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방법을 읽고나서

#. 진리 vs 방법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서 읽었다. 제목만 두고 보았을 때 혹자는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혹자는 어떤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것 같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깐. 오해를 줄이기 위해 결론부터 미리 앞질러 이야기 하자면, 이 책은 앞서 말한 그런 "진리에 이르는 방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방법으로는 결단코 이를 수 없는 진리사건"을 철학적 '인식론'에 범주에 터해 비판하는 책에 가깝다. 철학의 탐구는 신학적 탐구와 달린 '신'을 상정하기 보다 '보편'을 상정하고 있다는게 타당할 것이다. 만일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구별없이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진리, 즉 엄정하고, 선입견이 없는 동의를 최대한 이끌어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의무라면 의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참된 인식, 즉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그 자체로서의 사태를 말한다. 가다머는 이를 "이해의 사건"이라고 표현했고, 참된 인식(진리)은 바로 이러한 사태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제목에 대해 한마디 더 해 보자면, 앞서 진리가 종교적 진리가 아니듯, 뒤에 '방법' 또한 단순한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민한 독자라면 이말이 "방법"에 초점을 맞췄던 근대철학 전체에 대한 저항을 가리키는 가다머의 전략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다. 근대철학은 "우리는 참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방법"에 침잠하여 참된 인식, 진리의 사건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가다머는 대상세계를 주관으로 잡아채어 '인식'했던 인식론의 방법론으로, 결단코 주객관계를 넘어서서 일어나는 '이해'라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의미에서 가다머에게 진리의 복원은 근대시대의 철학적 방법론으로서 '고정된 실체'를 끝내 파악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인간 경험에서 일어나는 '이해라는 사태'에 참여하는 사유방식의 전회를 일컫는다고 봐야한다. 진리는 파악되고, 잡아채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일어나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하고 소화하기란 쉽지가 않았다.(또 방대한 서술 속에 표류하며 내가 왜 이걸 읽고있지란 생각이 이따금씩 들기도 했다) 다만, 배웠고, 인상깊었던 키워드 몇개정도를 정돈함으로서 자꾸 휘발되는 개념들을 다시 상기하고, 꺼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각설하고, 첫번째로 내게 인상깊은 개념은 '감지력과 놀이'라는 개념이다. 감지력은 근대철학의 '이성'과 같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지력은 주관바깥에서, 삶의 구체적인 정황속에서 '그때그때 마다 주어지는 감각'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인식이전에 참된 인식이 일어나는 사태를 마주하며 어떠한 공통감각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술작품을 작품할 때, 우리는 어떠한 작품자체로부터 일어나는 '생기'를 경험한다. 그것은 작품의 감상자의 '파악'에 국한되고, 제한되는 경험이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사태'를 말한다. 즉, 예술적 감정과 감지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어떤 보편적 소질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보고 기억을 간직하고, 망각하고, 그리고 다시 상기하는 것은 (개별인간의 성질로서의 보편이 아니라) "고전은 늘 새롭게 고전이다"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 인간의 어떤 역사적 구조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의미에서 "놀이"라는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다머의 전략적 예로서 놀이개념은 칸트가 예술과 미학의 측면을 '주관의 감상'의 측면으로 환원함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사태에 본의를 쉽사리 놓쳐버린다는 점을 꼬집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의 주체는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다. 놀이는 다만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표현될 뿐이다. 이것은 놀이의 주체가 놀이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이 향유하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놀이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들임으로써 놀이 활동의 주체가 되게한다. 놀이는 말하자면, 어떤 목표에 도달하면 곧 끝나버리고 마는 '파악'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 의미가 형성되는 어떤 '운동과 반복'을 말한다. 이는 칸트가 미적 판단력을 선험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말한다. 칸트에게서 참된 미학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지만, 가다머에게는 철저하게 주관화됨으로서 '생기'를 읽어버린 '예술경험의 사태'에는 '인식'아래 짖눌린 '이해와 해석'의 세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두번째로 인상깊은 개념은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이다. 근대의 사변철학의 방법론에 대한 저항은 한편, 자연과학적, 실증주의적 방법론으로 펼쳐졌다. 하지만 가다머에게 자연과학의 방법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대상세계를 관념의 산물로 구상되서도 안되지만, 대상세계를 죽은사물의 실험체로 볼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모든 사물들을 대상화하고, 원자화함으로서 사물자체를 원자화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가다머가 보기에 그러한 상황은 '지평'을 망각한 사태나 다름없다. 일찍이 딜타이가 자연과학에 대한 대립각으로 '정신과학'을 제시했다는 점을 가다머는 높이 평가한다. 즉, 인문, 예술, 철학은 자연과학적인 방법론과는 다른 '삶의 체험'에 일어나는 독특한 사유방식을 지닌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가다머는 딜타이가 여전히 '자연과학'의 대립각으로 '정신과학'을 말했다면, 이 역시 '방법론'에 대한 '방법론'으로서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가다머에게 " 이해라는 진리사태"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사태는 자연과학과 정신과학과 같은 분과 학문의 방법적 구별보다 더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사태이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이 이해에서 출발하듯, 그 이해는 무색무취의 상태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식의 기대지평을 늘 염두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모르는 세계를 탐구할때, 어떤 나름대로의 기대지평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것은 자신의 옛 경험에 대한 상대적인 추측에 깃대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지역과 나라의 정서에 깃대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적 지평에 깃대어 있기도 하다. 즉, 우리는 선입견(그것이 좋은 선입견이든, 나쁜 선입견이든)을 가지고 무언가를 접근한다. 이를 가다머는 '선이해의 구조'라고 부른다.

 

따라서 선이해의 구조는 우리를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과거없이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없이 과거의 사태를 만나지 못한다. 즉 가다머에게 이해란 인식의 기대지평이 '과거와 현재가 부단히 상호매개 작용'을 끊임없이 하면서 이루어진다. 마치 예술작품과 놀이에서 일어나는 '생기'가 진리의 사태이듯, 과거와 현재의 마주침에 일어나는 과거'이해'와 현재'이해' 간의 대화가 일어나는 '역사적 대화'가 이제 진리의 사태가 된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특정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구조가 그렇다는 점에서 사유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존재론적인 인간이 그렇다는 실존적 사태를 말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다. 그런의미에서 가다머는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간"을 필두로 해석학을 모든 철학의 제 1철학의 지위로 내세운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을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순환속에서 살아가고, 살아내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인상깊은 개념은 '선입견과 겸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학은 '하나의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임없이 펼쳐지는 '하나의 진리'라는 동경은 오히려 우리의 이해를 왜곡시키는 전범이다. 우리는 선입견을 제거한 절대진리의 세계를 동경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선입견의 지평이 끊임없이 '이해의 진리사태' 속에서 주체의 선입견을 허물어뜨리고, 수정하며, 다시금 확장되어가는 사태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의 이해가 선입견이 없는 무결점의 진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해석의 길을 가로막는 폭력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해석학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지, 천사의 학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편견이 없더라도, 그 말을 드는 인간은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런의미에서 해석학은 우리는 '겸손'하게 한다. 뭔가 더 나은 해석, 뭔가 더 개연성이 높은 해석은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해야하는 동경이겠지만, 그것 자체의 완결을 상정한다면 여전히 다시 우리는 다른 무엇을 꿈꾸는 것이고, 또다른 폭력을 양성할 것이다. 어쩌면, 현대는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다양성이 함께 어울러지는 '참여'를 원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참여가 절대진리가 없는 상대주의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가다머는 우리의 상대적 해석이 결단코 '선입견이 없는 해석'이라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오직 겸손한 주체와 겸손한 주체가 자신의 선입견을 서로 마주하며 허물고, 수정하며, 확장해 나가며 역사와 세계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이후의 전개되는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으로서 언어에 대해서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다만 현대철학이 왜 '언어'라는 담론을 중요시 여기는지는 가다머의 이전논의를 통해 충분히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참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언어는 해석학적 경험의 지평이 펼쳐지는 사태이기에 '이해의 역사성'을 언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철학적 해석학을 공부할때 마다 문득 새롭게 떠오르는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고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서 '신학'의 지평을 넓히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나역시 그러한 지평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접근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만일 '이해의 지평'에 있어서 계시로서의 지평, 성령의 감동하심으로서의 영감을 신학이 말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이미 철학적 해석학이 말하는 지평과 나란히 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보편적인 학문에 대한 진솔한 탐구가 아니라는 특정 종교에 국한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권위주의적 해석'일 따름이다. 이 말에 정직한 학자라면 항거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더 정직하게 우리는 특정한 입장을 가지고 있고, 그 특정한 입장을 통해 당신네들을 통찰을 빌려오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다시말해 철학자들은 '참'이 무엇인가라는 보편지평에 대한 진지한 겸손이 있다면, 신학은 '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특수지평에 대한 겸손이 있을 따름이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적용, 차용 내지는 대화를 할수는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도착지로서의 겸손까지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할 이유도 없을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대로 한마디 더 곁들어 보고 싶다. 신학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에 학문적 교집합이 없더라도 '겸손'이라는 상징은 태도적 교집합이 될 수 있을거라고.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방법아님, 진리사태임"을 가리킨다. 방법저편으로서의 진리사태, 방법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해지평과 대화를 말했듯, 신학 또한 다양한 신학방법론을 진리의 척도로 삼지 않고, 방법저편으로서 진리사태를 향해 서로간에 겸손한 대화와 학문적 정직함을 갖추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그 선입견은 진리사태 속에서 수정되고, 확장되며, 마침내 새로워진다. 역사적 지평과 현재의 지평과의 만남은 그런의미에서 새로운 사태 속에서 우리를 놀이자체에 참여하게 한다. (그런의미에서 설교는 진리'제시'가 아니라 진리사태에 대한 '참여'하는 사건이 아닐까) 놀이하는 주체들이 대화하는 곳, 즉, 해석학적 경험은 살아있는 '생기'를 향해 열려있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묻게 해준다. 20세기 정신사의 정수를 담은 기념비적 저작 <진리와 방법>, 일독을 권해볼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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