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공동체를 읽고

 

교회라는 집단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성도의 교제』는 본회퍼의 박사논문이다. 원제sanctorum(거룩한것들)Communio(교제,사귐)로 불리는 이 책은 『거룩한 공동체』로 읽히길 권장받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책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한번 생각해보자.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인가? 거룩한이들이 모이는 곳인가? 의문을 뒤로 한 채, 한번 더 질문해 보자. ‘거룩한 공동체’가 있다고 치자.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땅에 실재하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한 유토피아로 남아있는가? 이 땅에 있다면 그 공동체는 여러 개의 ‘집단’중의 하나인가? 아니면 여러 ‘집단’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가? 본회퍼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 말한다. 거룩한 공동체는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재하며, 구체적인 세상 한복판에서 독특한 형태의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단,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러 붙여봤다. “교회라는 집단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라는 제목을. 조금 도발적일지 몰라도, 난 이러한 제목이 교회내부와 교회외부를 향해 “진정한 교회는 말이지..” 하며 울부짖는 본회퍼의 비판과 고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책의 부제는 ‘교회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다. 본회퍼는 ‘교회’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는데, 신학논문이 의례하듯 하나님의 뜻(계시)을 곧바로 치켜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속에 한 모습인 ‘교회라는 공간’의 독특함에 주목한다. 만일 바르트가 잡히지 않는 하나님의 현현을 ‘번개’라고 묘사하며, 그 뜻을 인간이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면, 본회퍼는 반대로 ‘번개’를 치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번개’를 맞은 흔적과 장소로서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바로 그곳이 본회퍼가 보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새로운 뜻(의지)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체적인 장소로서 우리가 밤에 십자가 달린 교회를 살펴볼 수 있듯이, 구체적인 사회 한복판에 때로는 미스테리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공존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교회공동체라는 집단의 특징이 무엇일까? 이들은 무엇 때문에 모이고, 어떤 내용으로 함께하며, 어디를 향해 가는 집단인가. 본회퍼 이 박사논문에서 이 모든 질문에 단순한 하나님의 뜻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 더욱 구체적인 사회학적 사건으로서 이 세상 한복판에 있는 교회의 자리를 묻는다.

 

1. 교회는 이익사회인가? 공동사회인가?
2. 교회는 개별인격들의 종합인가? 집단인격으로서 하나인가.
3. 집단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정신이 있는가? 교회는 집단정신으로서, 헤겔과 같이 객관적인 정신은 주관적인 정신을 넘어 절대정신 같은 것을 지향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집단이해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있는가? 이를테면 성령.
4.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잠재적인가? 아니면 완성적인가? 잠재적이라면 전체성으로 드러난 모습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인가? 만일 전체성의 근거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현재의 교회공동체에 의존할 수 있는가?
5. 교회의 원형은 어떠한가? 가시적인 ‘경험적 교회’는 곧 보이지 않는 ‘본질적 교회’를 투영하는가?
6. 교제의 방식은 어떠한가? 단순히 사회적 교제(협회, 기관)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영적인 교제는 무엇이 다른가? 영적인 교제의 특징은 무엇인가?
7.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교회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존하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이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정말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겠지만. 나는 결론적으로 『성도의 교제』에서 본회퍼가 발생학적-사회학적인 이해로 접근되는 수많은 의문들로부터 ‘영 공동체’로서 교회를 구출하려는 시도를 엿본다. 그는 먼저 이러한 온갖 질문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그리스도에 의해 화해된 현실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오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와 너의 사회적 관계의 ‘사이’에 그리스도가 매개되어 있고, 타락한 현실과 회복된 현실 ‘사이’에 그리스도가 매개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를 다른 타자와 다른 세상이라고 분리하지만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의 현실’과 ‘하나의 공동체’를 엮는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기대어 말씀이 ‘들려진’ 곳으로서 교회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현실이다.

 

더나아가 그는 사회적 교제를 넘어서 ‘영적 교제’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결코 개인을 원자화하는 ‘개체주의적 공동체’도 아니고, 사회를 개체보다 앞서는 것으로 설정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인격은 자기자신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존재로 교회로 존재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영의 다양성 안에서의 영적인 일치, 즉 영적교제로 인해 가능하다. (이것은 관념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의 통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영은 영의 내재적 통일을 위해 구체적인 개별인격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야 영이 하나요. 영원한 동일자, 초인격적인 존재로서 인류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여러 개별적인 영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띠로 묶는 성령을 말한다. 즉, 영적일치는 유기체적 통일이라기보다 믿음의 통일, 공동체적 통일ㅡ영안에서 하나됨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은 끝자락에 이르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스도다’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기에 까지 이른다. 우리는 비록 죄로 인해서 파괴된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화해된 현실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로서 용서를 행하고, 고통받고, 고난받는 현실에 직접적인 참여와 구속을 행한다. 즉, 그리스도가 나와 인류의 죄를 위해 ‘대속’하셨듯이, 이제는 ‘공동체로 현존하는 교회’가 타자와 세상 죄를 위해 ‘대리-행위’를 하며 고난받는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학적 유형으로 교회를 보는 행위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교회는 다른 모든 공동체처럼 경험적 종교공동체의 형태를 띄지만, 영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책임적인 응답을 행한다. 성령안에서 개별인격은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집단인격은 주님의 사명을 짊어지고 간다. 개별인격은 결코 집단인격에 의해 흡수되지 않으며, 오히려 집단인격은 개별인격과 동시에 ‘공동체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즉 개별인격에 나타난 영의 다양성은 영적 교제를 이루며 객관적 정신으로서 ‘일치된 교회의 영’을 세상가운데 나타낸다. 그러니 본회퍼의 결론은 의미심장하다. 교회는 결코 비가시적 형태로 우리가운데 있지 않다. 오히려 더욱 가시적으로 세상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인상깊은 구절에 그은 하나의 밑줄은 『거룩한 공동체』의 함의를 잘 대신하고 있다. 이를 소개하고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그는 진정 살아있는 증인공동체를 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의 ‘종교단체’가 아니라 인간들 가운데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_디트리히 본회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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