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발췌

사르트르: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실존’ /이기상 교수님

『존재와 무』는 그것의 출현과 함께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작품은 전통적인 학술 논문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독자들은 갑자기 전혀 새로운 방식의 철학함과 직면하게 된다.

이 책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좇아 <하나의 현상학적 존재론의 시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존재’의 문제에 응용했다면 사르트르는 그것을 ‘자유’의 문제에 재응용한 셈이다. 그는 후설의 방법을 실존주의적 방향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실존주의가 근본적인 ‘인문주의’의 바탕이라고 선언한 점에서 하이데거와 다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실존주의 무대의 중심을 차지한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본래성”을 “기초 존재론”이 아닌 “기초 인간학”의 지표로서 본다. 사르트르에게 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 본질에 앞서 간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전통철학들은 우리의 본질이 우리의 실존에 앞서 간다고, 즉 우리는 모든 사물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 자연, 이성과 같은 선천적인 원리들에 의해 미리 규정지어져 있다고 가르쳐왔다. 이러한 이론들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이 세계에서 충실하게 실현해야 할 어떤 주어진 정해진 인간적인 “특성”과 “본질”을 갖는다. 즉 인간은 그들 앞에 놓여진 원고를 들고 대사를 외는 무대의 ‘배우’와 같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전통적 태도를 본래성과 대비하여 “근엄성” 또는 “심각성”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사회에서 예정된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또 우주에서 어떤 지정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실존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은 근엄한 사람은 그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실존적 선택을 어떤 자연적 또는 신적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가정함으로써,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불안과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근엄한 사람에게 실존은 이미 정해져 있는 본질에 충실하는, 즉 그의 주어진 자아에 충실하는 길이다.

이에 반해 본래적인 사람은 진실로 어떤 주어진 자아도 없다는, 즉 “우리의 실존이 우리의 본질에 앞서 간다”고,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창출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선택’한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선한, 악한, 무차별적인) 어떤 무엇인 것은 우리가 그렇게 태어났거나 또는 신에 의해서 그렇게 창조되었거나 또는 우리의 주위환경, 즉 유전인자, 가정교육, 또는 종교적 훈련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 자신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한 우리 각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행한 의미창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자아의 ‘자유로운 기획투사’로서 우리의 실존이 우리의 본질에 앞서 가는 까닭에 인간은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에서의 첫 번째 귀결은, 인간 모두는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인”이고 또 그 자신의 어깨에 실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환경적 영향의 결과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사르트르는 우리 각자는 자신이 무엇이고 또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아무리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도 다른 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신분, 국적, 언어 등)에 기반해서, 우리는 각기 나름의 역할을 창출해낸다.

군인 사르트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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