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교제와 나다공동체

#. 성도의 교제와 나다공동체.

<성도의 교제> 읽었다. 아니 읽어 보았다. 때론 이해가 되지 않아도, 때론 선문답같이 느껴지고, 구조적 난해함에 길을 잃더라도 멈추지 않고 끙끙거리며 읽어 나갔다. 마지막장을 읽을 때쯤, 어렴풋히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단어들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종말론적이고 시원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저 너머의 '피안'이 아니라 현실 한복판이라는 '차안'의 중심으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우리의 교회가 보여줘야 한다는 그의 사자후가 들리는듯 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왜 이책의 부제가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유럽의 국가사회주의가 낳을 '전체주의'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낳은 '개인주의' 사이에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가야할 길은 그 양자택일도 그 종합도 아닌 교회공동체 고유의 사회적 정체성의 구조가 있음을 피력했다. 그야말로 단순 '논문'이 아니라 시대적 문제의식에 터한 실존적인 몸부림이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변증법적 '사명'에 가까웠던 것 같다.

받은 통찰에 비해 담아낸 그릇이 짧은 내가 <성도에 교제>에 대해 할 수 있는 해제는 많지 않다. 누군가의 말마따라 반복되어 나타나는 '객관적 정신'개념이 헤겔철학에 영향을 그리스도교적 인격개념으로 승화시켰다든지, 성령의 개입이 없는 '나-너'관계의 사회적 기본관계의 한계라든지에 대해서 그 흔적만 느꼈을 뿐 자세한 분석이 아직은 요원하다. (이 책으로 인해 진심 헤겔의 정신현상학쯤은 읽어봐야하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이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은 뜬금없지만 읽는 내내 '내가 다니는 교회공동체(나다공동체)'가 생각났다는 점이다.

이제와서 고백하지만, 내가 만일 나다공동체에 다니지 않았다면 진심 이책을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예배는 "성령이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도록 그 공간을 내어드리는 것"이라는 담임목사님의 철학이 없었더라면, 갈등과 연대는 "우리가 형제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기보다, 그리스도에게 형제에 대해 말하며 울 때" 회복된다는 실제적인 공동체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심 본회퍼가 말한 교회공동체는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공동체를 넘어서는 '영의 공동체'라는 사실은 그저 뜬그름 잡는 담론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의 공동체는 결코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담론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라는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너'를, 너가 '나'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바라보면서 서로 관계맺을 때, 그리스도가 행한 타자를 위한 존재의 인격 속으로 우리가 참예할 때, 그것은 현실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건이 된다. 만일 내가 상처로 가득찬 제도권 교회의 경험에 빗대어 이 글을 읽었더라면, 그야말로 한 신학자의 글은 그야말로 빗좋은 개살구로 동경하다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종일관 한 신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를 실천하려 했던 우리 공동체의 한 선교사님이, 한 전도사님이,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사랑의 행위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면서도, 그 일이 성령안에서 자신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한다라는 굴복함을 삶으로 증명했고, 지금도 증명하고 있다. 참으로 눈물나는 일이다.

본회퍼의 말마따라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또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의 일치가 가르키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위가, 그 짊어짐이 만들어낸 새로운 현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물었던 한 젊은 신학자의 고심 속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그의 고백대로 교회의 객관적 정신은 참으로 '성령'이 되기를, 종교적 사귐의 체험은 참으로 '교회의 체험'이 되기를, 교회의 집단인격은 참으로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되기를 우리는 고대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설적 깨달음은 결코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거룩한 공동체로 나를 온전히 용서해준 수많은 나다공동체 교인들의 짊어짐에 그 빚을 지고 있다. 본회퍼의 저 마지막 고백이 삶의 자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려준 건 순전히 그들이 보인 환대와 사랑 안에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밤에는 공동체 성도들에게 안부전화라도 드려야할까 싶다.

"사랑의 공동체는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의 계시속에서 마침내 드러난다. 나와 너는 서로를 구하고, 찾으며, 서로에게 자신을 부어준다. 현실과 진리는 마침내 하나가 된다. 사랑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인간은 더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바로 '그 곳'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 이러한 복음은 결코 신비적 합일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삶의 가장 강력한 실현을 일컫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 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인간들의 하나님, 곧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250)

ㅡ. 17. 09. 12 성도의 교제를 덮으며..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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