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연습1. 현상학과 그 너머

 

현상학 , 그 너머


* 현상이란 말의 발전 : 외관(단순경험)->인식
현상학은 제목 그대로 경험주의이다. 서구 철학의 역사라는 것이 우리 감각에 나타나는 외관을 넘어서 세계의 본질을 사유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 나타난 외관은 참되는 못한 것(가짜)이라는 뉘앙스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왔다.
(칸트라는 철학자도 현상은 인식 주체에 의해 구성되어질때만 의미를 갖다는다고 했었죠.)


그런데 이 현상이라는 것이 의식의 구성을 받아야만 의미를 갖는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실재성, 존재성을 듸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현상학의 시작이었다.


"현상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반성철학
현실세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 세계 자체에 대한 탐구에 경도된다. 현상학의 등장으로 반성철학은 인식론적인 틀을 나륾대로 방식으로 가지게 된다. (니체, 딜타이 : 생철학, 사르트르 : 실존주의 등)


생성하는 세계에 대한 긍정(니체)도 한몫을 했을것이다.



1) 후설.
후설이 진단한 자기 시대는 모든것이 사물화 되는 시대였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증발하고 모든것이 숫자와 그래프와 함수등으로 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경향에대해  위기를 느낀다. 특별히 인간의 의식, 주체성, 마음까지도 대상화하고, 양화하고, 분석하고, 객관화 하는 경향에 대해 반대하였다.
(현상학 입장에선 영국의 경험론도 인간의 의식과 주체성에 기반한 경험철학이 아니라 인간을 분석적으로, 원자론적으로 본 경험론이다)


후설이 말하는 현상학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로고스를 얻기 위해 현상을 넘어서로 했던것에 대해 반대하며, 현상넘어서가 아닌 그 현상 경험자체로 경험하는 차원의 로고스를 탐구하려 하였다. 그 로고스는 한마디로 "의미" 였다. 즉 수학법칙, 규칙같은것이 아니라 경험의 '의미'를 찾아서는 것이었고, 후설에 게 경험은 인간이 경험하는 '의식'이었다.


* 후설이 말하는 현상(의식)
후설은 현상자체 내에서 순수한 경험과 순수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꽃을 보면 꽃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꽃은 싫다. 는 꽃에 대한 순수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의 의미(로고스)를 찾으려면 우리의 비본질적인 순수하지 않은 경험을 솎아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현상학적 환인이라고 했다. 우리의 의식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말하는 현상이라는 것은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판단중지)를 통해 의미를 본질을 찾으려는 것이다. (의식의 지향성 : 계속되는 의식은 순수한 의미를 찾으려는 것)


후설은 당시 관념의 옷에 의해 수량화하고, 분석하고, 대상화 하려는 객관주의에 대항한다. 유럽의 학문은 이러한 근대적 학문의 틀을 현상학으로 구제하려고 하였다. (수식으로 파악하는 세계가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하는 세계.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근대적 이성 이전에 작용하는 의식행위가 먼저 작용)




* 후설의 현상학이 준 영향. 실존주의.
그리고 이 후설의 현상학은 하이데거를 거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로 전환된다.


현상학은 하나의 인식론 철학이고, 그것을 좀더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형태로 일반화해서 나타낸 것이 실존주의이다.


전통철학이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생각하면서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인간이라는 본질적  관점을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하는 철수, 영희라는 실존적 관점으로 전환하였다. (실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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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이데거 : 어떻게 번잡한 근대적 일상에서 빠져나올것인가?


* 배경
후설은 대상(현상)은 늘 의식에 주어진 대상이며, 의식 바깥에는 다른 존립방식을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의식활동에 선행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먼저 어떤것이 '존재'해야만 그 다음으로 그것을 의식할수 있다는 반론이었다. 따라서 현상학은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존재에 대한 연구가 될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현상학과 해석학의 종합.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우고,
딜타이에게서 해석학을 배운다.


하이데거는 후설과 달리 현상을 본질의 인식하려는 담론이 아니라(순수의식), 언어를 통해 존재를 이해하려는 담론 즉, 해석학적 담론으로 현상을 이해한다. 드러나는 현상을 지각하는 차원이 아닌 현상을 언어를 매개로 해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또한,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존재의 언어를 파악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이전의 철학방식은 존재자는  사유, 탐구, 관찰, 분석등 이성의 무기들은 모두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인식론의 영역에서만 화려했을뿐, 거꾸로 존재의 존재방식을 묻는 존재론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존재하면서 존재를 묻는 질문을 철학사에 해본적이 없었기때문에 기존의 형이상학틀에서는 존재를 사유할수없었다. ~란 무엇인가의 물음이 성립하려면 ~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처럼 존재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존재를 묻는 엉뚱한 물음이 될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다자인의 숙명은 존재의 근원에는 물음의 형식만 가능하게 하고 답은 없는 무가 놓여있다고 말하면서 인식론적 한계를 말하고, 동시에 형이상학의 극복으로 언어를 내세우면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존재의 모습을 타나낸다고 말하였다. 


존재자는 드러나 있고, 로고스는 언어로서 존재를 드러나게 한다. 언어 속에 보존하는 한 존재는 자기모습을 완전히 열어보인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하였다. 존재자체의 존재방식



이를 종합하여 현상학-해석학의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이끌고 간 인물이 하이데거다.


*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하이데거는 그의 불후의 명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 대해 물었다. 주목해야 할것은 그가 '존재자'(사물-사람)가 아니라 '존재'(있다.있음)에 대해 물었다는 것이다.


이 '존재' - '있음' 이라는 것은 존재자들이 존재자로서 말하여질수 있게 하는 기초개념같은 것이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그것을 보거나 만질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자에겐 존재가 숨겨진 어떤것이었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어던 종류의 존재자들(사물들)이 존재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특징이 무엇인지를 논해왔지만, 정작 논해야할 '존재'-'있음'에 의미가 무엇인지는 논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존재론'보다 앞서야하는 질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존재에 대해 묻고 논할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존재가 아닌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자뿐이라면서 이 탐색의 시작은 인간이라는 존재자로부터 시작할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인간을 '거기에 있음' 을 의미하는 '현존재'라고 이름붙인다.


인간은 항상 일정한 세계 안에 있고 자신을 세계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상태에 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의 세계-내- 존재
하이데거가 말하는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철학사의 또다른 혁명을 일으킨다. 이제까지 인간은 세계를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주체였지만, 사실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세계에 놓여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단단하고, 주체적이고 고정된 실체라는 기반에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은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응고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려 있고, 던져진 창문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즉 인간은 세계와 별도로 존재하면서 세계를 바라보거나 마주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언제나 처해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후 항상 세계의 일부분으로 던져진 존재이기에 더이상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실존철학의 교두보역할을 했다.


sein 존재, 존재함 / da 거기, 지금
dasein 거기에 있음, 현존재



*하이데거의 불안: 죽음이 주는 역설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도달할수 있을까. 인식을 위한 마음의 두 원천인 감성과 이성은 존재자에 관여하지, 존재에 관여하지 못한다. 즉 감성은 존재자를 경험하고, 이성은 판단속에서 존재자를 규정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성도 아닌 이성도 아닌 제3의 길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기분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적으로, 원칙적으로 세계의 1차원적인 발견을 순전한 기분에 내맡겨야 한다.
이 기분 가운데서 현존재를 본래적 존재의 자리로 인도해주었던 것은 바로 '불안'이다.


공포라는 것이 무서운 어떤것으로 부터 나오는 기분이라면, 불안은 그 대상이 없는 것으로 부터 나오는 막연함이다. 불안은 대상이 없다. 즉 '무'에 대해서 느끼는 기분이라는 것이다.


무에 대한 불안을 야기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이것을 '죽음' 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통해 현존재는 무에 직면하는데, 바로 죽음 앞에 불안은 이 무의 가능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불안은 세상속의 여러 이야기속에서 망각되었던 자신의 고유한 존재함의 방식을 드러내준다.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향한 존재를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장악하는 자유에 대해서 자유로운 존재로 드러나게 해준다. 유한하게 실존한다는 것이야말로 유한한 실존의 시간을 장악(결단)할 수 있는 선택과 자유를 획득시켜준다는 것이다.


이 결단을 통해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본래적 존재의 자리를 알려주고 서로 함께 있도록 해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결단을 철학가와 시인, 정치가가 하도록 이끈다고 하였는데. 이는 훗날 결단한 현존재와 민족들이라는 개념으로 나치 철학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기도 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존재의 본래적 의미를 찾아주려는 하이데거의 기획이 파시즘적 독일 민족주의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일으킨것이다)




3) 사르트르 : 인간은 자유로 선고되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대상이란 항상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 이라면, 사르트르는 우리의 의식 밖에 실재함을 전제로 한다. 대상은 인간에 의해 의식되든 의식되지 않든 간에 그 자체로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의식을 추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즉자(그자체로 본래 있는 존재)로서 신체를, 대자(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로서 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주관과 객관 이전에 경험하는 이 의식의 근거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무였다. 의식은 주변과 자신을 의식하고, 심지어 의식을 의식하지만 물질과 달리 전혀 보이지 않는 무엇이었기 때문에 무이다.


존재그건가 비어 있으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근거를 채우기 위해 뭔가 외부 대상을 지향할수 밖에 없다. 인간을 빈그릇에 비유하자면, 그릇이 잉크, 물, 음식물을 담지만 담겨진 모습이 포착되는 순간 자신이라고 할수 없는것처럼, 인간존재는 끊임없이 외부 대상을 지향하면서도 대상이 포착되면 그것이 자신의 존재근거가 '아니' 라고 부정한다. 그리고 부정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무엇을 찾아나선다. 결국 무는 존재의 배경으로서 존재하며, 무가 있음으로 해서 존재가 그 윤곽을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무란 존재할수 없는 것이며, 오직 존재를 드러내는 부재이거나 부정하는 힘으로서(~가 아니다) 무가 존재한다.  이런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자유는 선고되어지것이라고 말한다. (법정에서 말하는 형량이선고되는것과 같은 비유)


최악의 순간에도 인간은 자신의 빈 근거를 원하는 것으로 채울수 있는 자유를 가졌지만, 그 존재근거로 그 자유를 포착하는 순간(의식(대자)이 존재(의식의 대상)를 인식하는 순간 의식(대자)은 무(~아니다, 존재의 부정)가 되며 존재가 의식 위로 부상한다. 반면 의식을 의식하면 존재는 과거가 된다. 동시에 그 의식은 결핍된 자신을 찾기 위해 미래로 투기한다. 결국 인간의 인식, 즉 대자존재는 끊임없이 무화(~아니다)하면서 무를 만들어 내는 무인것이다. 대자는 이렇게 끊임없이 무화하면서 미래로 나아가지만 결국 그 무란 채워질리 없는 없음이다.


사르트르에게 '존재와 무' 란 책이 설명하고자 했던, 존재란 즉자 존재의 존재방식이고, 무란 대자존재, 인간의 존재 방식을 가르킨다.


인간의 존재방식은 무다. 인간은 없다. 자기 안이 텅 비어 있기에 항상 바깥을 지향하며, 지향하는 것마다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밖에 없는 , 자유로우면서도 자유의 부담을 숙명처럼 지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리고 의식의 본질은 자유다.


* 사르트르 공동체 : 타인의 지옥
샤르트르는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대자존재에 이어, 이제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에 대하여 존재하는 대타존재로 설명한다. 이는 내가 하나의 주체이지만,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하나의 대상처럼 즉자존재로 취급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특히 타인의 시선을 통해, 즉 타인이 나를 바라봄으로써 즉자존재로 전락하는 수치심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로서 나는 객관화되고 사물이 되며 타인에 대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분개하며 서로가 상대방에 의해 규정되어지지 않기 위해 처절한 상호투쟁을 하게 된다.


사르트르에게 공동체란 나의 의식만큼 자유로운 다른 의식에 대한 투쟁과 인정을 통해 도달할수 있는 것이었다. 대타존재를 통해 개인의 실존과 자유가 타자의 존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 그는, 우리는 스스로 결단하고 자유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 선택이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실존주의는 자신의 타자에 대한 책임까지를 염두해두는 사회 참여적인 실존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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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인간을 하나의 실체처럼 응고시켰다. 모든 것을 소거하고 남은 것이 '의심하는 주체'이므로, 결국 인간은 심리적인 자아같이 돌처럼 단단히 굳은 조그마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를 통해 인간이라는 인식의 주체와 사물이라는 인식의 대상의 분리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주관과 객관의 분리, 실증주의, 자연과학이 발전을 이룰수 있엇다.


하지만 후설의 현상학은 이를 부정했다. 경험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에 선험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경험(현상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에 대해 의심했다. 하이데거는 더 나아가 의식활동 이전에 선행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자했고, 다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란 경험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경험당하는 세상속에 놓여있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낳았다. 마지막으로 사르트르에 이르러 포착할수 없는 모호함으로 남은 인간의 존재근거는 '무'-'아니다'화 되는 텅빈 존개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존재의 근거를 대상을 향해 지향하면서도 대상이 포착되는 순간 자신은 그 대상이 자신의 존재근거가 아니라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상학으로 인한 인간의 이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낳았다. 중세에 신이 만든 인간으로, 근대에는 데카르트에 의한 주체적 실체가 되었다가, 현대의 현상학에 이르러 속이 버어버린 무의 존재가 되어버린것이다.  


자신과 세상의 존재근거를 찾기 위한 이 전쟁은 현상학 그 너머, 구조주의자들에 이르러 의식이 아닌 의식 배후에 숨겨져있는 보편적 '구조'를 살펴보기에 이르렀다.


구조주의와 그 너머..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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