여 표류하는 독자들에겐 일침을 가하는 저자의 주장은 한켠 매우 도전적이다. 다시말해, 제임스는 기존의 종교연구들을 비판하며 궁극적으로 ‘성스러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우위를 두고, 오히려 그 밖에 다른 요소들(교리, 신학, 철학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봐야 종교적 의미 보다 공정하고,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종교체험의 현상학

 

오해의 시작이 종교적 경험이니 그 경험을 맞갖게 정초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는 문제해결의 전략으로 연구자 자신을 공정한 재판관이자 한발짝 거리를 뗀 객관적 관찰자로 위치지으려 했던 저자의 시도가 엿보인다. 왜냐하면 종교적 현상과 관련해 보여지는 모든 연구에 있어 선험적 가치기준’(판단기준)을 갖고서 접근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명 종교체험의 현상학처럼 보이는 그의 전략에서 종교적 삶의 현상의 이해의 단초는 이해(판단)하기 이전에, 현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서술하는 것이다. 실제로 620페이지에 달하는 이 묵직한 책의 반 이상이 수많은 종교적 고백과 경험사례로 채워졌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저자는 이러한 실제 사람들이 겪은 사례들과 특징들을 최대한 판단중지하여 나열한 뒤, 그러한 현상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인간의 본성의 숨겨진 영역이라 여기며 그 나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종교적 경험의 목적을 자아의 분열통합과정의 변증법으로 보는 부분은 주목할만 하다. 저자는 분열과 통합현상을 관찰 한 뒤, 인격의 내면 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분류한다. 하나는 의식적이지만 현실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이지만 매우 이상적 자아이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자아는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투쟁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평화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하나의 자아다른 하나의 자아를 억압하고 있는 상태가 보이지 않는 실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만일 현실적자아이상적 자아를 억누르면 평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실질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상적 자아를 누르고 있어서 심연의 깊은 고통을 동반하는 형태를 나타내고, 반대로 이상적 자아현실적 자아를 억누리게 되면 황홀감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 도피적 삶의 형태를 나타낸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그 분열되어서 상호투쟁의 관계에 있는 자아를 통합하여 조화로운 상태, 즉 평형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종교적 경험의 목적이라고 명명한다. , ‘회심사건은 가치판단을 배재하려는 공정한 관찰자를 자칭한 저자에겐 분열된 자아의 상호투쟁의 종결하는 사건으로 서술될 따름이다. (이밖에도 지나치게 낙관하는 성품을 지닌 종교인, 지나치게 고뇌하는 영혼을 지닌 종교인의 세계관 이면에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서술 또한 이러한 객관적 관찰로서 분류되고, 시사하는 바가 있다)

 

3. 제임스의 선택, 보편적 인간의 잠재의식.

 

끊임없는 관찰, 저자는 그저 공정한 관찰자이자 나열자인가. 아니다. 그는 공정한 관찰자이지만, 종교학자로서 공정한 연구가이길 바란다. 공정한 연구가는 관찰결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저서의 말미에 본능이 이끌고, 지성은 단지 이를 다르고 있을 뿐이다라는 선언은 제임스의 관찰이 한발짝거리는 뗀 부분과 반대되는 한발짝 거리를 붙여 말하고자 하는 그의 입장을 주목하게 한다. 종교적 본능, 인간의 잠재의식에 주목하는 그는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 그 자체보다, 그 만남이 일어나는 장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집중한다. 번역자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은 의식적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문을 통해서만 일깨워진다는 경험적 가설을 자신의 입장으로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전통 안에서 신의 은혜가 어떤 신앙인에게 기적으로 종교적 경험을 갖게 해주었다면, 그 경험은 반드시 잠재의식의 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타종교적의 종교적 경험 또한 매우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할지라도, 그 경험이 일어나는 장소는 똑같이 인간의 잠재의식이라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임스는 이 잠재의식이 반드시 종교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비종교인들에게도 종교인들이 느끼는 환상적’ ‘황홀한느낌을 인간의 잠재의식을 통해 나오는 종교적경험이라 명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 제임스는 앞선 관찰들을 분석한 뒤, 그러한 특성을 보편적 인간의 본성의 차원에까지 끌어올림으로서 우리가 신비와 이상 징후로 치부한 신비체험을 오히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잠재된 인간의 본성, 종교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론 : 순수 성인다움 비판, ‘보편을 넘어 효용으로

 

우리도 제임스처럼 관찰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종교적 경험들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판정할 잣대는 어쨌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예속 되어 있다. 그와 같은 특질은 대부분 한쪽으로 치우치고, 과장되며, 강력한 종교적 경험들 속에서 가장 알아보기 쉽게 나타나지는 또한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기괴스럽고,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가 순수 성인다움 비판이라는 표현을 쓰며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보존함과 동시에 비판하는 부분은 나의 이러한 의문을 해소시키는 부분이 있다. 예민한 독자라면, 알 수 있듯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보편적 인간의 이성의 권좌를 면밀하기 관찰하기 위한 노정이다. , 그것은 이성을 거부하고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와 범위, 그 기능을 명확히 판가름하자는 데에 있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순수 성인다움 비판>은 성인들의 종교적 현상을 거부하고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종교적 현상들을 볼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한계와, 범위 그리고 그 효용을 면밀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보편적으로 성인의 경지에 나타나는 현상을 몇가지 공통점으로 나열한 뒤, 그 균형과 효용에 대해 종교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성인다움은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힘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종교적 경험을 해본 사람은 이기적인 삶보다는 그 삶을 포기하면서가가지 언제나 그 이상적 힘의 영향을 인식한다. 둘째로, 성인다움은 그 이상적 힘의 요청이 언제나 순종하는 삶의 형태를 지향하는데, 이는 종종 금욕적인 삶, 안정된 영혼상태, 타협하지 않는 영적 순결를 지향하는 양태를 지니곤 한다. 셋째로, 성인다움은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와는 달리 무한히 자유스럽고 고양된 듯한 느낌을 갖는데, 이는 분열, 부조화, 미움의 감정에서 조화, 일치, 사랑의 감정으로 전이를 관계 속에서 나타내곤 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이 의식과 잠재의식의 균형을 이루어 보다 조화로운 인격을 만들어간 성인다움의 가치와 효용이다. 반대로 만일 이러한 균형이 흐트러진 채, 종교적 경험을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여 영적 흥분을 지성적이고, 의지적으로 순화시키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매우 광신적인 형태를 띠게 되어 자신의 경험과 다른 어떤 경험도 용납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그 인정한 범주와 한계를 효용이라는 사회적 가치에 두고 판별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만일 그 종교적 경험이 종교적 삶과 사회를 풍요롭게 가치지을 수 없다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글을 정돈하며 나와 같은 무명의 독자들에게 나 역시 묻고 싶다. “여러분은 어떠한 종교적 경험을 하셨습니까라고. 만일 여러분이 지닌 무언의 직관들이 합리주의의 결과들과 상반된다면, 합리주의는 여러분에게 확신을 주거나 여러분을 회심시키지 못할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러 말하자면, “여러분이 직관들(잠재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직관들은 합리주의가 서식하는 떠들썩한 의식적 수준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여러분의 본성의 보다 깊은 수준에서 터져 나오는 신호다.(그것이 초월자에서 의해서이냐, 인간에 의해서이냐는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저자는 경험이 일어나는 장소를 말할따름이다. 그런의미에서 그는 끝까지 관찰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이다) 따라서 합리와 비합리, 그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종교적 경험에 대해 공부하길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1독을 권한다. 왜냐하면 욥기의 고백,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4:5)라는 말은 성경학자가 아닌 이상 현 학문계, 즉 신학계나 종교철학, 종교학계에서 때때로 논쟁가치가 없는 신앙고백으로, 때때로 알 수 없는 신비의 미궁으로 취급되며 진전 없는 토론만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우리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너머, 모르는게 얼마나 모르는지 조차도 모른다. 종교적 경험에 대한 연구는 이처럼 면밀하지만, 정직한 학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p.s 만일 독자중 윌리엄 제임스의 중립적인입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2차 독서로 다른 책을 권할 것 같다. 종교적 체험을 더욱 줌인(zoom in) 하여 체험적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윌리엄 제임스를 너무나 경험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한 나머지 그 잠재의식 자체에 들어있는 인식의 성향이나 관념들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한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추천한다. 그는 누멘적 감각(전율과 황홀)이라는 개념으로 종교적 감정이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며, 비합리적 합리성을 거쳐 우리에게 이해됨을 탁월하게 설명했다. 반대로 종교적 체험을 더욱 줌아웃(zoom out)하여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나는 추천을 할 수 없을 것같다. 현대는 체험’(언제/어디서)의 자리가 없는 합리는 공허한 메아리라고 일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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