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사논문을 마치며


논문을 마치며 한가지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낀다. 내가 '계시'라는 주제를 잡았고, 고집했으며, 그리고 썼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한 것 같은 느낌말이다. 이래저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제출 전날에 아무도 터치?!할 수 없다고 소위 여겨지는 감사의 글에 이런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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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련의 일들을 거쳐 감추어진 하나님이 드러나신 순간이 기억이 납니다. 그날 이후, ‘계시’라는 주제는 저에게 연구해야 할 주제 이전에 풀어가야 할 실존적인 숙제였고, 신학공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까닭을 물으며 쫓아갔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계시’라는 주제에 천착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개인의 투사와 나르시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 있는 사유방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연속되는 일련의 질문들은 체험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던 제게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연구 이전에 숙제를 풀어가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의 결과이자 풀고 있는 숙제의 작은 한 단락을 매듭짓는 소정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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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숨겨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이상 도망가진 말아야지라는 마음도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또 왜 숨긴다는 건가? 라고 답답해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돌려 말하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힘겨웠던 어느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여서 한동안 이 이야기를 숨겼었다. 그리고 어느 은사를 가지신 분의 통변을 통해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겨우 진정이 되었고, 그 경험이 신적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하나님이 계시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이런일이 일어나나?'라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내게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은 더이상 무의미한 질문이 되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이러한 자세는 매우 위험하게 여겨졌다. 계시라는 경험은 공부를 하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투사'일 수 있다고 불려졌고, 또 누군가에게는 민중을 선동하는 '아편'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욕구불만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환상'으로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교회에서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다. 소위 '직통계시'라는 이름으로 영성파이니 지성파이니 나뉘며, 지성을 잃어버린 영성, 영성을 잃어버린 지성이라는 비판구도 위에서 그 권위를 이미 잃은 느낌이었다. 왜 영적 경험은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하게 토론될 수는 없는걸까라는 고민은 그 후 오랜 고민이 되었던 것은 그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갓 시작한 신학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겠냐만은 그 시절 공부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친구들과 어울림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시기가 있었다. 언제 한번은 신학과 친구에게 음성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나누었다. 짧은 지면에 많은 말을 남길 수 없지만, 어떤 친구는 내 고백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고, 또 어떤 친구는 왜 형은 음성을 들었으면서 바울처럼 인생이 변혁되지 않고 여전히 찌질할 수 있냐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그게 음성이 아닐 수 있으니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 계시는 육성의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과 환경, 그리고 말씀으로 오는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상처와 방어, 그리고 공격적인 말을 하고자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논문을 쓰고난 후,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한번쯤은 솔직하게 내 신학교 시절 이야기를 시원하게 서술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어쨋든 오랜 방황끝에, 졸업을 했고, 계시라는 주제는 쉽게 공유해서는 안되는 혹은 개인적 체험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에게 주장을 해서는 안되는 무엇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억지로 지은 매듭이 마음 안에 깔끔하게 자리잡지 못했었나 보다. 군 장교시절 BOQ에서도 나는 계시라는 주제와 연관된 책들이 나올 때마다 몰래 탐독하고, 내려놓고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만난 책이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였다.

군 BOQ에서 어쩌다가 연세대 종교철학과 학생으로 이어졌는지도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지만, 여기서 다 말할순 없다. 어쨋든 다시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은근히 환대받지 못한 감정은 오히려 종교철학과에서 역설적인 환대를 받았다. 종교철학과에 대한 설명은 꽤 광의적이지만 나에게 꽂힌 설명은 그 시절 하나밖에 없었다. '종교'적 인간에 대한 '철학'적 해명. 즉, 유한한 인간은 왜 무한과 같은 초월을 꿈꾸는가? 라는 질문을 안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범주 안에서 조금은 숨통을 트고 토론을 할순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나의 종교적 체험에 있었다. 토론하는 내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학자들의 이론과 인식론과 존재론, 해석학과 접촉점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유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종교철학과에서 배운 힘겨운 공부와 토론들은 학부시절 '그런 말을 하는건 위험해'라고 말하는 본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어'를 입는 일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배웠다. 유익했고, 배울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사화와 우상화, 자기신격화와 구부러진 인간의 행태등은 제아무리 신적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갈증이 있었던 것은 소위 바르트식의 무한한 질적 차이로 불리는 계시의 차원이 편하게 토론될 수 없는 신학적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열린 수업이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와 관련된 수업이었다. 바르트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지만, 본회퍼는 생각해본짐 해. 라는 교수님의 평가와 함께. 나는 그날 이후 이 책에 집착했던듯 싶다. 그리고 논문의 주제를 본회퍼의 계시이해로 잡았고, 거절당했고, 우회했고, 승인되었고, 한번 엎어졌고, 몇차례의 수정권고를 받았고, 결국 논문은 썼고, 졸업을 못할것 같았던 나는 곧 졸업을 하게되었다.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 많은 이야기는 생략할수 밖에 없을뿐이다 ㅠ)

행위와 존재에 대해 여기서 일일히 설명할 곳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바르트와 달리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한쪽에 두며 공부하면서도, 다른 한쪽에 바르트와 같은 변증법적 신학자들과 적극적으로 조우했다. 그리고 독일어로 geist 로 번역되는 정신, 혹은 성령의 차이를 두고 씨름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즉, 정신의 공동체와 영의 공동체의 차이를 알았고, 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본회퍼가 좋았다. 그리고 그런 본회퍼였기에 철학적 논의가 있는 곳에서도 본회퍼에 기대어 '계시'를 논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본회퍼가 많은 관심을 지녔던 철학자는 사람들에게 많이 거론되진 않고 있는듯 싶지만 '헤겔'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현상계 바깥에 ‘사물 자체’로 바라보았던 칸트와 달리, 헤겔은 이 땅 가운데 실현되는 ‘영(Geist)의 활동성’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현실로부터의 역사가 전개되는 이러한 헤겔의 통찰은 본회퍼에게 한편으로는 기독교 세계관을 ‘피안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많은 영역을 ‘차안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Geist)의 활동성이 그러하다면 성령(Heiliger Geist)의 활동성으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지점에 본회퍼의 철학자들과의 대립과 저항하는 지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간에 '그건 너의 투사라고, 네 정신 속의 착각'일 수 있다는 문제를 정신의 활동성이라는 '우상성'의 이름으로 죄다 정돈하고,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오직 밖으로부터 온다'는 본회퍼의 언설을 영의 활동성이라는 '타자성'의 이름으로 대립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축적되는 만나가 아니라 매순간 미래로부터 주어지는 새만나'라는 입장정도에서 학문적 말건넴의 위치를 잡았다. 그래야 홀로 개인적인 체험에서 끝나버리는 경험이 아니라 뭔가 공부해서 남주는 인생을 조금이나마 살수 있다는 교수님의 지도를 깊이 받아들인 셈이다. 그렇다. 축적되는 만나.. 그것도 시작은 계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래하는 타자적 만나가 아니라 축적된 만나에 집착하는 순간 썩은 냄새가 난다. 그 썩은 냄새를 많은 철학자들이 신학자들이 맡았을지 모른다. 반대로 도래하는 만나에 대한 감격을 많은 철학자들이 신학자들이 경이롭게 여겼을지 모른다.

논문이 끝날 때즈음에 전광훈 목사가 본회퍼의 이름으로, 직통계시의 이름으로 자신의 입장을 사사화하고, 우상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신격화 하는 현장을 본다. 뭔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아니 나조차도 일련의 여정을 통해 거부 또는 환대를 받지 않았다면, 이런 씁쓸한 마음이 이정도로 들진 않았을지 모르겠다. 신학의 언어도 부재하고, 신앙의 언어도 부재하다. 그렇다고 언어의 부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계시'라는 주제가 누군가에게는 우상화의 도구로, 또 누군가에게는 타자성의 경이로 다가오는 이 역설적인 현실에 대해 이제 조금이나마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씁쓸한 감사로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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