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행복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사는 지금,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열에 들뜬 것처럼 '성장'을 바라고, 죽음을 싫어하고, 삶을 칭송하고, 자원을 탕진하는 데 열중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번영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빈곤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발밑에는 이웃의 행복이나 권력과 비교하며 늘 자신의 불운을 자책하고 무력감에 시달리는 바삭바삭하고 윤기없는 사회가 펼쳐져 있습니다. (p. 10)


 

이 책은 희망찬 행복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틀린 행복론에 대해 충분히, 더 충분히 불편하자고 한다. 그 충분한 불편함의 시간을 갖았기 때문에 행복론이 뒤틀려졌다고 꼬집는다. 그래서 저자는 시종일관 질퍽한 불편함에 정직하게 마주하는 '태도'로 이 책을 썼다. 그래서 그가 묻는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고민으로 둘러싸인 시대에서 진짜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한다면 그 근거는 무언인가' 라는 화두는 특별하다. 불철주야 달리다가 멈추는 것은 곧 도태이자 패자라고 낙인찍히는 시대에서 우리는 분명 '불편함'을 공유하고 있다. 인간성을 잃어가는 최후의 인간은 '정신없는 전문인'이 되거나 '가슴 없는 향락인'으로 되어가는데, 정말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1. 행복의 종언 : '자의식의 비극-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자유경쟁의 규칙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강자-적응자는 번영을 누리고, 약자-부적응자는 스러지는 것에는 지배적 정당성이 있다. 자살하는 이들이 죽을 때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끊는 사회현상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10년 넘게 해마다 3만 명이 넘는 '자살자'를 내면서도, 그 '자유 경쟁'의 행복의 변신론밖에 말할 수 없는 사회, 이는 정말 행복한 사회인가? (p. 40)

 

자본주의의 '폭주'나 행복의 '변신론'이 제멋대로 날뛰며 비대해지는 이유는 '근대시대 이후, 자의식이 낳은 비극'때문이다. 고-중세 시대에 개인의 자유는 신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신 중심에 두었고, 그 질서 아래서 형성된 세계관을 공유했다. 그러나 근대시대가 되자 '신'과의 연결은 끊어졌다. 개인은 자유롭게 방면되어 자유로운 의사를 통해 살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전에는 '체제'가 알아서 판단해 주었다면, 이제는 ‘자의식’이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자의식은 한없이 비대해져 갔고, 근대에 각인이 찍힌 인간은 ‘고민하는 인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과잉된 자의식은 신경쇠약이라는 20세기 새로운 병을 탄생시켰다. 인지, 학문 등 모든 방면에서 이성은 진보했지만, 동시에 이 진보를 이루지 못한 인간은 한 걸음, 한 걸음 퇴락하고 쇠약해짐을 스스로 감수해야 했다. 자의식의 자유가 주는 인류문명의 혜택은 엄청났지만(계몽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 동시에 부족의 심리를 자기과잉을 통해 해결하려는 욕망은 끝없는 갈증을 유발시켰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잡아내고 싶어도 영원히 잡히지 않는 압박은 도무지 끝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전쟁같았다.

 

*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살벌한 기운이 사라지고 개인과 개인의 교제가 온화해진다고들 하는데, 그건 아주 잘못된 거네. 자각심이 이렇게 강해졌는데 어떻게 온화해진단 말인가. 뭐 얼핏 보면 아주 조용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서로는 굉장히 힘들거든, 꼭 스모 선수가 모래판 한가운데서 샅바를 붙잡고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지. 옆에서 보기에는 지극히 평온해 보이지만 당사자들의 배는 불룩거리지 않는가. (p. 48)

 

*참조 : 중심의 전환맥락.
근세로 넘어오면서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인간’이 중심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었다. 결정적으로 바꿔준 것이 ‘과학’이었고, 그것이 인간을 '신' 중심에서 해방시켰다. 16-17세기의 근대 시민주의가 대중화 되면서 18세기 ‘계몽주의’가 시작되었다. 과학주의는 절정에 다다르고, 인간은 신격화 되어 갔다. 하지만 한계는 얼마되지 않아 찾아왔다. 과학주의는 과학을 부인하면서 과학 스스로를 붕괴시켰다. 승승장구하던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는 무너지고 ‘소외와 허무’가 등장하였다. 근세 끝자락을 장식한 언어는 ‘소외’였고, 문학적으로 ‘허무’였다.
근세 끝자락에서 시작된 소외와 허무를 경험한 현대의 첫 시작은 ‘불안과 절망’ 이었다. 키에르케고르로 시작되는 현대의 시작을 잘 대변해준다. 삶의 철학은 이제 ‘죽음의 철학’이었다. 예전 사람들은 죽음을 잊어버리려고 형이상학적 지적 추구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죽음을 넘고 덮을 일이 아니라 정면으로 죽음에 직면해야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폐쇄주의와 염세주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직시가 반드시 필요로 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좀 더 깊게 들어간 것이 ‘실존주의’였고, 새롭게 접근하며 고민한 것이 ‘해석학’ 이었다.


 

2. '의미'라는 종교 : 믿고, 받아들이고, 내던지는 것.

 

무엇을 믿을 것인가. 신의 존재가 컷던 중세에는 신의 의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태어난 의미나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묻는 일은 불손한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은 해방을 맞는다. 자의식의 해방으로 인해 인간은 신이 되어야 했다. 인간중심의 근대시대에 개인은 자력으로 삶의 의미나 기쁨을 찾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악전고투를 평범한 일상 안에서 그려내야 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인생에서 얼마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이고,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 같은 것이 뚝 끊어지고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저 혼자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 의미는 생기지 않는 '폐쇄적 자기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믿고, 받아들이고, 내던지는 것. 이것이 쉬운일인가? 할수만 있다면 자신을 전부 내던져 버리고 싶지만 뭔가가 방해아혀 도저히 할 수 없을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낀다. <행인>의 소설 속 주인공의 한장면은 이를 잘 표현해 주었다.

 

* "죽든가 미쳐 버리든가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든가, 내 앞길에는 이 세가지밖에 없어" 형님은 역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형님의 얼굴은 오히려 절망의 골짜기로 향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종교에는 입문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주는 것도 미련에 저지당할 것 같고, 그렇다면 뭐 미쳐 버리는 거지. 하지만 미래의 나는 제쳐두고, 현재의 나는 제정신일까. 벌서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난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p. 135)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크고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내 던질 안정한 장소가 없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장소가 필요하지만, 그 장소가 안정하지 않다는 말이다. 생물학적 기반인 자연은 지진과 쓰나미등으로 불가항력적인 위협으로 다가왔고, 사회적 기반인 국가(지역)는 실체가 없는 공허한 표상이 되어 자신의 매개적 대표가 되어줄 수 없고, 사적인 기반인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였던 과거와 달리 긴박한 역할극이 계속되는 극장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신뢰의 상실'과 '세계에 대한 절망'은 자신과 바깥 세계의 연결을 끊어놓았다.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길도,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이나, 그 주변에 있는 것의 의미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의미의 상실은 심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끝은 '소외와 허무'였고, 인간 중심의 시대의 그 중심은 사라졌다. 이제는 어디가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는 '탈 중심'의 시대가 되어갔다.

 

*참조. 근대와 현대의 자타개념.
근대가 '주체-객체' 언어의 등장이라면, 현대는 ‘자기-타자’ 언어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근세는 '주'가 '객'을 맞이해서 바라보고, 잡아낸 것을 개념화 했다는 점에서 그 '객체'는 사실 '주체'의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은 이미 자기 안에서 상으로 받아내고, 잡아낸 틀이다. 그런의미에서 서로는 서로를 대상화 해왔다. 내가 만든 그를 만나고, 그도 그가 만든 나를 만든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정적인 '대상'의 관점을 동적인 '상대'의 관점으로 전환시켰다. 모양을 잡아내는 정지된 근대의 방식이 아니라, 자와 타의 관계가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허용한다. 그런의미에서 이제 세상은 나의 세계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세계이다. 정지되지 않아 잡아낼 수도, 개념화 시킬수도 없는 상대는 탈 중심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3.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하여 : 진지한 태도

 

신뢰의 상실과 자의식의 비극으로 우리는 돌아갈 길도 잃고, 갈아설 수도 없는 문 아래 주저 앉았다. 근거로 삼으려 했던 것들이 탈근거화 되고, 소멸되었으며,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하여, 자기를 잃어버리라고 한다.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 이후에 과도한 자기찾기가 가져온 비극에 대해 멈추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나름대로 자신을 찾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양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수렴화' 시키고, '획일화' 시키는 비극이 오고 있지 않느냐고 꼬집는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개인적 공명' 이다. 즉, 새로운 공통 언어가 필요하다. 서로 공명하고 내던지고 믿을 수 있는 공통항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 지금까지의 과잉된 '행복 방정식'에 대해 잠시 눈을 감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행복방정식을 그대로 적용했다가는 자신은 틀린사람이거나, 자신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추방' 형 사고에 조금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존엄'이 의식되는 사회를 요구한다. 인간이 가진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깊게 의식되는 사회야 말로, 공적-사적 영역이 해체되고 있는 현실에 새로운 숨결로 살아날 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공명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효율적인가 비효율적인가, 유효한가 무효한가 하는 것 너머에 있다. 이 가치는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 라고 말하려는 '태도'에 있다. 저자는 수용소 체험을 한 프랑클이 인간의 궁극적 가치로서 '태도'를 들었던 이야기를 들면서 행복의 변신론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보자고 초청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의미의 시작이 '이 인생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든가 '이 인생에서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 는 의문과 불만을 토로하며 삶에 대해 답을 쫒는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정 반대로 생각해 보자고 한다. 나의 물음이 시작이고 삶은 대답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묻고, 내가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나에게 물어오는 질문에 대해 가 하나하나 답해 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용소 체험을 한 프랑클은 '너는 견디기 힘든 이 굴욕을 견딜 수 있는가?' 라든가 '너는 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온 것에 대해 하나씩 '예, 저는 받아들입니다''이것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대답해 갈 수 있는 사람만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았고, 반대로 도중에 대답하는 것을 그만 둔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탈락하고 말았다고 이야기 한다. 삶에 나에게 물어오는 것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태도'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게다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태도'라는 것이고, 운명을 그저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것을 말한다. (p. 187) 그것이 저자가 우울한 시대의 한복판에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는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 생각되어도, 인생이 끝나기 1초 전까지는 언제든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ㄴ다.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다 보면, 나중에 돌이켜보았을 땐 저절로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p.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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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 위치에서 떠오른 생각


 

1. 익숙한 시각에 대한 경계 : 태도에서 용기로.

 

'낙관론은 힘으로 통하고, 비관론은 허약으로 통한다.' 는 말은 얼마나 익숙한가.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허약에서 힘으로의 변혁적인 이동을 독촉이지 않나 싶다. 이 책이 여타 자기계발서와 달랐다고 생각한 이유는 힘이 아닌 허약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고, 희망적 자위가 아닌 현재적 태도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숙독한 후, '태도'라는 결론에 다다름에도 여전히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태도' 마저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는까를 괴로워 하는 나의 '시각'에 있다. 저자는 태도를 지닌 '존재'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나는 성취해 내야할 '방법'으로 해석하는데 익숙하다.

 

진짜 자신을 찾는것은 자기를 잃어버림으로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은 나에게 자기시각에 대한 '맹점' 을 생각해보게 했다. 부족과 결핍을 용납할 수 없는 시대정신에 풍요와 채움을 위한 달음박질은 거침 없이 빠르다. 맹점이라는 것을 인지할 시간도 없다. 내가 바라보는 바깥도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는데, 어찌 내 안에 숨겨진 맹점을 성찰할 겨를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책의 결론은 '태도' 가 아니라 '용기'였다. 용기도 태도의 또다른 방법이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내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함을 질퍽하게 감수해 하면서 터져나왔던 무엇이었다. '이대로는 아니다. 무언가 이것은 아니다.'라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무엇에 대해 나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 맹점(내가 추구한 시각과 방법)을 공격당할 때 오는 불편함에 대해 나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각을 동경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각을 밀어내려 했다. 마치 그동안의 시각이 저차원적이고, 수준 떨어지는 질적 삶으로 돌진하고 있다고 꼬집는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속에 터져나오는 불편함은 이미 나에게 주어져있었다. 그런의미에서 용기는 생기는것이 아니라 일어나는것이었다. 없던것을 만들어내야하는게 아니라 있던것을 일으켜내야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태도는 일으켜진 용기에 의해 가능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2. 가보지 않은 길, 아직 가야할 길 : 믿고, 받아들이고, 내던진다는 것

 

자기과잉의 방법론과 세계관으로는 맹점을 발견할 수 없다. 진짜 자기 찾기를 위해 자리를 비운다라는 말 자체를 과연 이해한다는게 가능하기라도 할까. 그것은 잃어버린 사람들만의 특권이고, 비워본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자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껏 '나와 다른 그들'이라는 경계를 긋고, 도려내 던져도 여전히 불편한 이유가 무엇일카. 그것은 막연하고, 또 동의하지도 않지만 나도 이미 획일화의 트랙위에 놓여 있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약이다. 큰 그림을 좋아하고, 구조와 체계를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진 나에게는 구조주의와 탈 구조주의적 사고는 일종의 행복(쾌감)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림과 구조가 파악되지 않는 흔들리는 유동성을 허용하고, 또 표류한다는 것은 일종의 불행(슬픔)이다. 지난 몇달을 돌이켜볼 때,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해본 자기성찰은 일상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였다. 가장 친한 사람들로부터 '과연 현철이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물음에는 항시 의구심과 허무함이 숨겨져 있음을 느낀다. 그들이 쏟는 사랑과 관심을 팅겨낼 만큼 나는 젖어들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사 내가 전체를 장악하고 지배하고, 이뤄냈을 때야 비로서 주변을 둘러보는 성향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항상 '긴장' 되는 곳이다.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ㅡ파악되지도 않을것 같지만 믿고, 받아들이고, 내던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허술하게 일단 믿어봐 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이론뿐만 아니라 질퍽거리는 인생까지 맞물러 증명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나는 마냥 편하지 않다. 이것이 열등감때문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있지만, 열등감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나는 더없이 이 긴장이 괴롭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불편하게 여기 머무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노력해서 알수 없는 '일치의 전통과 방법'에 대해 내가 도무지 부인할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3. 지금, 여기.

 

맹점이 주는 비극도 느끼고, 가보지 않는 길도 제시되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까지 내가 과거를 원망하고 후회했고, 지금부터 내가 미래를 상상하고 동경한들 지금. 여기, 이순간에 느끼는 불편함을 깨끗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24시간 중 24시간을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동경으로 꽉꽉 채워 넣기 바쁘다. 현재는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대체되어 간다.
내가 삶에 대해 답을 찾아나가기 이전에, 삶이 나에게 물어온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성경도 내가 성경을 읽기 이전에, 성경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고 하듯이, 혼란스럽게 표류하는 나에게 요즘의 삶은 대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 라고 하나씩 하나씩, 선택해야 할 책임이 매순간 주어져 있는 셈이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금, 여기서뿐이다.

 

계획은 없다. 아니 계획대로 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계획에 목맬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점을 구지 찾자면 '틈'이다. 이전에 삶은 틈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삶은 가슴속에 터져 나오는 무엇이 낯섬을 직면하라고 도전하고, 용기를 일으켜한다고 부추긴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타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야 겨우 살수 있다고 한다. 너는 맹점을 지녔고, 너는 모든 길을 가보지 않았으므로 타자의 접근에 대해 충분히 불편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바보처럼 지금, 여기서 나는 불편함을 선택했다. 그리고 충분히, 더 충분히 불편함이 묻는 질문에 대해 삶으로 대답하기 위해 신학대학원 입시를 멈춰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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