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계시를 종교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 본회퍼의 계시를 종교철학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종교철학과 학생이다. 석사졸업을 눈앞에 둔 입장이지만, 아직도 종교철학적?! 입장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최대한 내가 아는 범위에서 종교철학과를 소개하자면, 거칠게 말해 ‘종교’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이전에 ‘종교적 인간’에 대한 탐구이자, 그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종합하자면 “‘종교’이전의 ‘종교적 인간’의 ‘신앙’에 대한 철학적인 해명”을 연구하는 학문을 종교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신앙성찰’을 말한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철학’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정의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를 빗대자면 ‘종교철학’은 ‘종교적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어떻게/왜...”와 같은 방식으로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 그보다는 ‘종교적 인간’이 무엇을/어떻게/왜 했는지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과 지평들을 듣고, 경험했으며 토론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일부가 ‘맹목적 신앙’의 결과 나타난 폐해라는 비판을 호되게 받고 있지만, 종교철학을 공부하면 사실상 이러한 비판은 학계에서 너무나도 오래된 낡은 논의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것은 인류역사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문제를 제기 받았고, ‘종교의 우상화, 신앙의 우상화’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비판을 받아왔던 것이다. 대표적인 몇몇을 나열하자면, 포이어바흐는 신앙인들의 행태를 “자기욕망의 투사”라고 명명했고, 맑스는 “억압해소를 위한 아편”이라고, 니체는 “우상에 대한 확신”이라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환상에 대한 강박”이라고 명명하며 ‘종교적인간’이 그려내는 무늬를 비판했다.

투사, 아편, 확신, 강박으로 불리는 신앙적 양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곧바로 ‘믿음’으로 비약하기 전에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기독교의 본질을 말하며 그들이 했던 비판은 사실 이중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본의는 ‘내가 보기에 기독교의 본질은 적어도 투사, 아편, 확신과 강박만은 아닐터인데, 그렇게 작동하고 있으니 그런 식으로 서술되는 (왜곡된) 신이라면 반드시 죽어 줘야 되지 않겠소’ 라는 식의 이중적 비판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으로는 진정한 정화를, 교회 밖으로는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그들의 비판은 오늘날 우리가 새겨들어야할 신앙성찰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신앙성찰’을 건너뛰고, 곧바로 “하나님이 하셨다/하신다”라고 말하면서 “계시”를 치켜세우며 들이밀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해소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특별히 본회퍼를 공부하면서 더 자세히 말해 ‘본회퍼의 계시이해’를 접하고 나서 내부적으로 큰 갈등을 앓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계시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묻고 있는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학적 인식론을 묻는 본회퍼의 물음이 너무 독단적이고, 신앙고백적이며, 선언적이지 결코 학문적인 대화의 지평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칼바르트와 같이 자유주의를 반대하며, 그리스도교의 계시 근거를 철학, 심리학, 윤리학 또는 종교철학으로 새롭게 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즉, 계시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던 온갖 시도들(인간의 자의식의 ‘종교적 선험성’에서 찾으려는 시도, 역사적 형성체 가운데 최고의 형식으로 찾으려는 시도, 경험적인 내면성이나 정신과 체험의 영역에 관계지어 찾으려는 시도 등)을 철저히 거부한다.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인간 밖으로부터 드러난다는 “말씀의 신학”을 받아들인다. 소위 ‘아래로부터의 모든 시도’를 거절하고, 오직 ‘위로부터 들려지는 말 걸어옴’이 신학과 계시의 유일한 근거라는 주장이다. 이는 얼핏 보았을 때, 너무나도 은혜롭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아주 복음?!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하셨다/하신다”라고 주장하는 맹목적 신앙과 한 끗만 다를 뿐 똑같은 논리를 지닐 수 있다. 즉, 수많은 성찰을 하더라고 결국은 ‘그냥 믿어야지, 뭐’, ‘인간은 죄인이니까’, ‘우리는 알 수 없으니까’와 같은 반응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있다는 말이다.

물론 본회퍼는 『행위와 존재』라는 책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전개한다. 계시의 자리를 어떻게든 세상 속에서 맞갛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자들의 비판들을 피하지 않고 하나하나 분석한 뒤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교회가 바로 우리의 손으로 결단코 잡을 수 없는 ‘비대상적인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서 잡을 수 있게 하는 ‘계시의 자리’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회퍼는 ‘인간과 신 사이의 딜레마’로서의 불연속적인 지점(철저히 인식불가능한 차이라면 어떻게 계시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가)과 연속적인 지점(철저히 인식 가능한 지평이라면 그것은 신의 초월성이 아니지 않는가)을 설명 가능하게끔 해결(종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근거로서 말하는 전제는 철처히 교의학적이고, 성서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선언적이며, 배타적이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가능하게 ‘해명’해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해명’가능하지 않는 영역을 피력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한 조직신학이 아니라 종교철학의 관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해명은 철저히 ‘관계적’이고, ‘기독론’적이며, 그렇기에 배타적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신다. 계시의 존재양태는 오직 그러한 인격들의 관련 속에서만, 오직 신앙 안에서만 그때그때마다 규정될 수 있다. 결코 소유되거나, 담지되거나, 확보되거나, 예상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계시는 철저히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우연적인 사건이이고, 그러한 우연적 사건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일어날 뿐, 다른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 실존’이라는 말로,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논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회퍼에게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그것이 본래적이든, 비본래적 인간이든 철저히 아담안에 있는(죄 가운데 있는) 폐쇄적 존재일뿐이다. 본회퍼의 눈에 하이데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새로운 실존”에 대한 지평은 전무하며, 완전한 맹점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철학자들의 대화를 차용하면서도, 어떠한 대화지점에 대한 타협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 인격”, “그리스도교적 인식론”, “그리스도교적 실존(인간론)”은 철저히 ‘그리스도를 매개로’ 펼쳐지는 지평이다. 역으로, 그리스도가 매개되지 않으면 철저히 열리지 않는 지평인셈이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계시논의는 종교철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결단코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철학자들과 타협할 수 없는 경계선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기독교인/비기독교인) 십자가를 지셨겠지만,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일까. 학회에 나와있는 수많은 ‘논문’들과 ‘학술논의’에는 본회퍼의 계시이해를 결코 ‘종교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한 접근 자체가 본회퍼가 말하고자 하는 시선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본회퍼의 눈에는 종교철학이라는 학문자체가 경건한 체험과 사고의 추상화를 통해 계시에 근접하려는 수많은 시도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죄인에게 말을 건네지만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현실로서의 ‘계시’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투사, 아편, 확신, 강박으로 불리는 신앙적 양태”의 비판을 성찰의 도구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포함하고도 넘어서는 계시이해를 갖춘 새로운 신앙양태를 그려내고, 신앙적인 해명을 거쳐 변증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본회퍼의 전략은 ‘공동체 통한 철학적 해명’이 그의 계시이해의 맹목적인 이해에 대한 탈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명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나님을 향한 초월이 인간에 의해 계속적으로 자행되니, 차라리 나도 아닌, 너도 아닌, 제3의 길인 사회성의 교제로서 ‘공동체’, 인격적 교제로서의 ‘공동체’로 돌림으로서 어느정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쪽 하나로 포괄되는 자기중심성을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 의해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공동체로 설정함으로서 ‘신앙적 자기우상화’를 보편적 지평에서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공동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관계된 공동체’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철저히 기독론적이며, 배타적이다. 하나님을 향한 초월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만 주어지고, 결단코 인간에 의한 초월적 반성이나 성찰을 통해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선험적이며,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길은 초월철학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불가능하다.

자, 그렇다면 본회퍼의 계시이해는 철저히 ‘이론’이 아니라 ‘태도’적이지 않는가. 보편적인 해명을 해야하는 학문은 어디까지나 특수적인 계시를 말하는 본회퍼의 이해 앞에 어떠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은 내가 조직신학이 아니라 종교철학과에 입학해 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자, 생각보다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하며, 급진적이라는 사실 앞에 서 있음을 깨달아가기에 던지는 질문이다. 어쩌면 본회퍼는 이미 애매한 경계에 대해 선을 분명히 그었고, 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유의 성찰’이 아니라 ‘사고의 순종’을 말하며 “믿는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자만이 믿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교적 인식론”은 그렇다면, 철저히 순종에 깃대어 있는가. 그것만이 유일한 길인가. 종교철학과 학생으로서 나의 외로움은 여기에 기인해 있다.(나는 본회퍼의 계시이해로 종교철학과 석사논문을 준비할 계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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