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와 존재에 대한 생각

#. 본회퍼의 계시를 종교철학적으로 읽을수 있을까(2)

 

지난번에 "본회퍼의 계시를 종교철학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라는 글에 감사하게 많은 분들이 의견을 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았었지만, 전반적으로 본회퍼가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 즉 위로부터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한, 종교철학적인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그렇다. 기본적으로 종교철학은 '인간학'의 범주에서 실존변화의 연속성을 찾는다.) 그런데 계시는 매번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오가만 해야 하는가? 즉 계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로만 머물러야 하는가? 혹 계시란 존재자, 교리, 경험으로서 소유 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런의미에서 불트만의 계시이해는 주목할만한다. 그는 바르트의 '밖으로부터'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 계시이해의 논의를 실존범위에 터해 전개했다. "하나님에 대해 묻는 것은 인간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 말로 대변되는 그의 계시이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부터 신학적 개념의 기초를 얻고, 인간의 실재성을 "존재가능성"으로 두며 초월적 계시 앞에 서 있는 신학적 실존이해를 시도한다. 즉, 불트만은 하이데거나 '죽음' 앞에서 선 비본래적 실존의 본래적 변화를 '하나님' 앞에 선 죄인된 옛실존과 은혜받은 새실존으로 재해석함으로 인해 철학적 실존을, 신학적 실존 범주로 설명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회퍼는 불트만의 이러한 시도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잠재적 존재로서 존재개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계시의 존재 및 새 인간의 존재를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시도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자기 이해'를 은밀히 숨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본회퍼는 두 선배님에게 질문을 한다 "계시를 만난 새로운 실존은 어떻게 옛 실존과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고. 바르트에게 새실존은 철저히 '위로부터의' 천상의 계약에 깃대어 설명되어야 하고, 불트만에게 새실존은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지상의 실존가능성에 깃대어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와 아래는 진정 만날 수 없는 것인가. <행위와 존재>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바르트의 '초월성'이 지닌 불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불트만의 '실존성'이 지닌 연속성을 설명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 한 것을 이쯔음 공부를 하다보니, 새삼스럽게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비록 '신의 초월성'을 이야기 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이해를 자신 밖의 '세계'와의 공속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즉, 나의 존재는 오직 주체적으로 따로 톡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 즉 내던져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정립되어 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이해는 자신 '밖'의 세계이해와 동시적이고, 동시적으며, 관계적 공속을 이룬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자신 '밖'의 세계이해를 세계속에서 성육화하여 현재하고 있는 교회라는 '세계'로 바꿔서 설명해보면 어떻게 될까? 교회는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의 사건 앞에 서 있는 인간들의 인격공동체의 '존재'이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하이데거의 "본래적인 존재"가 '밖으로부터'의 차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도, 천상의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천상으로부터 이 땅 한가운데로 뚫고 들어와 육화된 교회공동체로서의 계시가 새로운 대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는 '그리스도로 현존하는 교회-내-존재'로 변화되고, 새로운 실존(비본래적-본래적 실존)이해는 이 밖으로부터의 '초월'이 내재된 공동체 안에서 '아담안에 있는 존재(계시폐쇄)냐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냐(계시개방)'라는 실존양식범주로 변화된다.  

 

만일 종교철학 혹은 철학적 신학이 "철학적 물음에 대한 신학적 대답"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하이데거의 현존재이해를 그리스도교적 현존재이해로 바꾸어 설명하는 인간학에 대한 설명이 그 응답이 될수 있지않을까. 계속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모든 시도는 조직신학논문을 쓰지 않고, 어떻게든 철학적 신학의 범주로 논문의 주제를 잡아보려는 나의 지난한 고민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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