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에게 솔직히

 

은어중에 '솔까말'이라는 말이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라는 말의 약자인 이말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친구에게, 동료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때 쓰이곤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와 짝을 이뤄 읽어본 길희성의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라는 두 책은 바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솔직히 까놓고 한 목사(감독)와 한 교수가 자신의 신학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허심탄회하게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관심을 갖고 추적하는 솔까말은 '위에'계신 내지는 '밖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통적인 신관에 대한 의심이다. 이들은 자신의 서술이 누군가에게는 이교도적일지언정, 자신의 정직성을 유지하려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고해성사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에'계신 하나님에 대한 상상력과 상징에 익숙해 있다. 그것이 믿을만한지 안한지는 둘째문제다. 우리는 교회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을 뿐이고, 기독교의 문화가 그러한 분위기를 연출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우리는 우리의 현실의 문제를 뚫고 들어오시는 저 '밖에' 계신 하나님을 찾기 위해 기도하기도 하고, '위로'부터의 임재를 기다리는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두 저자는 하나님은 '저 밖에' 혹은 '저 위에' 있는 분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을 하늘 저쪽에 있는 또 하나의 실체론적 '타자'로 생각할 뿐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으로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우려이다.

 

그렇다. 이들의 주장은 '높이'의 신이 아니라 '깊이'의 신으로 그 방향성을 돌리자는 데 있다. 이들은 정직히 고해성사하건데, 높이의 신을 '깊이의 신'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신앙-신학적인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신자와 비신자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 신을 만나고자하는 태도, '종교적 선험성'이 있음을 보다 맞갖게 설명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한예로, 이들이 지지하는 틸리히의 설명은 이들의 주장을 간명하게 뒷받침해준다. "여러분의 삶의 깊이나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이나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사나, 여러분이 무조건 중대하게 여기는 것에 관해 말해보십시오. 모든 존재의 이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바로 '신'입니다. 신이란 바로 그 깊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삶은 깊이가 없다던지, 삶은 천박하다든지, 존재자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만일 아주 진지하게 그런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무신론자일 것이다. 하지만 깊이를 아는 사람은 틸리히에 의하면 이미 신을 아는 자이니다. 비록 느낌적인 느낌일 망정말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초자연주의 신관(위로부터)이나 무신론적 자연주의(아래로부터)는 바로 이러한 신의 초월성과 신비를 어느 한쪽에서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두 저자는 초월과 현실을 둘다 필요할 지언정, 차라리 내재적 초월을, 자연적 초자연주의를 주장하는게 낫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내재적 초월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작이 '초월'이 아니라 '내재' 혹은 현실, 즉 일상에서 시작되야 함을 강조하는데 있다. 한 예로 본회퍼를 들어보자. 본회퍼는 그의 생애 말년에 "종교없는 그리스도교"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며 자신의 제자 베트게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이제까지 교회는 종교적인 경험, 즉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 속으로는 어떤 모양의 종교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기를 바칠 수 있는 어떤 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을 필요하다는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을 전해왔어,.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성인이 되어버린 미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도 없이, 개인의 구원에 대한 염원도 없이, 죄의식도 없이, 그 따위 가설의 도움도 없이 버젓이 살아 갈 수 있다고 된다면 말이야. 그리스도교란 이러한 부족함이나 신이라는 공백을 필요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될까?"

 

신이 없는 시대에 신과 함께를 말했던 본회퍼의 대답은 급진적이다. 즉 전례도, 설교도, 예배당도 없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지표는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나사렛 예수가 우리를 위해 전적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낸 것과 같이 우리 또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될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했다. 본회퍼에게 신이란 신의 전능 따위에 대한 추상적 신앙이 아니었다. 순수한 신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였다. 이것은 '저 위'나 '저 밖'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한복판에서 오직 남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경험이 곧 초월(신)의 경험이었다.

 

우리는 초월의 성격을 우리의 손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어떤 과제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저자는 가장 가까이 있는 '너'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취한 신을 만나고, 우리가 궁극적 관심을 쏟으려 하는 존재의 기반의 깊이 아래서 초월적인 것에 근거를 둔 신성을 만난다. 즉 남을 위한 삶을, 사랑으로 실현할 때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세계가 지닌 지평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세속적인 거룩함을 주장한다. '종교적'이란 말과 '세속적'이란 말이 따로 또는 반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한가운데, 지극히 통속적인 것 안에 있는 거룩함을 주장한다. 만약 성만찬이 혹은 개인적인 경건생활이 '저 밖에 있는 신'과 교제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면, 이것이 바로 종교의 타락이다. 우리는 '신과 함게 있기' 위해 이 세상으로부터 피해 '저 너머'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나 예전을 통해 지극히 통속적인 것 '안에' 차안의 깊이로 계시는 그분의 뜻을 새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세속적인 것은 삶과 분리된 신이 없는 삶의 한 부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깊이로부터, 그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분리되고, 이탈된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은퇴하려는 것도 아니다. 예배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통송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둟고 그것을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기자신을 열어 놓자는 것이다. 예배의 기능은 '높이'의 피안이 아니라 '깊이'의 차안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 이 세상과 다른 사회에 대한 여러 근시안적 관심사(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 좋아하는 것, 한정된 결단 따위)로부터 궁극적 관심사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초점을 두고, 이것을 날카롭고 깊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화해했고, 현재도 화해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이뤄진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은총과 능력으로 발견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예배다.

 

저자의 주장들을 보며 또다시 '피안'이 아니라 '삶의 중심'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솔까말 나도 이런 피안적 상상력을 좀처럼 벗어던지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틸리히의 '새로운 존재'의 개념으로도, 본회퍼의 '비종교화'의 개념으로도, 불트만의 '비신화화' 개념으로도 전통적인 '위로부터' '저밖으로'부터의 감성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나를 본다.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러한 신학적 사유가 단순히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과격하다고 말할 순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은 '종교적인 틀'을 개조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정 두 저자가 평생을 끙끙 앓며 신관념을 숙고해보고자 했던 진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일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초월성과 내재성이 지닌 긴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안에 건조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유의 경직함을 그분 안에 정직하게 내어드리는 것이다. 신학은 그런의미에서 '신에 대한 신앙'이전에 신에 대한 한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즉, 신관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인정함에서 신학은 시작된다. 우리의 눈이 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을때, 점검을 요구받지 않아도 될때, 신학은 왜곡된 의미에서 인간학이 된다. 참으로 겸손을 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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