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연습3. 구조주의, 그 너머(2)

구조주의, 그 너머(2)


그 너머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부터 시작된 구조주의는 언어의 체계와 각각의 체계를 갖춘 보이지 않는 구조들로 무장하고 많은 분야로 확산되어 갔다. 바르트는 소쉬르의 구상을 통해 사화와 문화현상을 분석했고,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조차 언어의 체계로 재해석해냈다. 푸코는 시대와 권력에 따라 달라지는 심층을, 데리다는 서구 사상이 자리잡고 있는근거들이 최종적일수 없다는 해체를강조함으로 다각적인 심층구조의 반성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너머라는 새로운 반성철학을 요구하도록 시대를 부추기고 있다.                


1) 자크 라캉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소쉬르의 언어학을 적용함으로써 무의식을 좀 더 선명하고 과학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다시말해 라캉은 프로이트의 의학적 혹은 개인 심리학적 욕망 이론을 언어학과 결합해 정신분석을 치료수단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담론으로 확장시켰다. 그의 이론은 '거울단계'에서 부터 시작된다.


*갓난아기의 거울단계(상상계->상징계)
라캉은 거울을 통해 갓난아기가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주체를 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생후 6-18개월까지의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대단히 즐거워 한다. 이 시기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자신의 신체를 동일시 함으로서 어렴풋이 그것이' 나' 라는 것을 인식하려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아이는 엄마와 자신을 혼동한다. 가장 친근한 엄마아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고 , 더 넓게는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캉은 이시기를 상상의 나만 존재할뿐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여 '상상계'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의 아기는 자기 자신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며, 자신 이외의 모든것을 동일하게 보는 관계인 '이자 관계'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언어활동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므로 이 거울 단계의 아기는 언어를 매개로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거울속의 나가 허구임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동일성을 가지고 느끼는 엄마와 아이 사이를 갈라놓는 제3자다. 아이는 이 제3자로 인해 '나'를 인식하게 된다. (아버지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의 법이고, 질서로도 해석이 된다) 아니는 나를 인식하면서 금지와 법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은 타인의 세계 또는 사회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동시에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그런데 타인의 세계나 사회의 질서가 미리 존재했듯이 언어의 세계도 미리 존재했었다. 결국 아이가  갖게되는 나는 코기토처럼 순수한 이성적 자기로부터가 아니라 언어속에 위치지워지고 사회와 타인들의 세계속에 위치 지워진 나이다.


(쉽게 예를 들어 아기에서 벗어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누구의 아들, 딸', 친구, 직책, 그와 같은 지칭어; 이라는 관계에 복속될수 밖에 없으며, 이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신분과 이름을 내세운다는 의미에서 '상징계' 놓여있는 존재가 된다.
거울을 깬 이래로 아기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세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의 자명성에서 출발하는 근대적 인간관과 확실히 결별한다. 인간은 언어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언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언어의 질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히려 언어의 질서가 인간을 인간으로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주체와 다른사람들이 불러주는 주체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가 생겨난다. 전자는 스스로 상상적 관계에서 비롯된 주체고, 후자는 타인이 붙인 상징적 관계에서 비롯된 주체기이기때문이다. 라캉은 도덕적 주체(사회 규범을 인식하고 그에 따르는 주체)란 애초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름붙여진 이 주체의 '틈'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타인들이 내게 부여한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불과한것이고, 이러한 세계안에서는 자신을 결정하는 원인을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란 환상에 불과한것이라고 주장한다.


*내 욕망은 내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아기는 어머니의 욕망을 만족시ㅕ주기 위해 스스로 이 욕망의 대상인 남근(성기라기 보다는 남성의 기표나 상징)에 자신을 동일화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아기는 자신을 타인(엄마)의 욕망에 종속시킴으로써 하나의 독립적 주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되길 바라게 된다. 다시말해 나의 욕망은 내가 동일화하고 싶어하는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이 되는것이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내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욕망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무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나의 진술은 타자의 진술에 의해 구성된다. 나는 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언어구조(이를테면 문법)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해 이야기하며, 타자의 욕망에 의해 내 욕망의 내용을 구성한다. 그런점에서 '타자'란 내 욕망이 겨낭하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무의식이 스스로 말하는 장소이다. 즉 욕망은 존재의 결핍과 관계하면서 무의식의 밑바닥에 침작하며 주체의 상상적인 것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 결핍된 욕망.
자신만이 존재했던 세상(상상계)에서 말로표현되는 분리와 소외의 세상(상징계)로 바뀌는 과정은 아이가 언어의 세계에 어떻게 편입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과 같다.


아이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도, 자신속에 피어오르는 원초적 충동들도 언어로 표현해 내야한다. 그리고 이 전치의 대상에는 분리를 통해 생긴 강렬한 결핍(ex 엄마)도 포함되는데, 이러한 것들이 기표언어로 바뀌어 표현된것을 '욕망' 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표로 전치된 욕망은 언어의 체계속에서 지워진 욕망이고, 기표가 가진 변별성에 기초한 욕망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 내부의 근원에서 발현되는 순수한 욕망이라고 말할순 없게 되었다. 자아와 욕망은 언어위에 세워지지만 타인의 언어가 자신의 내면을 정확히 표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즉 기표는 기의에 영원히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이처럼 한 개인에게 언어가 개입되는 순간 분명히 설명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영역이 생겨난다. 그 영역은 충동과 결핍이 존재하는 영역이며, 주체는 좌절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대상을 찾아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존재결여의 환유다.(끊임없이 비슷한것과 전치할 것을 찾는다)



2) 미셸 푸코
많은 구조주의자들이 공시적인 관점에서 구조를 분석했다면, 푸코는 역사적 차원에서 딴지를 건다. 진리가 하나의 원천을 시대가 지날수록 추적/발전하는 역사가 아니라 시대와 권력에 따라 '지식'이 달라지는 역사라고 딴지를 건다. 진리는 고정된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무엇인것이다.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지식'과 '권력' 이란 무엇일까?


* 고고학의 도구로 바라본 : 지식
푸코의 관심은 지식의 내용에 있지 않고 지식을 둘러싼 관계, 즉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있다. 다시말해 "지식이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무엇이/누가 이러이러한 지식을 규정하는가?" 를 문제삼는다. 내용보다 사물보다 표현과 담론속에 숨겨진 실체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적에 적합한 도구는 '고고학' 이었다. 역사가 동영상이라면 고고학은 사진이다. 역사(동영상)에는 흐름을 강조하며 전후맥락을 통해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하지만, 고고학(사진)은 오히려 과거의 한 장면, 발굴된 유적을 통해 과거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 우선된다. 마치 고고학자는 신을 믿지 않지만 종교신전의 지층을 파헤치며 어떻게 당시의 사람들이 신에 대해 생각했는지를 밝혀내는데 집중하는 것과 같다. 정리하자면, 인과관계가 아니라 표현과 담론의 실체를 추적하는 고고학적 방식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푸코가 대표적으로 예로 든것은 "광기"이다. 광기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시대에는 예지적인 재능으로, 르네상스시대에는 이성을 넘어선 영역으로 여겨지며 부정적인 이미지로 배제되지 않았었지만 17세기 이후 광기는 윤리적인 결함으로, 병원에 격리해야할 존재로, 정신질환-치료의 대상으로 규정되며 부정적인 이미지로 배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지식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으로 진행되면 안된다고 한것이다.


흔히 역사를 모종의 목적을 가정하고, 그 목적에 따라 인류가 연속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가 각시대마다 광기를 규정하는 담론이 연속적이지 않듯이 불연속적인 단절속에서 '배제의 지식'를 만들어낸 모종의 '권력'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 계보학의 도구로 바라본 : 권력
권력이라고 하면 권력의 소유자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그런 실체적 개념(정치권력, 권력단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 무의식적 개념까지 총괄하는 은밀하게 침투한 정체불명의 힘이다.


앞서 광기를 근대부터 다르게 간주하게 된것은 인간 집단이 이제 부터 광인을 이런식으로 처리하자고 약속한것은 아니었다. 그저 광기에 대한 지식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광인이 사회에서 배제된것이다. 이렇게 권력은 행사하는 주체없이 드러나지 않은채 작용된다.


예컨데 정신병리학이라는 지식에는 특정한 사람이 광인이라고 규정하고 배제할 권력이 숨겨져 있다. 그 지식의 범위내에 있는한 의사의 말이 정신병리학을 인정하는 사회의 담론이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고, 광인은 배제되고 무시되어야할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계보학적인 도구로 지식에 숨겨져있는 권력의 관계를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 배제된 반쪽짜리 역사.
광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광기라는 정의가 순수하게 대상/사물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 즉 지식과 권력을 통해 정의되어왔다고 살펴왔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다. 정의라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이 담론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광인은 사실 인간의 이성을 상실한 사람이기에 광인의 언어는 존중받을수도 믿을수도 없다고 단정지어진다.


하지만 이성의 입장에서 이성이 아닌것을, 정상의 눈에서 비정상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푸코는 이것을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라고 불렀다.


동일자의 역사속에서는 타자의 역사를 기술할수 없다. 그러나 타자는 역사속에서 엄연히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않는것처럼 배제한것 이것이 동일자의 모순이다. 타자는 언제나 동일자의 경계 바깥에 있다. 이러한 배제의 역사는 때로는 이성이라는 권력으로, 전문적/학문적 지성이라는 권력으로, 서구방식이나 지배적방식의 고정된 사유틀을 드리대는 권력으로 은폐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적어나가는 권력과 지식이라는 말도 '힘'과 '앎'이라는 말로 환원할수 있음에도 전문용어를 쓰고 있는것이라면 푸코의 입장에서는 지식에 불필요한 권력을 실어 알아듣지 못하는 타자의 세계를 배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것이다. 만약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 이면에는 은밀한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것임이 틀림없다.   



3) 자크 데리다


푸코가 계보학/고고학을 통해 은폐된 권력을 드러내면서 역사를 재해석했다면, 데리다는 서구 사상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순수한 기원(주로 문자)에 대한 맹신을 분해해나갔다.


*목소리와 흔적
데리다는 서구의 사고방식을 가능하게 한 숨겨진 조건으로 '문자'를 탐구하는 작업을 한다. 그 대표적인 시발점은 루소의 '고백록'에 자기 애인(바랑부인)에게 쓴 글을 통해 밝혀져갔다. "그녀를 보지 못할때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애착심을 가졌다" 애인이 직접 눈앞에 현전할때가 아니라 그녀를 보지 못할때 애욕을 더욱 가진것이다. 즉 '지금''여기'의 자리(목소리)가 아니라, 직접 만나지 못하는 자리(흔적, 문자)에서 더욱 그녀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데리다가 하고자했던 것은 '직접적 목소리' 대신 목소리의 이차적 표현이라 생각되어온 '문자'가 오히려 근본적이었다는 것을 밝혀보려는 시도였다.


* 음성중심주의는 서구 중심주의의 또다른 얼굴
루소는 본래 문자언어보다 음성언어에 대한 우위성을 주장했었다 "군집해 있는 대중에게 들리지 않는 언어는 모두 노예의 언어다" 라고 말할정도로 목소리로 전달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이 사정권을 넘어 문자 같은 것에 의존하는 것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서구의 철학사 전반에 깔린 음성중심주의를 확인시켜준다.


알기쉬운 예로 천지창조에 말씀이 이었고, 말과 이성을 의미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문자와 기록에 애착을 보이는 것을 거부하며 산파술의 대화법을 고집했고, 플라톤은 철학은 말하는 사람의 현전(눈앞에 있음)을 전제로 해야 진리에 가깝다고 하였다. 실제로 상대방을 앞에 둔 대화는 그 상황과 얼굴 표정등을 통해 그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파악할수 있는 반면, 글의 겨우 글의 내용을 읽는 살마 임의대로 파악할 소지가 너무 맣다. 글쓴이의 부재는 항상 왜곡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의 등장은 음성언어(로고스)의 활동에 손상을 끼치면서 외부에서 안으로 침입하여 그 본래의 의미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음성언어가 가장'순수'하다. 또한 문자가운데서도 음성언어를 가장 잘 표현된 표음문자가 상형문자보다 더 우월하다. 데리다는 서양철학 곳곳에 음성 중심주의를 확인함으로서, 표음문자 즉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구 중심주의에 대해 폭로하려 한다.


*레비스트로스가 간과한 순수성의 신화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이성의 특권에 맞서 인류의 삶의 보편적으로 지탱하는 '구조'를 밝힌 사람이다. 또 그는 야생적 세계에 대한 서구인의 침략을 분노와 슬픔으로 기록한 사람이다. 왜 데리다는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한 레비스트로스를 서구중심주의의 대표자로 표적삼았을까?


결론은 서구 형이상학이 지닌 로고스 중심주의, 순수한 목소리, 유럽적 표음문자 중심주의가 암암리에 구조주의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 예가 레비스트로스라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남비콰라 족이 애초에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원주민 사회에 들어온 인류학자가 종이와 연필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자 그들은 바로 유럽인을 흉내내 종이에 글씨 쓰는 시늉을 했다. 영리한 추장은 문자의 기능을 간파했다. 그는 곧 문자의 기호 역할과 그것이 부여하는 사회적 우월성을 이해했다. 문자를 통해, 위계가, 바로 불평등이 이 순수한 사회에 침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자라는 것은 야생인들의 삶에 속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 유럽인으로 부터 침입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자의 침입은 순수한 야생적 사회를 불평등으로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위 사건의 심층에는 서구적인 '순수성의 신화' 가 자리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야생사회는 타락한 문명(문자)이전에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구가 이를 오염시켰다는 사건은 다시 꼬집어 생각해보면 인류역사는 사실 순수한 낙원이 있었는데 인류역사는 그로부터 추방당한 역사라는 유럽의 성서신화를 야생인들에게 투영한것에 불과 하다고 주장했다. 순수함이라는 정의도 신화적 차용을 통해 근본적으로 순수한것과 오염된것을 위계적으로 가르는 비순수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평등주의와 양심 배우헤, 순수한 기원을 배타적으로 유지하려는 서구적 사고방식이 숨겨져 있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문자라는 오염 이전의 순수한 삶, 자신의 마음과 정확히 동일한 목소리만을 가지고 사는 사회는 사실 없고, 문자는모든 삶의 방식에 애초부터 침입해 있었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순수한 기원'과 그로부터 '타락한 문명 이라는 위계적 질서를 비판하고, 순수함과 타락이라는 잣대로 문명을 저울질 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위계를 만들려는 정치적 힘을(서구 중심주의) 불가능하 게한다.



* 대리보충/ 차연의 논리
기원(원본)이란 흔적(문자)에 의해서 대리되고 보충되는 '이차적 첨가물'이라는 것이 이 논리의 기본을 이룬다. 흔적이라는 대리자를 통해서만 기원은 도래하므로, 기원의 현시는 흔적에 의해 방해를 받는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흔적이라는 대리자 뒤로 기원의 도래는 무한히 '연기'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 했던 루소 애인을 예를 들면 루소의 애인을 보지못할때(원본이 부재할때) 더 애착이 생긴다는 루소의 삶 전체가 온통 원본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흔적 놀이로 가득찬 세계라는 것이다. 그 흔적의 대리자를(그녀가 쓰던 물건, 침대,선물등) 통해서 애인의 얼굴(원본)을 떠올려 내지만 이내 흔적이 원본이 될수 없기에 끊없이 미끌어진다.


루소 애인이 지금 여기 현전하지 않고 연기되며 미끌어진다는 말을 무슨 뜻일까? 그것은 루소 애인은 그녀를 대리하는 흔적은 차이와 간격으로만 도래한다는 것이다. 즉 연기와 차이를 동시에 지녔다고 하여 '차연'이 대리보충하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루소의 다른 애인, 테레즈는 현전하지 않는 어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루소는 현전하지 않는 어머니를 도래하 게하기 위해 테레즈로 대리보충했어야 했다. 문제는 기원(현전하는 어머니)이 있고, 그 기원을 모사하는 흔적(테레즈)가 있는것이 아니라다는데 있다. 기원은 흔적의 대리와 보충을 통해 뒤늦게 첨가되는 기원, 사후적으로 도래하는 기원일 뿐이다. 흔적이 먼저고 기원이 나중이다. 결국 이는 결국 진짜 기원은 부재한다는 것이 기원의 진실은 흔적 - 비기원인셈이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남비콰라 족에게 자연적 삶이 그들의 음성언어속에 현전한다고 믿었고, 루소는 현전하지 않는 어머니의 상이 애인들을 통해 현전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대리보총은 기원의 사유할수 있게 해줄지는 몰라도, 사유자체의 세계관에서  갇힌채 기원은 찾을 길이 없다.


종합하자면 서구사유의 한계적 기원은 기원을 직접 표현하는 목소리/현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의 대리보충에 의해 이차적으로 참가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기원은 없고 흔적의 기능만 남는다. 이것이 데리다가 "텍스트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는 유명한 말의 뜻이다. 근원을 첨가해주는 문자자체의 놀이만 있을뿐 문자를 벗어난 기원 그 자체는 없다는 것이다. 서구적 사유가 그 자신 안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해체주의
서구적 사유는 문자의 대리보충을 망각한 채 기원이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현전할수 있다고 착각한다. 서구적 사유가 그 자신안에 자신의 존립근거(기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해체'주의를 낳았다. 기원에 대한 믿음은 불가능해졌고, 말과 문자의 위계가 무너졌다. 말의 절대적 권위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위계질서의 전복을 '해체' 라고 표현했다. 이 논리는 남과녀, 위와아래, 앞과 뒤, 서양과 동양, 의식과 무의식등으로 불리위는 이항대립의 쌍을 위계질서가 아닌 동등함으로 바라보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해체주의'에 아주 구체적인 전략적 발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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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로부터 시작된 언어학은 차이를 통해 언어가 만들어졌다가 라캉에 의해 그것의 의미가 고정되지 못하고, 데리다의 차연에 의해 의미가 끝없이 연기되는 의미를 낳았다. 이러한 다각적인 관점의 해석은 고정적 구조주의를 붕괴시키고 탈권위, 다양성를 강조하며 과거의 형이상학과 모더니즘을 외면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으로 등장한다.


정리하자면, 구조주의 그 너머의 철학의 전개는 언어와 인류학 같은 학문의 약진, 실존주의적 인간주체의 와해, 의식 배후에 숨겨진 심층구조에 대한 강조, 모더니즘에 대한 거부, 연속적 발전사관에 반대하는 비연속적 탐구, 기득권적 서구적 시각에 대한 반성(타자배제의 역사), 기존 근거적 기반에 대한 해체등을 이야기하면서 반성철학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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