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투르니에, 강자와 약자

 #. 강자와 약자

두 딸을 자기 휘하에 두고 폭군적 사랑으로 키우는 소유욕 강한 어머니가 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이 두 딸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는, 두 딸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모두 지시하고, 세상의 온갖 위험과 해로운 영향력에서 딸들을 보호해야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딸은, 어머니의 압도적인 간섭에 대해 약한 반응을 보인다. 어머니의 말을 순수히 따르고, 자기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 버린 채 항상 주저하고 지나치게 소심하다. 그녀는 이렇다 할 직장도 구하지 못하고 어머니 밑에 종속되어, 자기만의 인생도 단념하고 독립심도 모두 버린다. 어머니는 딸을 더욱 자기 멋대로 대하고, 딸이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어머니는 딸을 꾸중한 기회만 엿본다. 첫째 딸은 어머니의 꾸중이 두려워, 점점 더 유순해지고 고통스러워 한다.

반면에 둘째 딸은, 어머니의 말에 삐딱하게 반응하고 반항하며 강한 반응을 보인다. 어머니와 둘째 딸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각자의 입장만 고수한다. 딸은 어머니에게 반항하려고 집을 나가고, 평판이 좋지 않는 청년과 어울린다. 어머니는 딸이 정신을 차리도록 용돈을 전혀 주지 않지만, 딸은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러한 와중에 성숙해져서 언니의 유약한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얼마 안 있어 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니는 바보야, 언니 인생이 엉망이 된 것은 바로 언니 자신의 잘못이야, 나처럼 살아봐, 그런 생활 그만두고 언니 뜻대로 살아버리라구!” 동생으로부터 이러한 책망을 받은 언니는 자신감을 더욱 상실하고, 동생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거듭해서 그런 말을 하며 만족해 한다.

그 결과, 언니는 자신의 ‘공격 성향이 말하는 본능’을 억누르고 안으로 삭이면서 의심의 노예가 되고 양심의 가책과 자기 비하감에 시달린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어머니에게 깊은 앙심을 품지만,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억누른다. 대신에 어머니에게 고통스럽게 헌신하며 이 무의식적인 원한을 보상한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양심과 따뜻한 마음, 여성다움’을 억누른다. 동생은 이러한 불안정한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승리를 얻어야만 한다고 재촉인다. 한사람은 약한 반응에 그리고 한 사람은 강한 반응에 얽매여 그 반응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두 자매는 자신들의 잘못된 반응(강한반응, 약한반응)의 공통 원인이 되는 동일한 고통속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잃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은 두 가지 정반대 상황, 곧 왕성한 본능에 따라 살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과 감정을 묵살하는 것과(강한 반응), 본능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약한 반응)을 말한다. (강한 반응의 도덕적인 양심과 약한반응의 본능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채 충돌한다.)

강자와 약자에 대한 문제는 전쟁시든 평화시든,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국가간 혹은 연합 국가들간의 전쟁, 정당간 혹은 연합 정당간의 분쟁은 지금까지 설명한 보편적인 갈등의 최종적인 결과요, 그 극치일 뿐이다.

만일 약함이 패배 의식을 조장한다면, 강함 역시 자기기만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강자는 더욱 비참한 패배로 인해 고통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꾸만 더 강해지게 되고, 약자는 강자가 약점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채, 강자의 강함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필요 이상으로 짓누른다. 이러한 힘의 경쟁으로 인해 온 인류는 결국 파멸 이르고 말 것이다.
강자와 약자는 모두 패배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승리하려고 애쓰며, 현대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폭력적인 분위기, 파멸의 위협, 끊임없는 힘의 균형 속에 느끼는 긴장감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인간이 느끼는 약자의 절망과 강자의 불안 그리고 이 두 부류의 불행 이면에는 거대한 착각이 있다. 그 거대한 착각이란 바로 인류에게는 강자와 약자, 두 부류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서로 비슷한다.

차이가 있다면 매력적이든 보기 싫든지 간에 외적인 가면, 다시 말해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외부적 반응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 속에는 똑같은 내면의 인간성이 숨어 있다. (좌절과 두려움)

이처럼 사람을 구분해 주는 것은 그들의 내면의 본성이 아니라 누구나 느끼는 절망에 대해 그들이 반응하는 방식(약한 반응, 강한 반응)의 차이일이지 본질상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동일한 존재이다.

진정한 내적 치유는 약한 반응이나 강한 반응에서는 찾을 수 없다. 진정한 내적 치유는 심리학 수준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양심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본능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양심과 본능은 절대 파괴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도덕적 양심과 본능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심리적인 구원은 약자의 진영에서 강자의 진영으로 옮겨 가는 것이지만, 종교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성경적 관점은, 우리가 약자의 진영에서 강자의 진영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고백하여, 두려움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이 열매 맺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억압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젠,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문제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두려움을 직면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좀 더 유익한 두려움을 위해 해로운 두려움을 던져 버리라고 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폴 투르니에의 '강자와 약자' 를 정리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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