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맘슨 <부서진 사람>(바람이 불어오는 곳)

#. 당신의 부서진 자리에서 세워질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 피터 맘슨 <부서진 사람>(바람이 불어오는 곳)

 

유명한 공동체의 창립자 이야기가 전기로 쓰여져야 한다면 어떻게 서술되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전기라고 하면 역사 속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저명한 인물이나 영웅, 천재, 악당 등 한 분야의 범상치 않는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장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 <부서진 사람>은 이러한 우리의 예상을 빗겨나간다. 한 예로,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몇몇이 되지 못한다. 이토록 평범하고 무명에 가까운 사람에 관해 글을 쓰는 건 처음부터 전기의 요건에 맞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럼, 왜 무엇 때문에 저자는 글을 쓰는가. 저자의 당위는 적어도 자신이 목격한 그의 삶, 어떤 일이 있어도 소명을 따르고자 했던 그의 투철한 의지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 수백만의 가슴 속에 어떤 갈망을 일으킬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라는 말 속에 숨겨져 있다. , 이 책을 펼치는 첫 장부터 독자가 마주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과 상식에 대한 부서짐이다. ‘공동체라면 이럴 것이야’, ‘창립자라면 이렇겠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라울꺼야등 나름대로의 생각들은 부서진다. 왜냐하면 이 책은 브루더호프 창립자에 대한 소개 이전에 십자가의 도 안에서 부서질부서져야 할그리스도인 공동체이자 그 부서진 자리에서 다시 재고하게 된 자기 자신의 이야기, 즉 우리 각자의 소명자리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 왜 부서지나? : 소명, 그 영혼의 불꽃에 대하여

 

때론 상징적인 단어가 이야기를 꿰는 좋은 메타포가 될 때가 있다. (필자가 54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책에서 밑줄 긋고 감동받은 지점을 일일이 소개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편견과 상식에 대한 부서짐’, 이를 통해 뒤바뀌게 된 사유방식의 회심은 이 책을 추천하는 좋은 통로 역할 할 수 있다고 믿기에 부서지고, ‘어떻게부서지고, ‘무엇이 부서지는가라는 메타포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왜 부서지나?”, 사실 이 질문은 필자의 질문이 아니다. 공동체 창립자를 바라보는 아들, 하이너의 물음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그 이야기의 시작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끌고 나간다.(놀랍지 않은가!) 전쟁의 화망 속에서 비폭력, 인종과 계급차별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엄밀히 말해 아버지(에버하르트)의 소명이지 하이너(아들)의 소명이 아니다. 따라서 하이너는 사유재산을 나누고, 고난받고 버려진 아이들과 난민들, 범죄자들과 미망인들을 품고자 하는 공동체 소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하이너는 그저 그런 영성적 장에서 그런 가치관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운명적으로 태어났고, 자랐고, 겪었고, 의문을 가질 뿐이다.

 

한 예로 한 버려진 어린아이 조피와의 만남은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느끼는 공동체 소명을 향한 당혹스러움과 받아들여짐을 담담한 에피소드로 그려나간다. 한 의문의 여성에 의해 공동체의 놀이방에 버려진 조피는 한참을 울다가 흔들 목마를 타고 있는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를 발견하곤 호기심에 자신도 이 목마를 타고 싶다고 말한다. 그 때 어린 하이너는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조피는 빼곰 고개를 들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선.. 모든 걸 나눠 쓴다고 하던데...”, “맞아! 하지만 널 여기서 받아준 건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가 널 받아주셔서 네가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거라구!” 이 말을 들은 조피가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울 때 하이너가 달래며 조피에게 하는 말은 공동체가 되어간다는 의미를 아이들의 언어로 대변해준다. 엄마를 잃었구나, 근데 사실 나도 엄마가 없어. 아니, 있기 하는데, 나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어. 청소하고 요리하고 밭에서 일하고, 손님을 맞이하느라고 너무 바빠. 고아들도 돌봐야 하고, 내 생각엔 우린 같은 처지인거 같네

 

이러한 에피소드는 독자로 하여금 소명이란 한 사람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소명공동체로 깃들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형성되고,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노인은 제외되지 않는다. 예민한 독자라면 공동체는 오히려 이들에 의해 고백되고, 증언되며, 유지된다는 놀라운 지점들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 우리는 어린 하이너의 시선을 통해 왜 우리가 서로를 돌봐야 하는지, 왜 이기적으로 살아가면 안되는 것인지, 왜 어른들은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하려하는지,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함께 질문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들의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는 아버지(에버하르트) 혹은 공동체의 어른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찾는다. 그들은 공동체에 깃든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 가운데 살 때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되는지 등을 삶으로 가르치고, 보여주고,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탐독하는 또 다른 묘미는 어린아이를 향한 어른들의 태도다. 공동체에 깃든 어른들은 하나님이 이 아이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를 굉장히 호기심을 가지고 존중하며 대한다.

 

흥미로운 것은 어른들의 이러한 태도가 아이들 안에 있는 영혼의 불꽃, 소명을 깨워내는 산파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영성적 장에서 자란 아이들이 혹은 버려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 아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되려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중보기도 모임을 만들고, 노숙자와 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복음의 의미를 논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평생의 소명을 발견해 나가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어린아이를 향한 우리의 편견을 멈춰 세운다. 따라서 예민한 독자라면 이 책의 주인공이 단순히 에버하르트(창설자)와 이를 목격한 아들(하이너)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점차 깨달게 된다. 왜냐하면 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각자의 영혼의 불꽃이 소명으로서의 마주치는 자리, 즉 서로가 서로에 의해 빚어져가는 공명 속에서 이뤄져 간다는 사실을 이 저서가 고백과 사랑의 에피소드로 끊임없이 증언해주기 때문이다.

 

2. 어떻게 부서지나? : 배신과 추방,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

 

두 번째로, 부서지는 것은 낭만적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다. 실제로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초석이 된 자네츠는 핵심 맴버간의 공동체적 분열을 경험한다. 그 분열이 어찌나 강하던지 평생을 일군 출판사업의 판권과 자본, 그리고 땅과 지분까지도 다 파렴치하게 앗아갈 정도다. 어제의 동료가 부지불식간에 오늘의 철전지 원수가 된다. 혹자는 자네츠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동체내에서 펼쳐지는 배신과 갈등의 이야기를 보며 맞아. 사실 나도 공동체가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은 어느정도 예상했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겠어라고 지레짐작 할 수도 있다. 필자도 그랬으니깐. 하지만 필자가 또 다시 사유의 부서짐을 경험한 지점은 동일한 지점에 대한 다른 해석에 있다. 그것은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이 배신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대해 집중하며 갈등과 분열을 통해 예민한 영적 감각을 익혔다는 점이다. 즉 보여지는 배신과 갈등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부서짐을 통해 분별하는 사단의 간계, 내면의 씨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권세와 신분 등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신앙의 공통감각과 그 형성이 공동체가 하나로 일치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일례로, 유년시절 그토록 아끼던 공동체가 한순간에 분열되는 충격을 경험한 하이너를 향해 어머니가 주는 답변은 간명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를 생각하곤 하는 방식에 차이를 가져다준다. 하이너야. 남은 사람이 착하고, 떠난 사람이 나쁜건 아니란다. 떠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저 (자신들의 생각의 의한-필자주) ‘실험으로 보았을 뿐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필자주) ‘소명으로 생각했을 뿐이야. 우리는 계속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단다

 

그러므로 예민한 독자라면, 공동체의 리더들은 무너질 때 마다 무엇에 주목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라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역시, 틈만 나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주님의 용서하심과 각자에게 소명으로 불러일으킨 영혼의 불꽃에 집중하자는 리더들과 이제는 종교적인 이야기는 좀 그만하자고,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은 채 믿음만 내세우지 말자고 불평하는 리더들의 힘겨루기를 책을 읽으며 반복적으로 확인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힘겨루기가 개인을 넘어 보이지 않는 집단감각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지점이다. , 히틀러로 대변되는 시대적 징후 속에서 펼쳐지는 브루더호프 여정과 선택이 어떻게 시대와 결탁하여 맞물리고, 어떻게 반대로 대안이자 대항 공동체로 브루더호프를 연합하여 행동하게 만드는지는 흥미로운 전개지점이다. 다시말해 저자는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를 시대와 분리된 톡 떨어진 개체로 서술 하지 않고, ‘관계 속의 개체로 소개한다. 그리곤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의 영이 패거리를 짓는 시대적 사건과 어둠의 영들 속에서 브루더호프 공동체사람들이 어떻게 속고, 흔들리며, 자신들의 중심을 뒤흔들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네 공동체 안에 깃든 씨름이 무엇인지를 재고하도록 만든다. , 우리가 흔히 공동체의 갈등이 저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짓는 경향을 멈춰 세우고, 더 깊은 차원의 숨겨진 어둠의 간계를 주목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부서진 사람>에서 서술된 갈등은 단순한 현상적 이기심 이전에 보다 본질적인 영역, 즉 보편적인 죄성을 우리를 어떻게 괴롭히며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게 만드는지를 새롭게 조명해준다. 공동체는 말한다. 영적인 차원에 볼 때, 우리는 모두 다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옛자아의 감옥 속에서 해방되어야 할 노예인 동시에 승리자 예수에 의해 구속받은 혹은 받아야 할 주님의 자녀들이다! (한편, <부서진 사람>에서 언급되는 신학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필자가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인물은 창설자와 그 후 리더들의 서재에서 종종 발견되는 에크하르트와 블룸하르트이다. 필자의 경우 이 책을 보다 구체적으로 읽고, 상상하는데 있어 에크하르트에게서는 영혼의 불꽃 속에서 탄생하는 아들의 탄생개념, 블룸하르트에게서는 어둠의 권세와 승리자 그리스도의 주권개념이 큰 도움을 주었다.)

 

3. 무엇이 부서지나? : 희망,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향하여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이 고생스러운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나?’ 필자도 읽으며 눈물 흘리며 씨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외치며 나아가는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마냥 고깝게 보이진 않았다. 배신과 추방, 그리고 창립정신을 빼앗겨 가면서도 무엇하나 제대로 전략적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밟히다 못해 처잠하게 헤어지는 모습(공동체를 돌보다 불구가 된 에버하르트-아버지, 어이없는 오진으로 정신병이라 오해받는 하이너-아들, 속절없이 당하는 걸 지켜보는 크리스토프-손주)은 어리석다 못해 정말 저런 모습이라면 절대 닮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이쯤 되면 이 책의 초반부에 자신의 소유와 재산, 계급과 인종을 넘어서서 서로 사랑했던 공동체를 상상했던 독자들은 이내 실망할지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나는 저정도로 희생과 사랑을 할 깜냥은 아니야. 그건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어딘가 모르게 어리석고, 바보같은 모습은 우리가 꿈꾸고 동경하는 모습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우리의 편견이 그들의 이야기의 본의를 곡해하는 또 다른 어둠의 속삭임일 수 있음을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서지는 것은 사실 우리를 고집스럽게 묶고 있는 이기적인 옛자아의 죽음이고, 되려 그 자리에 새롭게 세워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함께 형성되는 새사람의 깨어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서에 나타난 고난의 이야기는 자아의 할례로 대변되는 자유를 노래한다. 할례의 원어적 해석은 애굽의 수치가 굴러 떨어지다인데, 이는 우리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서 이제는 진리가 되어버린 애굽적 삶의 방식에 대한 죽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유를 동경하지만, 여기 노예로서 주어지는 고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아니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분리하려는 유혹을 참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들을 조롱할 수도 있다. 그렇게 찌질하고, 불편하게 살 바에는 적당히 행복한 삶과 타협하겠다고.’하며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우리는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하나님이 고집스러운 자아를 추적하시며, 관계와 갈등 속에서 칼을 들이대시며, 무엇을 걷어내려 하시는지를 주목해 봐야 한다. 다른 방식의 삶, 브루더호프가 추구한 예수의 길에 대해 우리의 옛자아는 자신의 진영을 위협하는 칼로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빗어진 새사람은 이 칼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선물로 받아들인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힌 우리의 고집스러운 옛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부서진 현상을 불평으로 해석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난 새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빚으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부서진 사람>의 이야기는 그 시대 혹은 이 시대 속에서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 ‘우리의 이기적 자아와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집단의식이 우리를 실제로 자유하게 했는가?’ 이는 반대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부서지는 자아와 이로인해 떨어져가는 애굽의 수치가 우리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가능하도록 만드는가를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필자는 혹여나 이 책이 그저 부서지기만하는 공동체의 역사로 누군가에게 기억될까 두렵다. 그것은 사실로서 하나의 기록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실상으로서 세워지는 것은 부서진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는 자유와 해방의 이야기,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짊어진 온전한 경청과 순명, 즉 그리스도의 길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나가며 : 당신의 부서진 자리에서 세워질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스도, 그 분의 부르심은 우리를 더불어 함께살리시려 오시는 사랑의 초대다. 그러므로 필자는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부르심이 때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부서짐으로 다가올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부르더호프 이야기처럼 그 실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점검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세워져가는 신앙의 공통감각을 함께 익혀가자고 말하고 싶다. 고난이라는 이름의 칼이 우리의 고집스럽고, 썩어져 버려야할 옛 자아를 수술하시려는 주님의 음성인지, 사단의 간계에 의해 한 발자국도 더 협조할 수 없다는 익숙한 자아의 반복되는 덫인지를 기도하고, 분별하며 말이다. 그러면 부서진 현상 이면에 세워지는 역설적인 실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우리의 처참함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만나시는 분은 자기 안에 갇힌 옛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생명의 이야기 혹은 생명들의 연대를 시작하시는 그리스도다.

 

우리 영혼의 불꽃이 공명하는 그 곳에 계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단의 진영으로 실제로 넘어간 것은 우리를 자유케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진정한 수치는 노예본능으로 익숙해진 애굽의 수치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자녀된 신분의 망각(수치)라는 것을. 이처럼 소명을 향한 부르심에는 자기안에 갇힌 세계를 깨뜨리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도함 속에서 발견하는 영혼의 치유와 회복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상처를 치유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고난받는 세상을 변혁하고, 회복케 하시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끝으로, 필자는 한 아이의 아빠로서 이 책을 이제 갓 태어난 첫 아이를 돌보면서 읽었다. 에버하르트를 보며, 또 자신도 모르게 영성적 장에 내던져진 채 의문을 품었던 하이너를 보며 상상하여 본다. 우리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어린 하이너에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하나님의 세계가 다른 또래 아이들에게 어리석고,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에버하르트와 하이너처럼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내고, 꿈꾸며, 물려주기 위해 부서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비유가 반드시 자신들의 세대에서 누려야할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차원의 이야기, 자신들의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 아니 그 다음세대를 넘어 온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세계를 향한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가 복음안에서 자신들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통한 경이로움이 반드시 특별한 사람들에 의한, 저명한 이야기로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한 경이로움은 가련하고 실수투성인 이 땅의 자녀들”,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안에서도 능히 역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필자의 긴 글을 혹 읽어주신 이가 있다면, 당신의 부서진 자리에 세워질 가장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당신 안에 숨겨진 영혼의 불꽃, 그 생명의 이야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성서 말씀대로 온 피조세계는 그 생명의 이야기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고, 그 생명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흑과 백,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동역자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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