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통찰

어거스틴의 인식론은 사실상 '앎'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사랑의 현상학'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앎의 방식이면에는 언제나 '사랑'의 인격성이 뿌리깊게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지면 사랑할수록 알려지고, 사랑하지 않을 수록 무지해지는 것이다. 한 예로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를 그만둘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집적적인 직관은 너무나 약해져서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사랑하기를 시작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게된다"는 말한다. 논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선각자의 선언으로 보여지는 저 말에 우리는 무슨 반박을 할수 있을까. 나는 진리가 어느편에도 완전히 소유될수 없다고 믿기에, 다시말해 진리적 통찰은 어디에나 있다고 믿기에 논증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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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복음

#바르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다른 진리들 곁에 있는 또 하나의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모든 진리를 의문시한다. 복음은 문짝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게를 지탱하는 추축이다.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건 싸움, 사활이 걸린 싸움에 들어섬으로써 다른 모든 싸움에서 해방된다. 변증론, 곧 복음의 승리를 위한 염려란 있을 수도 없다. 복음은 주어진 모든 것의 지양이며, 새로운 토대의 설정으로서, 세상을 극복하는 승리다. 복음은 누가 그것을 대변하거나 실어 나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복음이 그것을 듣고 선포하는 사람을 대변하고 그들을 운반한다. ㅡ. 칼 바르트, 로마서 강해 2판,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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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하나님의 통치를 곧 그리스도의 통치와 일치시켰다. 즉, 우리가 최후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권선징악의 방식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행사되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에 마술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에 들어가는 것만이 바로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ㅡ. 정용섭. 신학공부. P.124 발췌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충분히 곱씹어 보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같지만, 결국은 자기의 욕망의 피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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