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물음과 신학함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존재을 떠올릴 때 눈 앞에 존재하는 것을 떠올린 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서 눈 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큰 틀에서 볼 때, 서구철학의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전통 형이상학의 과제는 존재하는 것전체에 대한 궁극적 근거와 본질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이해에 대해 근본적인 반박을 제기한다. 서구 철학사가 존재를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존재를 망각하는 역사였다고 반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존재망각을 이야기 하면서 되찾을려고 했던 존재물음은 무엇인가? 이해를 돕기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실 존재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애초에 잘못된 물음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는 이미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식론적 물음이기 때문에 존재에 관한 물음에는 적용되지 못한다. 정말 ‘~란 무엇인가의 물음이 가능하려면 ‘~’에 해당하는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이데거는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존재자를 물을 것이지 결코 그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으로서 존재를 물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존재자는 인식의 대상이나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존재는 그 자체로 대상화될 수 없다. 이제껏 이성의 무기들(사유, 탐구, 관찰, 분석)은 모두 존재가 자명하게 전제한 후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들은 인식론의 영역에만 화려하게 구사될 수 있을 뿐 존재의 존재방식을 묻는 존재론의 입장에서는 영 효과가 없는 왜곡에 불과하다. 하이데거가 존재론적 차이를 말하며 존재자와 달리 존재는 기존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한번도 제대로 물어진 적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대상적인 존재, 그래서 하이데거는 조재를 ’(없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상화될 수 없는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비대상적인 존재물음을 향한 도정을 현존재분석을 통해 시행한다. 자명하게 전제된 존재는 자명한 그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할 수 있는 인간에 의해서만 탐구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인간을 새롭게 명명하면서 현존재(Dasein)은 존재하면서 그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다라고 말하며 현존재분석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존재의미의 해명을 위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출발할 수가 없고, 막연하게나마 존재이해를 지니고 있는 존재자에게 물어서 그 막연한 존재이해를 철저화시킴으로서 궁극적인 존재해명에 도달해야 하는데, 현존재(인간)가 바로 그러한 존재이해를 지니고 잇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존재를 또다시 근대적 방식으로 파악하고 구성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존재를 드러내는 대신에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주고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존재는 언제나 바깥으로 열려있는 창문일 뿐 그 창문 뒤에서 세계를 관조하는 어떤 주체가 아니다. 다시말해 인간은 창문 안의 방에 숨어 창문을 하나의 도구로 해서 바깥 세계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 창문 자체로 존재한다. 즉 현존재는 개시성을 지닌 존재로서, 존재가 열어밝혀진 장(da)인 것이다.

 

더 나아가 현존재분석은 시간성에 기대어 존재의미를 확장해나간다. 이를 하이데거는 기초 존재론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존재해명의 장으로 인간의 존재방식을 보니 시간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내던져있는 상태(피투)에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내던져(기투)야 한다는 점에서 세계--존재로서자신의 실존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물론 모든 인간이 다 이러한 미래를 향한 매순간의 결단 속에서 살지는 않는다. (실제 하이데거는 인간을 das man, da-sein를 구별하며 das man를 세계 속에서 무기력하게 빠져 있는 존재로 명명한다.) 하지만 인간이 라는 질문에 뿌리내리면서 보다 본래적인 질문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진지하게 묻는다면, 현존재로서 자신이 이러한 결단적 성격 속에서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죽음을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미리 앞질러 경험함으로서, 대중 속에 있는 군중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어떻게 결단하며 살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죽음을 향한 존재, 하이데거는 죽음을 말하면서 인간 현존재의 전체구조는 피투된 기투로서 단순히 그저 그렇게 주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비본래적 존재로 빠져있을 것인가, 본래적 존재로 나가갈 것인가라는 존재가능의 근본적인 성격 아래 놓여져 있다고 말했다. 이를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그의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엇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기보다는 어떻게 인간이 존재를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방식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무엇어떻게대해 말하기 이전에 먼저 물어야 할 기초적인 물음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그저 있음이 아니라 존재가능성으로 자신의 근본 성격을 매순간 선택해야하는 실존상태에 있다는 것을 명명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터전에 놓여져 있는 시간적 실존을 기준으로 존재일반의 세계를 다시 재해석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죽음을 향한 존재는 시간성의 기초위에 놓여 있다. 존재가능으로서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가능성으로 대면하면서 선구적 결단을 통해 미래를 현재에로 접근시키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동시에 현재의 존재가능성을 이루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구성함으로써 가위 시간성의 구조에 입각해서 현존재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구성한다. 하지만 현존재의 시간성은 삶의 연속성에 대한 고려를 간과하기 때문에 그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태어남과 죽음의 전 과정을 포함하는 역사화의 차원에 이르러야 하며 이로써 현존재의 개인적 숙명을 타자와 함께하는 존재자의 공동적 운명이라는 의미를 덧입게 된다. 따라서 현존재의 시간성은 존재일반의 측면에서 존재와의 관계구조로서의 이해와 이를 명료화하는 해석의 지평으로서 실존론적 보편성을 확보한다. 즉 역사성은 현존재의 그 전체성에 있어서의 실존적 드러냄의 장이 되고 존재해명의 도정은 시간성(언제)과 역사성(어디서)을 지닌 현존재의 통로 속에서 그 존재론적 기초가 정초되게 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의를 지닐까? 과거 존재자를 묻는 전통철학이 아무리 무엇-어떻게를 물어가며 존재자의 보편성을 외쳐왔더라도 그런 보편성을 누릴 것으로 여겨지는 언제/어디서에 내던져 있는 누가의 실존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 전혀 라는 물음 앞에 기존의 형이상학 담론이 그 기반을 검토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전통 형이상학을 하이데거의 구도로 다시 읽는다면 “[]에서 [있음][]을 새롭게 읽어내자는 것이 될 것이다. 무엇에 답하는 있음’(존재세계)과 어떻게에 답하는 ’(사유세계)의 관계는 사실 왜에 답하는 ’(실존세계)에서 비로소 참으로 뜻있게 읽혀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을 포함한) 사상사의 역사는 있음(존재)를 고정된 실체, (사유)를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로 파악하여 왔다. 이는 신학의 역사 속에서 한편으로는 있음 중의 있음이라는 실체화되고 절대화된 신으로 읽혀지면서 우상숭배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있음은 앎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체의 절대화로 읽혀지면서 자기도취를 낳기도 했다.그렇기에 우리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이 지닌 주체구도에 대한 사상적 전회와 함께 신앙의 자기성찰을 요구받는다는 의의를 지닌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절대화된 실체(우상)를 섬기는 것이 되어서도, 절대화된 주체로서 자신(도취)을 섬기는 것이 아닌 관계로서 삶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신과 인간의 거리와 만남으로서 -의 긴장임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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