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머튼 이야기』 서평

#. <이야기>되고 있는 <이야기>를 넘어서
- 『토마스머튼 이야기』 서평

우, 우우 풍문으로 들었소. 유명한 노랫말처럼, 여기 익숙하지만 너무나도 낯선 한 인물이 있다. 바로 토마스 머튼이란 인물이다. 그를 둘러싼 풍문은 다양한지만, 대표적 호칭을 나열하자면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로서 봉쇄수도원에서 글을 쓰지만,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던 비범한 인물로 그려져 왔다. 무엇이 그를 비범하게 만들었을까. 풍문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그의 전기에 쏟아진 찬사를 보면, 더욱 그의 삶을 궁금하게 만든다. 그의 전기를 다룬 저서 『칠층산』은 내셔널 리뷰가 뽑은 20세기 최상의 논픽션 100권에 선정되었고, 월리엄 피터슨이 주도했던 20세기를 바꾼 100권의 그리스도교 서적에 포함되었다. 풀턴 쉰 대주교는 급기야 『칠층산』을 가리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백록』의 20세기 판”이라고 부르며 토마스 머튼을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반열에 올리며 격찬했다. 토마스 머튼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거쳐, 시대와 시대를 거쳐 계속 회자되며 이야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살아온 인생이 계속 회자되는가? 우리는 토머스 머튼을 둘러싼 <이야기>가 궁금하다.

1. 왜 머튼 <이야기>를 새로 써야 하나?

풍문으로 들은 소문을 한방에 정리하는 길은 직접 머튼이 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하지만 때론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만큼이나 저자를 둘러싼 이야기가 저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토마스머튼 이야기』의 저자 오방식 교수는 저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오랫동안 탐구해온 수집가이다. 석사와 박사 논문을 모두 토마스 머튼에 대한 연구를 쓴 차치하더라도, 그가 유학시절 2년에 한번 꾸준히 개최된 국제 토마스 머튼 학회에 참석하며 만났던 머튼의 실제 친구들의 증언과 고백들에 대한 수집은 독자로 하여금, 글로만 알게 된 머튼이 아니라 실제 만나고, 사랑하고, 대화했던 토마스 머튼이 무엇을 추구하고, 사랑했던 인물인지를 보다 새롭게 보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신앙의 개성화’, 즉,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시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가 보다 입체적으로 읽혀지길을 갈망한다. 그리고 자신이 전공하고, 수집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머튼의 이야기를 새롭게 재조명하여 읽어보기를 권유한다. 대표적으로 새롭게 읽어보기를 권유하는 당위는 머튼의 자서전으로 알려진 『칠층산』의 저술방식에 대한 비판에 있다. 토마스 머튼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칠층산』이 쓰여진 시점이 인생의 후반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이제 갓 봉쇄 수도원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된 젊은 수도자의 고백이라는 점을 쉽사리 알기 어렵다. 즉, 수도자로서의 삶을 봉헌하려는 그 시점에서, 혹 이제는 과거의 과오를 씻어내고자 했던 젊은 수도자로서 서술된 『칠층산』의 고백에는 과거와의 단호히 단절이 있다. “비록 은총의 시각에서 자신의 생애를 바라보고 있더라도 젊은 수도자 머튼의 눈에 비친 과거는 제거하고 뽑아내야 할 쓴 뿌리이자 분리해내야할 검은 어둠이었다” 따라서 『칠층산』에서 머튼이 수도자로 봉헌되기 전의 자신의 과거를 영혼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감옥”으로, “포로”로, “부재와 어둠”으로 서술한 이유는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그의 인격적 변혁에 맞물린 극적인 시점과 연관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모르는 독자는 마치 정답을 미리 알아 조급해 하는 학생처럼, 머튼이 어서 과거의 어둠을 딛고, 어떻게 하나님 사람이 되었는지를 극복의 관점으로 보기 십상이다)

하지만 『칠층산』 이후, 인생의 후반부에는 과거에 대한 이러한 분리적인 관점을 초월한다. “종교적 죄로 구분되는 것들, 인간적 요소들, 본능과 욕망은 더 이상 머튼에게 제거해야할 흉측한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은총의 시각에서 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아 통합해 가는 하나님의 부름이었으며,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셨던 현존의 비밀의 장소가 된다. 그래서 저자는 『토마스머튼 이야기』를 통해 다시 그의 탄생과 종신서약을 다루는 전기를 자신이 만난 수집물을 총 동원하여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어둠으로 가득해 보이는 머튼의 인생 전반부에 육화하셨으며, 하나님은 그 어둠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머튼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를 빚어가셨기” 때문이다.  

2. 재구성, 하늘의 은혜는 땅의 사실로부터

그렇다면, 그의 과거를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머튼의 『칠층산』을 필자의 관점에서 읽고 해석한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저자는 이미 출생과 종신서약의 영적여정을 고백한 『칠층산』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최대한 “땅의 사실”들을 균형감 있게 복원하고자 한다. 즉, 젊은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 영적인 회심에 방점을 찍고 과거를 선택적으로 반추하는 『칠층산』의 저술방식과 달리 최대한 <역사적 사실>를 그의 수집물을 바탕으로 복원하고, 그 때의 머튼의 고백을 연대기적으로 인용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얼핏 보면, 이러한 복원이 머튼의 고백록에 나타난 영적인 역동성을 삭감하는거 아니야?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지만, 앞서 말했던 그의 고백이 아니라 그가 만난 사람들의 고백 속에서 새로운 역동을 입기도 한다.

이를테면, 저자는 머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술가로서 어떤 활동을 하신 분이고, 어린 시절에 두 부모님이 죽음이 어린 머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가족들을 잃고 자유의 방랑자가 된 머튼을 멀리서 지켜본 아버지의 지인인 대부와 외조부모님이 머튼에게 얼마나 물리적, 정신적 도움을 제공했는지? 학창시절과 대학시절 만난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머튼을, 머튼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서로 영향을 받았는지? 머튼은 자신에게 사제 성소가 있는지 식별하는 과정에서 누구를 찾아갔으며, 수도회 입회가 거절되었을 때 머튼의 내면은 어떠했는지? 등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굵직한 인생의 여정을 차분히 복원해 나간다.

따라서 독자들은 그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대학시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거쳐간 관계들은 하나씩 소개받으며 수도자 이전의 외롭고 쓸쓸했던 어린아이, 갈팡질팡 고민했던 청년을 소개받는다.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머튼이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고, 날을 샐 정도로 술을 좋아했으며, 여자문제로 인해 그토록 번뇌했다는 사실이 매우 낯설게 다가왔다. 종신서원의 직전까지 보나 벤투라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일했던 교수 토마스 머튼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 입에서 마침내 새노랗게 찌든 니코틴 냄새가 말끔히 가셨고, 영화의 뿌연 흙탕물에 젖어 있던 눈도 깨끗이 헹구어졌다. 이제 술과 육식, 담배와 영화를 사랑했던 내 취향과 시야는 사라졌다. 내 마음을 더럽힌 책도 내던져 버렸다”(212)  

우리는 그를 침묵 속에서 차분하고, 신중한 수도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바라보지만, 땅의 사실은 그를 신중하지 못한 탐닉자, 고뇌하다가 도망치는 대학생, 과민하고 열등감에 시달렸던 구도자로 다루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평범한 관점에서 볼 때,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 이래, ‘진정한 자유의 삶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울타리가 사라지면 내가 스스로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가?’를 묻는 청소년으로, 청년의 때에 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그리스도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무엇인가? 내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한가? 부름을 받았다면, 평생 나는 어떤 소명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봉헌해야하는가?’를 묻는 청년으로, 그리고 서원을 다짐하며 ‘이 영혼의 울림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인가? 주님의 부름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영적인 식별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나의 이 서원의 자리가 주님이 전적으로 부르셔서 내가 온전히 순종한 자리라 고백하면서도, 이 자리를 떠나 다른 자리로 옮기고자 하는 욕동이 터져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물었던 장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물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묻는 보편적 질문 앞에 섰다는 것을. 그가 특별하다면 그 질문을 온 삶을 걸고, 끝까지 추적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 탐구의 주도권을 주님앞에 드렸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우리는 『토마스 머튼 이야기』를 통해 평범하지만, 비범했던 인물을 소개 받고, 그가 던진 질문을 함께 마주하며,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된다.

3. 밤의 기도 : 더 수도원 안으로, 더 세상 밖으로

<이야기>가 재구성되었다고, <이야기>의 본질이 사라지진 않는다. 저자는 머튼의 이야기를 향방없이 재조합하는 편집기자가 아니라 그가 말하는 본질을 재조명하는 큐레이터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연대기적 구성 안에 반복적으로 머튼의 고백이 직접 인용된다.(『칠층산』, 『요나의 표징』, 『고요한 등불』 등등) 그리고 머튼을 둘러싼 사람들이 증언하듯 그 인용을 단순히 과거의 회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인격의 형성으로 재조명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둘러싼 과거를 깨어나지 못한 “영적 죽음의 상태”로 고백하는 머튼의 진술에는 “부재의 밤”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의 흔적이 있다. 저자는 이를 존중하며 아버지의 죽음, 어머님의 죽음, 부모님 이후 돌봐줬던 외조부의 죽음,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지만, 그 역사적 사실 앞에 놓인 외로움을 하나님 앞에서 묻고자 했던 머튼의 밤의 기도에 주목한다. 즉, 역사적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넘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는 머튼의 밤은 시끄러운 자아의 부르짖음인 동시에 근원되신 그분 안에서 영원한 침묵과 안식에 들어가고 싶었던 머튼의 고뇌를 대변한다.

이렇듯 예민한 독자라면, 이 연대기적 서술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물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에 고명하는 영혼의 목소리라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예측가능하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세계는 머튼이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묻고, 또 묻고, 또 물었던 식별지점이자 자신의 논리 안에서는 이미 결정이 되었지만 쉽사리 그 결정을 따를 수 없었던 걸림돌이었다. 한 예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수도자로서의 입회를 거절당한 이래 세속 성자로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자리 잡았던 머튼은 끝임없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자신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식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이제 갓 자리 잡은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으며 다음과 고백한 후 총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만다.

‘보나벤투라를 떠나야 한다. 그곳은 너무나도 잘 보호받는 안전한 곳이여서 나에게 이렇다 할 십자가가 없는 장소였다. 계속 거기에 머문다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삶이 될것만 같았다’(『칠층산』, 728)

수도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님 안에서 나는 온전히 죽고,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을 꿈꾸며 들어간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그는 장상들의 말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집을 발견한다. 즉, 자신은 침묵과 관상을 더욱 깊게 하고 싶지만 겟세마네 수도원에서는 너무 많은 노동과 공동체 생활이 자신의 개인시간을 앗아감에 불편해 한다. 그리곤 이곳이 자신이 영원한 소명자리로 부르신 순명의 자리임을 고백하며 은둔 수도자가 되었음에도, 수도원장에게 독방이 있고, 노동보다 관상을 추구하는 다른 수도원으로 자신이 옮겨줄 수 있는지를 묻는 머튼을 본다. 수도원장과 장상들은 이러한 그의 요청을 이기심이란 이름으로 일축했고, 대신 글쓰기와 자연 은수처 마련등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읽는 머튼의 글이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머튼은 거절된 이 상황을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관계로서 숙고했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깊은 연합의 관계라는 ‘관상’이 더 나은 ‘환경’이나 특정 ‘장소’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근원적 ‘관계’ 속에서 어느 곳이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역설적이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수많은 분열된 세계가 이 깊고 깊은 근원적 세계 안에서 분리되어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 즉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세상을 보게 되었고, 세상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곳은 미국의 중심이다. 무엇이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으며 우주가 산산조각 나지 않고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이유를 단 한가지만 뽑으라면 바로 이 수도원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유일하고 진정한 미국 도시다. 광야 안의 도시, 이곳은 온 나를 돌아가게 하는 중심축이다. 워싱턴은 허상이고 석고며 소음을 생산해내는 기계요, 광기로 가득찬 도시다. 겟세마네 수도원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기틀을 마련해주는 믿음의 근저로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277)

머튼은 사막의 교부들처럼 수도원의 삶을 통해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온 세상을 안전한 토대 위에서 끌어낼 책임”을 자각한 예언자의 목소리로서 봉헌되어야 할 자신의 소명자리를 깨닫게 된다. 머튼은 그 이후 사회, 문화, 정치, 전쟁, 생태, 윤리, 평화에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적인 저서를 써내려 갔고, 이러한 서술은 세상으로 하여금 좀처럼 만나보지 못한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침묵은 세상에서 일어난 수많은 활동 이상을 해냈고, 그는 실제로 “나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 활동하는 것보다 바로 여기서 침묵 가운데 평화를 위해 훨씬 많은 일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나가며 : 책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처럼, 성과 속, 분리와 연합, 봉쇄 수도원과 뉴욕 한복판, 침묵과 활동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진술되는 역설을 우리는 머튼의 삶을 통해 목도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그 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기 자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있다. 머튼은 이러한 고백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이 고백의 기원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름 속에서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우리는 『토마스 머튼 이야기』를 덮을 때쯤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따라야할 신앙의 모범이나 모델로서의 성인 머튼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심 앞에 이 이야기를 읽으며 질문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머튼은 어느 자전적 글에서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고결한 독자들이여, 나는 작가로서 또는 이야기꾼, 철학자, 친구로서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나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누가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으랴?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귀를 기울인다면 이 책에 기록되지 않는 내용이 당신에게 들릴 것이다. 그 일이 가정하다면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과 내 안에 내주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그 유일한 한 분 때문일 것이다.”(361)

그러므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다시 회자된다. <이야기>를 읽으며, 질문하고 있는 독자, 그리고 그 독자를 이끄는 것은 단순히 눈과 손이 아니라 눈과 손을 움직이게 했던 우리 안에 있는 심령이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려는 영혼의 목소리이다. 머튼은 그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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