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기만 하면 천국가는거 아니였어?

#. 믿기만 하면 천국가는거 아니였어?

2003년 12월 22일, 승합차 운전자로 보이는 한 남성이 커다란 물체를 한강 다리 아래로 내던졌다. 잠시 뒤 또 하나의 물체를 강에 던졌다. 처음에는 확실치 않았지만 두번째는 분명 사람을 던지는 것 같았다... 사건의 결과, 놀랍게도 그 사람(이씨)은 승합차 운전자의 두 자녀였다.. 이씨는 현장검증을 할때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기자 :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이씨 : 괴롭습니다. 살방법이 없어 그랬습니다..
기자 : 왜 같이 안 죽었나요?
이씨 : 기독교인이라 자살은 못했습니다.
기자 : 기독교인이 죽이는것은 괜찮습니까?
이씨 : 죄(살인)는 씻을수 있습니다. 자살은 씻을수 없습니다.  
기자 : 뭐, 뭐라구요..?

이씨의 논리는 무엇인가.. 회개는 모든죄를 용서케한다. 모든죄는 회개를 통해 회복할 시간이 있지만, 자살은 죄짓는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에 회개할 시간이 없다. 이씨의 말을 고지곧대로 믿는다면, 필요하다면 살인이든 뭐든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 용서가 되지만 자살만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이다.
살인은 용서받을수 있지만, 자살은 용서받을수 없다는 논리는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겠지만, 위 변명의 배후에는 고도로 잘못된 신학적 논리가 가져다준 폐해를 정확히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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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책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라는 책의 내용이다. 위 책을 정리하려는 이유는 오랫동안 궁금해왔던'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내용을 비판적으로 살펴주면서도, 신학의 왜곡이 낳는 교회의 타락을 대중적으로 쉽게 전파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접근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에겐 칼뱅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동의하고, 아르미니우스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의 인격성도 매우 중요했지만 학교에서는 두 신학체계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논의를 잘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신학적 논쟁에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확히 말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개독교'가 된 이유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신학적 실패(나쁜 신학)가 올바른 복음의 이해를 가로막았다는 한국교회 현실에 놓인 실존적인 비판에 목적이 있다.

1부. 카톨릭보다 심한 개신교의 면죄부.

1. 카톨릭의 면죄부
본래 면죄부는 교회가 죄를 고백하는 죄인에게 죄사함을 선포할때 용서받은 죄인이 교회에 바치는 일종의 감사헌금에서 시작되었다. 인과관계를 따지면 면죄부 구매때문에 죄 용서가 선포된 것이 아니라, 죄 용서에 대한 선포때문에 면죄부를 구매했다. 면죄부란 죄 용서의 선포권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죄를 지은 이후 받아들어질때 죄의 세력이 교회내에 고착되지 못하도록 했던 엄격한 기준(1단계 통회, 2단계 공동체 고백, 3단계 최소한의 죄값을 치루는 보속 중 - 특히 보속:죄에 대한 형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용서받은 죄인이 받는 벌을 면할수 있게 해준다는 관점에서 면죄부보다는 면벌부에 가까웠다.  

*잉여공로의 분배
카톨릭은 어떻게 죄를 돈으로 갚는 말도 안되보이는 '면죄부' 제도를 만들수 있었을까? 그것은 카톨릭의 '의'에 대한 해석의 차이때문에 빗어졌다.
개신교는 성례전을 단순히 교회의 의식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반면에, 로마 카톨릭은 구원의 중요한 수단으로 본다. 성례전이 어떻게 구원의 수단이 될수 있을까?
로마 가톨릭교회는 죄를 영혼의 질병으로 본다. 구원이란 죄를 용서받는 것인데, 다른말로 영혼의 질병을 고침 받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다른말로 은총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마치 보이는 성례전 속에 보이지 않는 은총이 들어있는것과 같아서, 성례전에 참여할 때 성례전 속에 들어 있는 은총이 인간 영혼 앞에 주입되어 죄 용서의 효과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성례전은 은총을 담은 주사기와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1회의 성례전으로 주입되는 은총의 양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은총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꾸준히 은총의 양을 축적해야 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했던 이유는 개신교의 의는 '전가' 된것(본래 내것이 아닌데 내것인양 덧씌워진것)인 반면 가톨릭의 의는 '분여'된것(실제 내 것이 되는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치 그리스도의 의가 축적되며 내 소유가 되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가 충만하게 쌓이면 영혼을 죄로부터 치유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만일 구원 얻을 만한 분량보다 더 많은 공로를 쌓으면 어떻게 되는가? 가톨릭교회는 그 여분의 공로가 창고에 쌓인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졌으니, 이 권세로  하늘의 보고에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여분의 공로가 쌓이면 교회 혹은 교황이 그 공로를 꺼내어 사용할수 있다는 기묘한 교설이 만들어지면서 면죄부의 탄생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 사죄선언의 사유화
예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을까? 마태복음 16장에 "네가 천국의 열쇠를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20장에 예수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라는 말씀에 비추어볼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셨다.
역사적으로도 초대교회때 사역자와 교인들이 죄를 지은 사람을 실제로 죄용서를 선포해 주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러한 죄 용서 선포가 자의적인것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즉 죄를 지은 사람이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고백할 때 공동체가 이를 듣고 분별하여 죄의 용서를 선포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사죄의 권한을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톨릭교회가 공동체의 고백위에 서있던 사죄의 권한을 사제들에게 사적으로 시행하는 고해성사로 변질시켰다. 이로 인해 사제에게 행하는 고해성사는 그릇된 권위주의를 만들어냈고, 교회가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질되면서 사죄선언의 권한을 사유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마 가톨릭 사제(교회)의 1)잉여공로의 분배 와 2)사죄선언의 사유화는 면죄부탄생을 불러일으켰다.
면죄부는 교회 편에서는 돈을 벌수 있는 수단이었고, 교인 편에서는 손쉽게 구원을 얻을수 있는 방편이었다. 면죄부는 교회와 죄인간에 이루어지는 은밀한 거래였고, 거짓확신제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서를 바탕으로 교회의 권위를 정당화 했던 사건이었다.

2. 개신교의  면죄부
가톨릭의 면죄부에 맞서 종교개혁이 감행한 일은 '보상없는 회개'가 가능해진점이다. 개신교는 행위가 아닌 오직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신학은 가톨릭의 공로신학을 타파했고, 만인제사장설에 기초하여 모든  교인은 사제의 중재없이 회개한다는 고백은 가톨릭의 사제권한을 타파했다. 진정한 회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진실한 개인고백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톨릭과 비교하여 개신교가 이야기한 개혁은 본래 의도와 달리 아무런 공적 고백없는 편리한 사적 고백(1단계 자유로운 통회)으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회개의 사유화(2단계 공동체의 간섭을 맞지 않는 고백)로, 회개의 진정성에 대한 검증권한과 수단을 포기한 채 최소한의 피해보상마저 요구할수 없는 회개의 간소화(3단계 보속의 개념타파)로, 죄의 무게감이 상실된 죄의 관념화로 왜곡되면서 "믿기만 하면 큰죄든 작은죄든 무조건 전부 용서받는다!" 라는 다른의미에서 천박한 구원론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곡해했다. (참고로 2-3세기 초대교인들에게 회심이란 1)교리에 대한 동의, 진실된 통회 뿐만 아니라 2) 공동체를 통한 검증과 소속 3)분명한 행동의 변화를 의미하는것이었다. 이는 죄인은 구원하되 죄의 세력이 교회내에 고착화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다루었던 과정이었다.)

객관화되고 대상화된 '구원의 확신'은 그 이면에 인간욕망이 보이지 않는 투사된것에 불과하다.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간소화된 신앙의 공식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조건없이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주문처럼 간주된다. 죄로부터 돌이킴이 없는 범죄자라 할지라도 구원에 대한 간단하게 확실할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 원하시는 돌이킴(회개)은 폐쇄적인 자기중심적 세계에서 나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올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판 개신교 면죄부는 이러한 순종의 과정을 생략하게 만든다. 입으로 회개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수 있다. 무제한적 용서를 선포하면서도 죄인이 죄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를 하지 않는다.
종교지도자들은 늘 돈과 명예, 권력을 원하고 대중은 심리적 위안ㅇ과 감동, 종교 서비스를 바란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썩은 참회신학을 통해 대중에게 심리적 위안과 감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중은 그에 보답하여 돈과 권력과 명예를 종교지도자에 제공하는 현대판 면죄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현대판 면죄부는 참된 회개를 도리어 방해하기에 이른다. 죄도 짓고, 양심도 편하고, 순종이 없으며, 열매가 없다. 본회퍼가 말대로 철전지 원수는 값싼은혜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 개신교회가 발행하는 면죄부의 패악이다.

한국교회가 발행하는 면죄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면죄부가 온갖 신학적, 성서적 궤변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근거삼는 왜곡된 참회신학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것이 본래 개신교에서 말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원형에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정직하게 살펴보야 하기 때문이다.

2부. 칼뱅주의
대중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칼뱅주의 구원론의 영향력은 1619년에 발표된 '도르트신조'  5가지 명제를 통해 살펴볼수 있다.

1) T(전적 타락) : Total Depravity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칼뱅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책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인간이 믿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전적타락 교리는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데 대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있다.)

2) U(무조건적 선택) : Unconditional Election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택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비택자) 모두를 미리 정하셨다.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 전적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받을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유일한 가능성은 타력-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의한 구원뿐이다. 그렇다면 어떤사람은 구원하시기로, 어떤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기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알수없다. 분명한건 이중예정에 대한 근거가 인간편에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3) L(제한 속죄) : Limited Atonement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비택자를 위해서 피를 흘리실 이유가 없다. (이중예정이 되있는 상황에서 비택자를 위해 피를 흘린다는 것은 전지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자기모순이 된다. 제한속죄는 전적타락과 이중예정에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4) I(거부할 수 없는 은혜) : Irresistible Grace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죄인이 믿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일수밖에 없고, 그 주권적 은혜를 거부할수도 없다.)

5) P(성도의 경인) :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한번 구원받은 신자는 영원히 구원받는다. 그가 가끔 낙심하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을 수 있을지라도 그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칼뱅주의의 입장은 모아니면 도다. 모두 거부하거나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전적타락을 받아들이면 무조건적 선택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은 다시 나머지 교리들도 자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칼뱅주의의 윤리적 추진력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견인교리를 바탕으로 볼때 도덕적 방종이 쉬울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칼뱅주의의 체계에는 신자가 도덕적 방종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교리보다더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교리체계이기 때문이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칼뱅주의자의 견인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자의 구원을 예정하셨으니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다. 선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견인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내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확신할수 없기 때문에 내세의 안전을 위해 끊임없이 삶의 열매등을 통해 자신이 택자임을 입증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주의는 역사적으로 도덕적 방종보다는 상당한 수준의 도덕적 추친력으로 신자들을 지도할수 있었다.  

3부. 아르미니우스주의
역사적으로 보면 17세기 칼뱅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는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의 되풀이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칼뱅주의를 거부하고, 동시에 자력구원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도 거부함으로서 제 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 자연적 무능력 : Natural Inability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 (전적타락은 맞지만 가죽옷의 은총을 보듯 범죄한 아담을 용서해주시고, 인간에게 어느정도 자유의지를 회복시켜주셨다-선행은총.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인지할수 있는 능력과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할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반응인 것이다. )

2) 조건적 선택 : 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을 자를 미리 알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예정하신다. 하나님의 예정은 복음을 믿을 것이라는 조건에 따른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책임있는 행위를 할수 있는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면, 그 믿음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예측, 예정할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은 칼뱅주의가 말하는 예정-예지에 반대되는 예지를 통한 예정을 말한다.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예지능력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모두 내다보실수 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떤식으로 반응하실지도 알고계신다. 이때 인간의 반응은 비록 하나님의 섭리 아래있지만,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다는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논리적으로는 인간의 결단에 뒤따르지만 시간적으로는 앞서있다는 것이다. )

3) 보편 속죄 : Unlimited Atonement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없이 속죄의 죄 피를 흘리셨다. 모두를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시기는 했으나, 이 속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자만 구원받는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보편속죄는 '차별없음'에 강조점이 있다.  

4) 저항할수 있는 은혜 : Resistible Grace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는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구원은 모두를 향해 열려있기-보편속죄 때문에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영접-회심'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5) 조건적 견인 : Conditional Perseverance
신자는 인내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만일 신자가 의지적으로 신앙을 포기한다면 하나님의 붙드심의 은총도 어쩔수 없다고 본다 )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윤리적 추진력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의 한번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견인교리가 율법폐기론으로 흐를수 있다는 것을 염려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따르면 "한번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 이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결신했으니 우리가 돌이켜 믿음을 포기할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의 결단이니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지 않는것이라는 두려움이 자신의 신앙을 다잡고, 삶의 열매을 맺으며, 완전한 성화를 향해 달음박질하게 만든다. 이러한 성화에 대한 강조가 강력한 윤리적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4부. 아르뱅주의
칼뱅주의는 칼뱅주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이대로 나름대로 성서적 근거와 장단점이 있다. 아울러 각각의 교리는 나름의 윤리적 추진력을 가지고 있고, 역사속에서 실천적 성과여 열매를 맺어왔다. 두 주의에 성과물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문제이겠이나, 어쨋거나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충분히 자신의 교리에 충실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패배는 만들어내지 않았을것임은 분명하다. 이런점에서 한국은 충실한 칼뱅주의도, 충실한 아르미니우스주의도 견지하고 있지 못하다. 한국교회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적당히, 편리하게 맘에 드는 것만 골라서 결합한 나쁜신학의 혼합물 때문이다.  

위에 도식에 따라, 1)타락-2)선택-3)속죄-4)은혜-5)견인을 살펴볼때,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식 '구원의 확신'과 칼뱅주의식 '성도의 견인'을 제멋대로 결합한 편의주의 신학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발행하는 21세기형 면죄부이다.
1)타락과 2)선택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혼합했고, 3)속죄와 4)은혜는 아므리니우스주의를 택했지만 5)견인은 칼뱅주의를 택했다. 한마디로 일관성있는 강조를 하고 있는 두교리를 편의에 따라 제멋대로 차용하여 만든 신학이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타락에 관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칼뱅주의) 하지만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할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아르미니우스주의)

(2) 선택에 대해
나도 알지 못하는 때에 나를 위해 구원을 준비하고, 나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점에서, 그러니깐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셨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다.(칼뱅주의) 하지만 예정론이 논리적으로 이중예정으로까지(택자외 비택자까지 예정) 나아갈수 있다는 점까지 진지하게 사유하지는 않는다. 그러고는 내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아르미니우스주의)

(3) 속죄에 대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없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아르미니우스주의) 그래서 아르뱅주의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복음주의적 초청을  강력하게 할수있다. 이러한 보편속죄는 아르뱅주의의 강력한 복음주의적 추진력 근원 중 하나이다.

(4) 은혜에 대해
아르뱅주의는 불신지가 스스로 복음을 믿기를 거부해서 지옥에 가고, 신자는 복음을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

(5) 견인에 대해
대부분 신자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굳게 믿는다. (칼뱅주의) 아르뱅주의자들은 한번 받은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칼뱅주의의 견인교리를 확실히 붙든다.  

이러한 결합결과 '칭의'는 '성화'와 결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이것만 믿으면 구원받는다. 성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자. 오직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자. 성화도 내가 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우리를 성화케하실것이니 성화도 은총이고 선물이다.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말고 애쓰지 말자.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라는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1)나는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 나는 구원받았다. (아르미니우스주의)
(2)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붙드신다. 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칼뱅주의)

(1)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는 자유의지는 있지만, (2) 그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를 부인하기로 결단할수 있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 명백한 모순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사고하지 않는다.
혼합된 구원론은 두 교리가 이야기 하고자했던  인간입장에서는 견인의 불명실하기 때문에 윤리적-성화적 삶을 살수 밖에없었던 긴장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는 식의 거짓된 복음을 정당화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왜곡된 신학에서 비록된 천박한 구원론은 구원을 얻은 믿음의 내용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가 아닌 "내가 구원받았다는 믿음, 확신" 이 더 중요한 자리로 대체되어 버렸다.

5부. 올바른 구원론을 위한 제언
칼뱅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두 신학사이에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더 근원적으로 진리의 논쟁의 이면에 가지고 있는 인식과 삶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어떠한 함정에 빠져있는지에 대해 3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물이라는 것이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도 되지만, 동시에 우물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순간 그 우물은 무덤이 되듯, 3가지 관점의 우물을 통해 왜곡된 구원론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 진위/실존
그리스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실체론은 기독교 신앙을 명사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서술하게 만들었다. (대상화, 명제화, 고정화) 그리스 철학에 입각한 논리적 추론은 점차 원초적인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다른곳으로 옮겨가게 했고, 결국에는 기독교의 인격적,성서적 진리관을 그리스철학 중심의 명제적 진리관으로 변질시켰다.
서구의 진리관이 '대상'에 대한 문제라면 성서의 진리관은 '인격과의 만남'에 대한 문제이다. 대응적, 대상적 진리관은 인식 주관 밖에 존재하는 대상을 전제로 하면서 "진리란 무엇인가?"를 묻지만, 성서적 진리관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안에서 "진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성서적 진리관은 그리스철학의 사물이나 원리에 대한 '논리적 지식'이 아니라 인격체에 대한 '관계적 지식' 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토라 앞에서 할수 있는 유일한 일은 토라를 비평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에 맞게 그분안에서 자신의 삶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성서적 진리관은 명제의 진위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건 실존적 결단의 문제였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 은총/행위
펠라기우스의 논쟁으로 부터 시작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은총과 공로라는 고전적 대립이었다. 공로는 기본적으로 가치론적 용어다. 공로는 행위의 유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행위에 부여된 가치가 어느정도이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행위는 가치평가와 무관하게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는 인간의 행동을 말한다. 이런점에서 은총은 행위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부여된 높은 가치평가인 공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서 인간의 편의 모든 반응 가능성을 제거해 버렸다. 마치 아이구스티누스 원죄론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은총없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행위없음으로 대립되는 양 여겨지게 되었다. 성서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충돌하지 않는데 충돌하는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은총과 공로가 아니라 은총과 행위의 틀로 해석하면 행위없는 구원에대한 가르침은 딜레마를 낳는다. 그 딜레마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에 빠지고,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지 않으면 무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에 기존교회가 하는 말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행위를 한다"는 애매한 논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총을 강조할때 어떤 죄악된 행위도 용서받는다는 해석과 조금이라고 행위를 강조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총의 파괴자로 몰릴수 있다는 낙인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위와 은총을 균형있게 강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성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신분의 차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의 은총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말이다.  

3. 루터의 우물 : 즉각성/점진성
루터가 구원을 개인의 실존적 체험과 연결한 것은 당시 가톨릭교회 성례전주의에 중대한 도전이었다. 가톨릭공동체의 성례전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전달하는 외적매개체이자 객관적 지표였는데 그것보다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게 된것이다.
회심체험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회심의 체험을 구원의 전부로 보는 태도역시 극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회심체험은 초대교회의 믿음과 소속, 행위의 변화를 동반하는 참 존재로의 변화라는 것과 연결될때 온전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렇듯 '칭의'와 '성화'의 분리라는 딜레마를 떠안게 되었다. 또한,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인식의 확산은 점점 교회와 무관한 구원론을 만들어가고있다. 개인적인 구원론과 공동체적인 교회론은 관연 연관될수 있을까? 그리고 연관되어야 하는것인가?

하나님나라 신학은 구원론과 교회론을 통합하는 키워드가 된다. 만일 구원을 세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해볼수 있다면 교회론은 새로운 구원론적 차원을 획득한다. 하나님나라를 사단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라고 볼때 교회는 하나님의 회복, 치유, 구원의 정의가 실현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평회가 임하는 공동체로 실재할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전해야할 복음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대속적 해설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통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근사치로 보여주여야 한다. 결국 교회는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있으니 예수를 믿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 라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매력을 드러낸다는 말이 단순히 사회복지에 참여하거나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구조오 질설속에서 내재화하고, 제국의 질서-사단의 질서-불의의 질서에 반대되는 대안공동체, 대항공동체, 대조공동체로 세상속에 하나님나라를 현시해야 한다.

믿기만 하면 천국가느냐?
우리는 알수 없다. 다만 믿음과 은총과 행위는 서로 다른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다. 긴장관계속에서 역동적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른것도 마찬가지다.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 역사와 종말, 확실과 불확실, 즉각성과 점진성, 이미와 아직은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긴장이다. 그리고 이 긴장으로부터 신앙은 끊임없는 동력을 얻고, 성서의 개혁정신이 참된 신앙으로 살아있도록 독려하였다.
적어도 아르미니우스식의 '구원의 확신'과 칼뱅주의식의 '성도의 견인보장' 의 공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에 대한 두려움을 안정시켜주는 편의를 우선시하게 만든다. 이러한 왜곡에서 우리는 어떠한 두려움도, 떨림도, 긴장도, 회개도, 성화의 의무도, 윤리도, 실천도 발견할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이 한국교회의 왜곡된 구원론를 극복하고 희망찬 교회론에까지 연결되어지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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